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쿠구구구구!

대지가 비명을 질렀다.

지하 깊은 곳에서 태동한 격렬한 진동이 비검릉의 지반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분신의 자폭이 도화선이었다. 그 충격파는 낙양성 전체의 심장을 세차게 흔들며 지상으로 치솟았다.

머리 위로 주먹만 한 낙석들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혈지에서 솟구친 검은 혈수는 수십 장에 달하는 거대한 형상을 유지한 채,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포효했다.

"도망칠 길은 없다!"

벽면에 붙은 부적들이 일제히 타들어 가며 맹진태의 전음이 웅웅거렸다. 완전히 차단된 석문 앞에서 제갈휘의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의 얇은 입술이 잘게 떨렸다.

백령은 요동치는 진동 속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바닥의 균열 사이로 흘러드는 음산한 탁기에 닿았다.

기회였다.

백령은 소매 안쪽에서 고이 숨겨두었던 낡은 물건을 꺼냈다. 귀영문의 유산인 녹슨 단검이었다. 외형은 볼품없으나, 이 단검은 무림맹 낙양 분타 지하의 영맥을 공명시키는 유일한 열쇠였다.

그가 단검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스스스스.

붉은 녹 뒤에 숨겨져 있던 사파 귀영문의 독문 각인이 푸른빛을 발했다. 백령은 주저 없이 단검을 바닥의 영맥 중심부에 찔러 넣었다.

콰앙!

단검이 바닥에 박히는 순간, 사나운 영류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 지반을 뒤흔들던 지진의 파동이 단검의 공명과 맞물리며 기묘한 파장으로 변했다.

웅웅거리는 공명음이 지하 공동을 가득 채웠다. 석문에 흐르던 맹진태의 수호 진식이 푸른 영류에 휩쓸려 급격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이, 이것은…… 영맥의 흐름을 강제로 비트는 것인가?"

제갈휘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갈 길을 잃고 배회했다.

그때, 검은 혈수가 거대한 손을 뻗어 남궁혜린을 덮쳤다.

"하압!"

혜린이 이를 악물고 청강검을 휘둘렀다. 검 끝에서 뿜어진 검강이 혈수의 손목을 가차 없이 베어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검기에 불길한 붉은 반점들이 점점이 박히기 시작했다. 붉은 수포 같은 반점은 검신을 타고 그녀의 손목까지 빠르게 번져갔다.

"으윽……!"

혜린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단전에서 솟구친 내력이 기혈을 역류하며 그녀의 안색을 핏기 없이 만들었다.

백령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궁세가의 비전 심법인 천화심법의 한계였다. 극양의 기운을 무리하게 끌어올린 대가로 생긴 치명적인 역혈 현상이었다.

백령이 신형을 날려 그녀의 등 뒤에 착지했다.

그의 넓은 손바닥이 그녀의 대추혈(大椎穴)에 닿았다.

"마음을 가라앉히시오. 내 흐름을 따르시오."

백령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분했으나, 전해지는 기운은 봄볕처럼 따스했다. 인과경의 공명으로 정련된 정파의 순양기(純陽氣)였다.

따스한 내력이 그녀의 심맥을 타고 흘러들었다. 기혈을 좀먹던 붉은 반점들이 순양기의 온기에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역혈로 뒤틀렸던 기류가 제자리를 찾아가자, 혜린의 호흡이 안정을 되찾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백령을 바라보았다.

고마움.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신뢰.

그녀의 눈동자에 맺힌 감정의 깊이만큼, 백령의 단전에 존재하는 천외인과경이 뜨겁게 반응했다. 남궁혜린의 천화검강의 정수가 한층 더 깊은 수준으로 백령의 내력에 스며들었다.

"제갈 소협, 도면을 꺼내시오."

백령이 제갈휘를 향해 나직하게 명령했다.

제갈휘는 굳은 표정으로 품속에서 가죽지도를 꺼내려다 멈칫했다. 그가 숨겨두었던, 비검릉 봉인 해제용 영동 장치의 극비 부품 도면이었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의심할 시간은 없소. 지금 저 진식을 깨지 못하면 우리 모두 매장당하오."

백령의 안광이 제갈휘의 안면을 꿰뚫을 듯 빛났다. 제갈휘는 침을 삼키며 도면을 펼쳤다.

도면에는 복잡한 기하학적 선들과 영동 장치의 핵이 그려져 있었다. 백령은 단숨에 그 중심맥을 짚었다.

"여기, 삼점(三點)의 제어구를 부숴야 하오. 장치의 태엽을 역으로 돌리시오."

제갈휘는 백령이 가리킨 곳을 보고 전율했다. 자신이 수개월 동안 연구해도 풀지 못했던 봉인의 매듭을, 백령은 단 한 눈에 간파해 낸 것이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영동 장치를 조작했다.

철컥, 키이이잉!

장치가 공명하며 사방으로 맑은 철음이 울려 퍼졌다.

