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의 사역마가 흔적 없이 연소하며 남긴 영적 파편 속에서, 기이한 파동이 일었다. 사위가 얼어붙는 지 지하 대피소의 혹한 속에서도, 우진이 쥐고 있던 낡은 가죽 장부는 스스로의 살가죽을 문지르듯 거칠게 요동쳤다.
스르륵, 쩍.
얼어붙은 종이들이 찢어지듯 넘어가며 붉은 먹선이 번져 나갔다. 그 위에 깊게 새겨지는 문장들은 연우진의 망막에 피비린내 나는 활자로 안착했다.
[특수 정보 해제: 담보 대상 ‘연우희’의 영혼 단편 검출.] [채권자 백일홍이 소유한 고택 심층부 ‘황천의 용광로’에 영혼의 8할이 속박되어 있음.] [소멸 및 영구 정제 잔여 시간: 168시간(7일).] [기한 내 채무를 전액 청산하거나 용광로를 파산시키지 못할 경우, 담보물은 백일홍의 영구 자산으로 흡수되어 소멸함.]
일주일. 남은 시간은 단 일주일뿐이었다.
우진의 품 안에서 옅은 매화나무 향기가 서린 인형 소체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가슴 뼈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지독한 한기가 혈관을 타고 번졌다. 심장은 이미 멈춰 있었으나, 여동생의 영혼이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정보는 그의 기괴한 감정 불감증마저 뚫고 들어와 영혼을 짓이겼다. 우진은 제 가슴을 쥐어짜듯 인형을 품에 안았다. 스스로의 죽음 앞에서는 그토록 태연하던 사내가, 보이지 않는 동생의 흐느낌에는 뼈마디가 바스러지도록 반응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세 시간 뒤.
우진과 서율은 지하 빙한실의 혹독한 냉기를 장부의 채무 상쇄 거래로 간신히 모면한 뒤, 지상 2층의 폐쇄 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상으로 올라오는 계단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천장에서 뚝, 뚝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고요한 복도에 불길한 메트로놈처럼 울려 퍼졌다. 2층 복도 끝에 다다르자, 이국적인 석조건물과 구한말의 한옥이 기괴하게 뒤틀려 결합한 넓은 대청마루가 나타났다.
그곳은 일종의 폐쇄 세트장 같았다. 사방이 거대한 나무 기둥과 정교하게 조각된 창호문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중앙에는 정체 모를 거대한 기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단 너머, 가장 깊숙하고 안전해 보이는 상방(上房)의 문턱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마강현이었다.
그는 지하에서 홀로 탈출할 때 다친 듯, 오른쪽 다리를 절며 부목을 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추호의 비굴함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주변에는 지하의 참극에서 살아남은 다른 생존자 서세희와 방민우가 마치 신도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마강현은 그들의 중심에서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상처 입은 이들의 어깨를 다독이고 있었다.
"살아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우진 씨. 그리고 서율 씨도…… 신의 가호가 여전히 우리를 저버리지 않았군요."
마강현이 양손을 모으며 부드럽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는 성당의 종소리처럼 맑고 고요했으나, 우진의 눈에는 그의 옷깃 뒤편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절반 이상 타버린 붉은 진흙 부적이 선명하게 보였다. 백일홍과의 은밀한 무효 계약 유물. 그 비장의 카드가 훼손된 탓인지, 마강현의 안색은 이전에 비해 눈에 띄게 파리해져 있었다.
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마강현의 발밑과 그들이 발을 딛고 있는 대청마루 전체를 내려다보았다.
장부가 눈앞에서 반투명한 황금빛 장막으로 펼쳐지며, 2층 세트장을 지배하는 기괴한 규칙을 활자로 띄워 올렸다.
[구역 명칭: 위선적 한옥 제단] [시스템 규칙: '가장 순결한 영혼의 피'를 중앙 기단에 바쳐야만 다음 구역으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 단, 기단에 바쳐지는 피의 양은 대상의 '죄악의 총량'과 반비례한다. 죄가 깊은 자의 피일수록 제단은 더 많은 양을 요구하며, 가장 순결한 자의 피는 단 한 방울만으로도 문을 열 수 있다.]
