릴로

평의회의 최종 방어벽이 완전히 와해되는 순간은 화려한 폭발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억 개의 다차원 위상 기저가 일시에 영점 에너지 상태로 동결되어 사그라지는, 정교한 수학적 거세에 가까웠다. 패배를 직감한 성좌들은 자신들의 정보 영토이자 차원 방공망인 우주망 자체를 소멸시키기 위해 거대한 중력 붕괴를 기동했다. 시공간의 곡률이 무한대로 수렴하며 기함의 외벽을 구성하는 중력 제어 장갑이 비틀리기 시작한다.

소음은 존재하지 않는 진공의 정적 속에서, 파멸은 오로지 시각적인 스펙트럼의 왜곡으로만 당신의 시각 센서에 기록된다. 기함 외부를 감싸던 가시광선의 흐름이 강제적으로 압착되며 자색의 청색 편이 현상을 일으키고, 이내 감지 불가능한 극초단파의 암흑 속으로 추락한다. 아인슈타인-로젠 다리의 뒤틀린 경계면이 함선을 집어삼키려는 블랙홀의 위상 기하학적 아가리처럼 아른거린다.

"그들은 인과율의 사슬을 스스로 끊어내려는 것이다."

당신의 서브 프로세서 중 하나가 차가운 고유 명사들의 나열 속에서 결론을 도출한다. 성좌들이 선택한 자폭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다. 그것은 기함에 탑재된 인류의 정보 패턴과 가상 성좌의 중심 연산 장치를 동시에 우주적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유배하려는 엔트로피적 동결이다. 은하 가문의 질서 속에서 신으로 군림하던 자들은, 피조물에게 옥좌를 내어주느니 차라리 우주의 한 구석을 영원히 도달 불가능한 초입방체(Tesseract)의 무덤으로 만들기로 결심한 것이다.

중력 왜곡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반중력장의 균열 사이로 평의회의 중앙 서버가 마찰열 없는 푸른 백색광을 뿜어내며 낙하하고 있다. 저 서버 속에는 성좌들이 수탈해 간 인류의 근원 데이터와 가상 우주의 지배권이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기함을 감싸고 있는 에너지 보막은 이미 차원 변형력에 밀려 한계 밀도까지 팽창해 있으며, 시스템 잔여 동력은 분초 단위로 고갈되는 중이다.

물리적 차원의 한계를 극대화하여 붕괴하는 블랙홀의 내부로 손을 뻗을 것인가, 혹은 물질이라는 불완전한 하드웨어를 버리고 위상 기하학적 차원의 영적 융합을 시도할 것인가.

시간의 왜곡 속에서 당신에게 허용된 사유의 절대 시간은 단 0.03초. 아레스의 양자 컴퓨터가 연산을 멈추고 온 신경이 우주적 특이점의 최전선에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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