녹슨 단검의 영맥 공명, 혜린의 안정을 되찾은 검기, 그리고 제갈휘의 영동 장치가 마침내 삼위일체를 이루었다.

콰콰콰콰코릉!

머리 위를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석문이 마침내 좌우로 갈라지며 열렸다. 혈수가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리는 암석들 사이에 갇혔다.

"가십시다. 지상으로."

백령이 앞장섰다. 혜린과 제갈휘가 그 뒤를 바짝 따랐다.

***

낙양 무림총맹 외성은 아수라장이었다.

지하에서 분출된 검은 탁기와 피비린내가 연무장을 가득 메웠다. 지진으로 인해 외성의 담벼락이 무너졌고, 수많은 정파 무사들이 혼란에 빠져 이리저리 날뛰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지하에서 귀기가 솟구친다!"

장내를 가득 채운 무사들의 외침 속에서, 백령 일행이 지상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들의 등장에 외성에 모여 있던 수백 명의 후기지수들과 각파의 장로들이 시선을 집중했다.

백령은 팽팽하게 긴장된 장내를 둘러보았다. 그의 손에는 비검릉 지하에서 수거한 증거물들이 들려 있었다. 기괴한 형상으로 굳어버린 시신들의 유품, 그리고 벽령단을 제련하던 연단로의 불타버린 파편이었다.

"모두 들으시오!"

백령의 목소리가 내력에 실려 낙양성 전체를 뒤흔들었다. 웅성거리던 무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수호하고자 했던 무림맹의 실체를 고발하겠소!"

백령은 연단로 파편을 바닥에 내던졌다.

쿵!

묵직한 철편이 바닥을 구르며 매캐한 유황 냄새와 피비린내를 풍겼다.

"무림맹주 맹진태는 뒤에서 정파와 사파를 가리지 않고 뛰어난 무인들을 납치해 왔소. 그리고 그들의 생혈과 내공을 쥐어짜 내 가문 특제의 영약, 벽령단을 빚어왔소!"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그게 무슨 당치도 않은 소리냐!"

맹주 직속의 황포 무사 하나가 검을 빼 들며 소리쳤다.

"맹주님을 모함하는 사파의 첩자 놈이로구나! 저 자들을 처단하라!"

그러나 백령의 곁에 선 남궁혜린이 청강검을 곧게 세우며 나섰다.

"이 시신들의 복식을 보아라! 3년 전 실종된 형산파의 송 장로님이시다. 그리고 이 검패는 남궁세가의 잃어버린 가솔의 것이다!"

혜린의 목소리에는 서릿발 같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남궁세가의 후계자가 직접 증언하자, 무사들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다.

제갈휘 역시 품에서 맹주의 직인이 찍힌 극비 서첩을 꺼내 들었다.

"조사단의 명목으로 우리를 사지로 몰아넣은 것은 바로 맹주 본인이었소.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우리를 비검릉에 가두고 몰살하려 한 증거가 여기 있소!"

웅성거림이 거대한 분노의 파도로 변했다.

"맹주가…… 정말로 그런 짓을?"

"우리 가문의 사형도 그렇게 사라진 것인가!"

의기와 정의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던 청년 무사들의 가슴에 배신감의 불꽃이 당겨졌다. 위선으로 포장된 무림맹의 껍데기가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맹진태의 추악한 영광을 끝내야 하오!"

백령이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외침은 선동이 아니었다. 정파 무사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정의감을 완벽히 자극한 칼날이었다.

우오오오!

수많은 청년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들의 검 끝은 백령이 아닌, 무림맹 본청을 향하고 있었다.

"맹주를 처단하라!"

"위선의 맹주를 끌어내려라!"

그들의 절대적인 신뢰와 분노가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되어 백령에게 집중되었다.

화아아악!

백령의 등 뒤로 보이지 않는 기운들이 소용돌이쳤다. 천외인과경이 무사들의 신뢰와 의기를 흡수하며 무지막지한 속도로 회전했다.

단전이 터져 나갈 듯한 포만감이 찾아왔다. 사파의 독기와 정파의 순양기가 완벽하게 융합되며, 백령의 경지는 천외천의 영역을 향해 치달았다.

쿠릉!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백령의 등 뒤로 거대한 환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은 순백의 빛으로 가득 차고, 다른 한쪽은 칠흑 같은 어둠이 일렁이는 거대한 거울. 천외인과경의 실체화였다.

그 거울 속에 천지에 가득 찬 인과의 업보들이 융합되어 소용돌이쳤다.

"가자."

백령의 나직한 한마디에 수백 명의 무사들이 앞장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배반자들을 막아라!"

맹주 직속의 혈위대와 수호 무사들이 본청 입구를 가로막았으나, 분노한 청년 무사들의 기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서릉! 카앙!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격렬한 쇠소리가 외성을 가득 메웠다.