기괴하고 잔인한 조율이었다. 결국 누군가를 제물로 삼아 그 피를 제단에 쏟아부어야만 이곳을 나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아으윽……."
대청마루 한구석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황만식 일당의 습격 때 깊은 부상을 입고 버려진 아웃사이더 생존자, 김태석이었다. 그의 복부에서는 여전히 검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고,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마강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김태석에게 다가갔다. 그는 자신의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태석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
"태석 형제님, 낙심하지 마십시오. 비록 우리가 이 좁은 고택에서 서로를 의심하고 상처 입혔으나, 결국 구원은 희생과 사랑을 통해 완성되는 법입니다. 제가 형제님의 고통을 짊어지겠습니다."
마강현의 신앙심 깊은 고백에, 곁에 있던 서세희가 감동한 듯 눈시울을 붉혔다.
"역시 강현 씨밖에 없어요. 저 무자비한 연우진이라는 사람은 우리를 버려두고 자기들끼리만 살아남으려 했는데……."
위선.
우진은 마강현의 그 정교하게 다듬어진 표정 밑바닥에 숨겨진 차가운 계산기를 보았다. 마강현의 시선은 은밀하게 김태석의 상처 부위, 즉 흘러넘치는 피에 닿아 있었다. 태석을 치료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제단의 규칙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태석을 '순결한 제물'로 포장해 그의 피를 통째로 기단에 쏟아부을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추악한 이중성이 공기를 타고 썩은 냄새처럼 풍겨왔다. 우진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기묘한 구역질을 느꼈다. 타인의 비명에 비정상적으로 동조하는 그의 감각이, 김태석이 느낄 배신의 절망을 미리 감지하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우진은 말없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연우진 씨, 무슨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마강현이 눈매를 둥글게 휘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승자의 여유가 묻어났다. 지상 2층의 생존자 무리는 이미 자신의 가식적인 자비에 완전히 장악되어 있었으니까.
우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언쟁으로 감정을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대신, 그는 왼팔의 지독한 마비를 견뎌내며 오른손으로 품속의 명부장부를 꺼내 들었다.
스스스슥.
장부의 가죽 표지가 공기 중의 수분을 흡수하며 검게 젖어 들었다. 우진의 체온이 영하로 뚝 떨어지며 주변의 공기가 서늘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대청마루의 삐걱거리는 나뭇결 사이로 하얀 서리가 침묵처럼 번져 나갔다.
"또 그 불길한 책을 꺼내는군요."
마강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 책이 당신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다는 걸 모릅니까? 사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회개하고 신의 품으로……."
"마강현."
우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마치 기계가 뱉어내는 음습한 금속음 같았다.
"당신의 장부를 펼쳐보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신을 대변한다는 당신의 영혼이, 과연 제단이 요구하는 '순결한 피'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
우진이 장부의 한 페이지를 거칠게 찢어 허공으로 던졌다.
파앗!
찢어진 종이 조각이 공중에서 스스로 타오르며 푸른 불꽃을 일으켰다. 그 불꽃은 이내 대청마루의 높은 천장으로 쏘아 올려지더니, 거대한 홀로그램 스크린처럼 넓게 퍼져 나갔다.
고택의 음산한 어둠 속에서, 천장에 투사된 빛이 기괴한 형상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떤 회사의 사무실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지금보다 조금 더 젊고, 눈빛이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마강현이 서 있었다.
"저, 저게 뭐야……?"
방민우가 침을 삼키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화면 속의 마강현은 어떤 서류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서류의 제목이 거대한 붉은 글씨로 확대되어 공중에 떠올랐다.
