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을 향해 짓쳐드는 흑색 소멸 창의 끝부분이 허공을 찢는 파열음을 냈다.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공격이 아니었다. 대상의 데이터 자체를 영구히 말소하는 관리자의 강제 삭제 프로토콜. 스치기만 해도 존재 자체가 세계의 메모리에서 지워질 절대적인 파멸의 궤적이었다.
하지만 내 눈동자에는 두려움 대신 차가운 손익 계산서가 떠올라 있었다.
"어디서 공짜로 데이터를 지우려고 들어."
나는 허공을 향해 손가락바닥을 튕겼다.
[오류 코드: Memory_Leak_0x889F 활성화] [시스템 백엔드 보정식 적용 중...]
과거 1화에서 시스템 백엔드 로그를 이 잡듯 뒤지다 발견했던, 정체 모를 ‘미확인 메모리 누수 버그’의 코드 단서가 내 손끝에서 붉은빛의 노이즈가 되어 폭발했다. 시스템조차 인지하지 못해 방치해 두었던 쓰레기 데이터의 잔해들이 소멸 창의 이동 경로에 무차별적으로 끼어들었다.
콰아아앙!
소멸 창이 허공에서 기괴하게 꺾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끈적한 진흙탕에 처박힌 것처럼, 창의 끝부분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로그의 공백을 메우지 못한 에러 코드가 물리 법칙의 인과율을 일시적으로 비틀어 버린 결과였다. 소멸의 에너지는 내 심장 바로 3센티미터 앞에서 굴절되어 쉘터 하우스의 단단한 외벽 너머, 저 멀리 황무지로 빗겨 나갔다.
지평선 끝자락이 흔적도 없이 증발하며 거대한 분지 모양으로 내려앉는 충격파가 고막을 때렸다.
"쿨럭!"
그와 동시에 내 목구멍에서 뜨거운 핏덩이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척추를 타고 뇌수까지 곧바로 들이치는, 신경망이 통째로 불타는 듯한 극심한 전신 통증. 왜곡 권능을 행할 때마다 지불해야 하는 끔찍한 에러 피드백이었다.
[경고! 동기화율이 70.4%로 하락했습니다.] [경고 수치 도달 임박! 영구적인 시스템 에러(뇌사) 위험 노출.]
눈앞이 핑 돌았지만 나는 이빨을 사려 물었다. 아직 장부 정리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우르릉!
하늘이 일그러진 납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구름이 소용돌이치며 걷히고, 그 거대한 틈새로 강림한 것은 대지를 가득 메울 크기의 거대한 은빛 감시 기계였다.
지구 서버의 포맷을 집행하기 위해 나타난 시스템 관리자, 앱실론(Epsilon).
그 중심부에 박힌 거대한 인공 눈동자가 핏빛으로 번뜩였다. 그 눈동자는 쉘터 요새를 향해 명확한 살의를 품고 있었다. 정확히는, 시스템의 규격을 벗어난 ‘불법 삭제 데이터’로 인식하고 있었다.
-불법... 프로세스... 감지... -지역 ID: 쉘터 하우스... 강제... 포맷... 실행...
앱실론의 동체 주변으로 은빛의 파괴 광선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공기가 타들어 가다 못해 백색의 진공 상태로 변해갔다. 지구를 태초의 원시 상태로 되돌려 놓으려는 극광의 데이터 파괴 광선, ‘화이트 아웃(White Out)’의 캐스팅이었다.
저 광선이 지면에 닿는 순간, 이 요새의 물리 법칙은 물론이고 지반을 이루는 흙 한 줌까지 전부 디지털 먼지가 되어 사라질 터였다.
"태현 씨!"
요새 제어실의 모니터 너머로 한설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찢고 흘러나왔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례적인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출력이 상식을 벗어났어요! 저건 단순한 마법이 아니에요. 공간의 좌표 자체를 초기화하는 시스템 정화 프로토콜이에요. 장벽의 물리 방어력으로는 물리적인 상쇄가 불가능해요!"
"알고 있어."
나는 가슴에 고인 피를 바닥에 뱉어내며 냉혹하게 웃었다.
"물리로 안 되면, 시스템 버그로 막으면 돼."
나는 쉘터 하우스의 제어 권한을 백엔드로 전환했다. 손가락이 허공의 가상 키보드를 폭풍처럼 두들겼다.
앱실론이 쏘아 보내는 화이트 아웃은 완벽한 직선의 궤적을 그린다. 그것이 관리자 프로토콜의 한계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수식의 완벽함.
하지만 나는 그 완벽함 위에 가장 지저분한 ‘마찰 마법 코드’를 뒤죽박죽으로 코딩해 얹어 버렸다.