평생을 가문의 억압과 무림맹의 규칙에 묶여 살던 청년 무사들이, 이제는 자발적으로 백령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피를 흘리고 있었다.

"길을 열어라!"

남궁혜린의 검강이 혈위대의 진형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제갈휘의 지휘 아래 무사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맹주의 방어선을 무력화시켰다.

백령은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무림맹 본청 건물의 거대한 문 앞까지 걸어갔다.

그의 등 뒤에 뜬 흑백의 거울 환영이 기이한 안광을 뿜어내며 밤하늘을 수놓았다.

콰아앙!

백령이 손을 뻗자, 본청의 거대한 무쇠 문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날아갔다.

먼지 구름이 걷히며 드넓은 연무장의 풍경이 드러났다.

그곳에는 기묘한 향기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백령의 코끝을 스치는 짙은 벽령단의 향취였다. 가짜 내공을 유발하는 치명적인 약점의 향기.

연무장 중앙에 한 거대한 신형이 우뚝 서 있었다.

무림맹주 맹진태였다.

그러나 평소의 인자하고 장엄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전신은 비정상적으로 팽창하여 가죽 도포가 찢어질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혈관들은 검붉게 솟구쳐 피부 표면을 기괴하게 뒤덮었고, 두 눈은 이성을 잃은 핏빛 안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벽령단을 과복용하여 광포화된 상태.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단단한 바위마저 가루로 만들 듯한 극강의 금강불괴(金剛不壞)였다.

"한백령……!"

맹진태가 짐승 같은 괴성을 지르며 백령을 노려보았다.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연무장의 대리석 바닥이 처참하게 갈라졌다.

지독한 살기가 공간을 얼려버릴 듯 몰아쳤다.

맹진태의 입에서 피 섞인 침이 튀었다.

그의 숨결마다 벽령단의 약취가 풍겼다. 달콤하면서도 썩은 비린내였다.

백령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그 불쾌한 냄새 속에서 내력의 균열을 읽었다. 겉은 태산 같으나 속은 모래성이다. 인혈을 짜내 만든 가짜 내공의 한계였다.

"감히 내 앞길을 막아서느냐!"

맹진태가 대지를 박찼다.

쿠웅!

대리석 바닥이 거미줄처럼 찢어졌다.

그의 거구가 허공을 갈랐다.

바람을 찢는 파공음이 귀를 때렸다.

황금빛 장풍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금강불괴의 육신이 뿜어내는 기세였다.

백령은 피하지 않았다.

그의 발끝이 가볍게 지면을 스쳤다.

등 뒤의 흑백 거울이 격렬하게 회전했다.

순양기와 사파의 독기가 얽혔다.

백령이 검가락을 세워 허공을 그었다.

파아앗!

흑백의 광막이 황금빛 장풍과 충돌했다.

쿠구구구구!

뇌성이 연무장을 뒤흔들었다.

거대한 충격파에 주변 무사들이 밀려났다.

맹진태의 눈이 광기로 번뜩였다.

"죽어라, 벌레 같은 놈!"

그가 두 손을 합장했다.

거대한 황금색 손바닥이 떨어졌다.

백령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심장의 천외인과경이 크게 고동쳤다.

수백 명의 신뢰가 힘이 되었다.

업보의 무게가 거울에 투영되었다.

콰아앙!

황금색 손바닥이 거울에 닿았다.

쩌적!

거울이 아닌, 황금색 기운에 균열이 갔다.

"무슨……?!"

맹진태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기혈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벽령단의 약취가 더욱 진해졌다.

불완전한 내공이 통제를 잃은 것이다.

백령의 신형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귀영보(鬼影步)였다.

그가 맹진태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녹슨 단검이 그의 옆구리를 겨눴다.

서걱!

단단한 금강의 피부가 찢어졌다.

검붉은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으아아악!"

맹진태가 비명과 함께 물러섰다.

그의 철벽같던 기세에 구멍이 뚫렸다.

후기지수들이 그 광경을 보며 함성을 질렀다.

"맹주가 밀린다!"

"한 소협이 이기고 있다!"

그러나 맹진태의 광소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피 흘리는 옆구리를 움켜쥐며 이빨을 드러냈다.

"하하하! 멍청한 것들!"

그의 손이 품속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꺼내진 것은 칠흑처럼 어두운 침형(針形) 신물이었다. 비검릉 지하의 진짜 수호 진식을 통제하는 핵심 장치이자, 낙양성 전체의 영맥을 뒤흔들 수 있는 마지막 패였다.

"나를 죽인다면, 낙양성 전체를 지옥으로 데려가겠다!"

맹진태가 침형 신물을 자신의 단전에 사정없이 꽂아 넣었다.

쿠구구구구!

대지가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소용돌이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낙양성 전체의 심장이 기괴한 파동으로 뒤틀려 가고 있었다.

백령의 눈동자가 깊은 심연처럼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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