[투자금 횡령 및 기획 파산 합의서] [피해자: 주식회사 한빛 기획 직원 42명] [동료들의 퇴직금 및 투자 자산 무단 인출액: 46억 원]
그와 동시에, 화면이 전환되며 어두운 방안에서 절망에 찬 얼굴로 목을 매는 사내들의 실루엣이 차례로 나타났다. 그들의 발밑에는 마강현이 보낸 '투자금 회수 불가 통보서'가 흩날리고 있었다.
"아, 아니야! 이건 악마의 환상이다! 나를 모함하기 위한 환각이야!"
마강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의 정갈하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지며 비명이 터져 나왔.
그러나 장부의 시스템은 자비가 없었다. 천장에 투사된 홀로그램 옆으로, 시뻘건 숫자들이 실시간으로 계산되며 흘러내렸다.
[죄인: 마강현] [원한 자산(債務): 한빛 기획 인과 채권 - 46억 원 (이자율 연 240% 복리 적용)] [간접 살인 및 사기죄 카르마 손실: -18,500 포인트] [영혼의 순수도: 0.03% (극도의 오염 상태)]
숫자가 확정되는 순간, 대청마루 전체에 기괴한 울음소리가 진동했다. 마강현이 팔아넘긴 동료들의 원혼들이 지르는 비명이었다. 형체 없는 검은 그림자들이 천장에서 내려와 마강현의 어깨와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듯한 환영이 모두의 눈에 선명하게 비쳤다.
"이…… 이 더러운 사기꾼 새끼가……."
김태석이 피를 흘리면서도 이빨을 갈았다.
"우리더러 죄인이라며 회개하라고 하더니…… 정작 지는 수십 명의 피눈물을 짜내서 배를 불린 악마였잖아!"
서세희 역시 경악한 표정으로 마강현에게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강현 씨…… 정말이에요? 저게 진짜 당신의 과거예요?"
"믿지 마! 저건 저 연우진이 부리는 요술이야! 나를 음해해서 지옥으로 떨어뜨리려는……!"
마강현이 미친 듯이 소리쳤으나, 이미 그를 향한 신뢰는 유리창이 깨지듯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추종자들의 눈빛은 따뜻한 존경에서 지독한 혐오와 공포로 바뀌어 있었다.
말싸움도, 물리적인 폭력도 없었다. 우진은 오직 장부에 기록된 절대적인 인과의 수치만으로 마강현이 쌓아 올린 위선의 성벽을 단숨에 무너뜨린 것이다. 시스템적 폭로를 통한 완벽하고 차가운 역정벌이었다.
우진은 얼어붙은 왼손을 천천히 들어 마강현을 가리켰다.
"제단이 요구하는 피의 양은 죄악의 깊이에 비례하지."
우진의 목소리가 대청마루의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낮게 깔렸다.
"마강현. 당신의 피라면, 아마 온몸의 혈액을 전부 짜내어 제단에 바쳐도 이 문은 열리지 않을 거다. 당신이 가진 죄의 무게가 너무 무거우니까."
"으, 으아아아악!"
마강현은 자신을 향해 좁혀오는 서율과 생존자들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더 이상 숨길 위선도, 자신을 지켜줄 추종자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품속의 부적이 완전히 재가 되어 바스러지는 순간, 그는 자신의 종말을 직감했다.
"그래! 다 죽자! 나만 이 지옥에서 썩을 순 없다!"
마강현이 품속에서 정체 모를 검은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그가 우화각의 심층부에서 은밀히 손에 넣은, 원귀들의 원한을 극대화하는 '흑수(黑水)'였다.
파앙!
그가 바닥에 병을 내던지자, 지독한 피비린내와 함께 검은 액체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동시에 천장에서 쩍쩍 균열이 가기 시작하더니, 붉은 피고름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대청마루의 공간이 기괴하게 뒤틀리며, 우진과 서율이 서 있는 공간 사이에 거대한 철제 격벽이 굉음과 함께 낙하하기 시작했다.
쿵! 콰아아앙!
지독한 피비린내 속에서, 우진의 시야가 차단되었다. 격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서율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마강현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새로운 단절. 그리고 장부가 다시 한번 우진의 손안에서 불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