[쉘터 외벽 영역 코드 수정: Friction_Coefficient = NaN (정의되지 않은 값)] [에러 돔(Error Dome) 생성 중...]
시스템의 기본 물리 연산 장치에 ‘숫자가 아닌 값(NaN)’을 억지로 집어넣는 순간, 요새를 둘러싼 공기의 마찰 계수가 무한대와 영(0) 사이를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쉬이이이이익!
하늘에서 쏟아진 백색의 소멸 광선들이 쉘터 표면에 닿는 순간, 비스듬한 각도로 굴절되며 산산조각이 났다. 마치 거울에 비친 빛이 사방으로 산란하듯, 대지를 증발시켜야 할 정화의 광선들이 요새의 외벽을 타고 하늘과 대지 양옆으로 튕겨 나갔다.
콰콰콰콰쾅!
요새 주변의 대지가 흰색 빛무리 속에서 기화하며 거대한 구덩이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쉘터 하우스 자체는 단 한 조각의 타일도 깨지지 않은 채 멀쩡히 서 있었다.
신적인 존재가 내린 세상 소멸용 파괴 폭격을, 땜질식 에러 코드를 덕지덕지 기워 붙인 굴절 실드로 사방에 튕겨내 버린 것이다.
"이게... 가능한가요?"
통신망 너머로 한설아의 턱이 빠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관리자의 공격을 궤적 변조로 우회시키다니... 시스템 백엔드의 연산 오류를 역이용해서 굴절 각을 만든 거군요."
"저 기계 덩어리는 정해진 규칙대로만 움직여. 버그가 터지면 연산 순위가 밀릴 수밖에 없지."
나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전신이 찢어지는 고통이 다시 한번 뇌리를 때렸지만, 나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진정한 사이다는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주도권을 빼앗고, 저 오만한 관리자의 대가리를 장부로 찍어 누르는 것까지가 내 방식이다.
그때, 제어실 모니터를 주시하던 한설아가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외쳤다.
"태현 씨, 제가 수년간 고장 난 상태창을 연구하면서 축적했던 데이터 기억하시죠? '던전 포털 주기의 72시간 불확실 붕괴 위험성' 기밀 통계 자료요!"
"그래, 공간이 붕괴하기 직전에 시스템 프레임이 일시적으로 지연되는 현상 말이지."
"맞아요! 지금 앱실론의 동체 출력 변화와 그 통계 자료의 공간 왜곡 주기를 동기화해서 분석해 봤어요. 저 존재가 초대형 정화기를 출력할 때, 시스템 백엔드가 그 막대한 데이터를 처리하느라 아주 미세한 과부하가 걸려요."
한설아의 눈동자가 이성적인 확신으로 빛나고 있었다.
"정확히 0.82초. 그 찰나의 순간 동안 앱실론의 백엔드 프레임이 프리징되어 멈춰요! 이 타이밍에 전진 슛 차트를 설계해서 코드를 밀어 넣으면, 저 녀석의 내부 데이터로 직접 침투할 수 있어요!"
그녀가 전송한 데이터 시트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소멸 광선을 쏘아낸 직후, 앱실론의 마력 중추가 재충전되는 순간 발생하는 0.82초의 찰나적인 정지 상태.
"훌륭해, 한설아. 밥값은 확실히 하는군."
나는 즉시 작전을 구상했다. 0.82초는 일반적인 각성자라면 인지조차 할 수 없는 극소의 시간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짧은 틈새야말로 시스템의 보안 필터를 우회할 수 있는 고속도로나 다름없었다.
우회 접속을 위해서는 한 가지 열쇠가 더 필요했다. 관리자의 보안망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고유한 인증 코드.
내 머릿속 장부의 한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갔다.
과거 유진우가 무심결에 흘렸던 정보가 뇌리를 스쳤다. 아크 연합의 지배자이자, 시스템의 비호 아래 온갖 특혜를 누리던 사악한 지배자 신무경.
‘신무경 그 자식, 시스템 백도어를 자기 전용 패시브로 등록해 두고 쓰고 있었어. 그 식별 정보가...’
유진우의 회귀 기억 속에서 건져 올렸던 신무경만의 고유 백도어 접속 패시브 식별 정보, [ID: Ark_Admin_0091X].
나는 그 고유 식별 코드를 내 왜곡 장부에 기입했다. 신무경에게서 빼앗아 내재화해 두었던 백도어 가상 주소에 해당 식별 정보를 덧씌워 위장 인가 코드를 완성했다.
"신무경, 네 놈이 남긴 찌꺼기가 이렇게 쓸모가 있을 줄은 몰랐군."
하늘의 앱실론이 2차 화이트 아웃을 준비하며 붉은 인공 눈동자를 다시금 부릅떴다. 막강한 에너지가 쉘터 상공에 집중되며 공간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광선이 뿜어져 나오기 직전, 한설아가 외쳤다.
"지금이에요! 프리징 시작!"
0.82초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0.82초...]
나는 주저 없이 허공으로 도약했다. 쉘터의 중력 제어 코드를 왜곡해 내 몸을 하늘을 향해 탄환처럼 쏘아 올렸다.
[0.50초...]
눈앞에 앱실론의 거대한 은빛 동체가 육박했다. 붉은 인공 눈동자의 깊은 곳, 백엔드 데이터의 흐름이 일시적으로 정체되어 굳어진 프레임이 내 특수 시야에 선명하게 포착되었다.
[0.21초...]
나는 위장된 신무경의 백도어 식별 코드를 장부 왜곡 키에 결합하여, 앱실론의 중심부를 향해 사정없이 찔러 넣었다.
쩍!
공간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내 손끝이 앱실론의 핵심 시스템 속성창 경계면을 뚫고 들어갔다.
[경고! 인가되지 않은 관리자 권한 접근 감지] [검증 코드 분석 중... 'Ark_Admin_0091X' 일치 확인] [임시 우회 권한 승인]
성공이었다. 시스템은 나를 '신무경'이라는 허가된 백도어 이용자로 오인했고, 그 찰나의 허점을 타 내 골든핑거가 앱실론의 내부 데이터 데이터베이스를 통째로 훑어 내렸다.
[상위 오브젝트 '포맷터-앱실론'의 시스템 속성창 복사 중...] [복사 완료!] [초월적 권능: '정화 사양 마스터 키(Purification Master Key)' 정보를 획득하였습니다.]
지구 서버를 완전히 제어하고 초기화할 수 있는, 신의 영역에 속한 절대적 마스터 키의 속성 정보가 내 상태창 장부 안으로 강제로 복사되어 들어왔다. 전대미문의 하이재킹이었다.
"크으윽...!"
그 대가는 실로 끔찍했다. 뇌수가 통째로 끓어오르는 듯한 고통에 눈앞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몸의 모든 모공에서 붉은 피가 안개처럼 뿜어져 나왔다.
[경고! 동기화율이 68.9%로 급락했습니다!] [경고! 영구적인 시스템 손상 경고!]
하지만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비웃음을 지었다.
신이라 불리는 시스템 관리자의 뒤통수를 완벽하게 후려치고, 그들이 세상의 종말을 집행하기 위해 사용하던 가장 강력한 도구를 내 장부 속에 집어넣었으니까.
"이제 누가 청소기 자루를 쥐고 있는지 똑똑히 봐라."
내 손아귀에서 앱실론에게서 복사해 낸 마스터 키의 푸른빛 코드가 소용돌이쳤다.
자신의 가장 신성한 권능을 일개 인간에게 탈취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일까.
기계적이고 무감각하던 앱실론의 은빛 얼굴 형상이 순식간에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인공 눈동자가 검붉은 빛으로 타오르며, 시스템의 에러 노이즈가 하늘 전체를 가득 메우는 굉음으로 변해 전해졌다.
-오류... 허용... 범주... 초과... -수정... 불가능한... 치명적... 에러... 발생... -강제... 시스템... 리부트... 및... 대상... 영토... 동결... 개시...
콰르릉!
앱실론의 동체에서 검은색의 장막이 뿜어져 나와 주변 십 리 안팎의 대지를 순식간에 뒤덮었다.
단순히 어두워진 것이 아니었다. 주변 일대의 모든 마력 수치와 물리적 중력 계수가 말 그대로 '동결'되어 움직임을 멈췄다. 대기 중에 흐르던 바람도, 떨어지던 흙먼지도 허공에 그대로 박제된 듯 고정되었다.
나 역시 공중에 뜬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절대적인 속박에 갇혀 버렸다. 백도어를 통해 들어온 앱실론이 주변 영역의 시스템 제어권을 강제로 고정해 버린 것이다.
도망칠 방법도, 우회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명백한 시스템적 감금.
그리고 내 눈앞에 붉게 점멸하는 거대한 시스템 타이머가 떠올랐다.
[위험! 서버 초기화 오버클럭 캐스팅(Server Initialization Overclock Casting) 가동] [남은 시간: 10초] [해당 영역 내의 모든 물리적·디지털적 개체는 탈출 불가 상태로 고정됩니다.]
10초 후, 이 일대는 우주의 시작점과 같은 무(無)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나를 옭아맨 중력 동결 사슬은 풀리지 않았고, 타이머의 숫자는 비정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9.
8.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