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경고등이 시야를 피비린내 나는 선홍빛으로 물들였다.
귓가를 찢는 고주파 소음과 함께, 아카이브 챔버의 공기가 순식간에 진공 상태처럼 희박해졌다. 천도현의 발밑에서 회전하는 거대한 구체, ‘오레아 엔진’이 뿜어내는 보랏빛 파동은 단순한 마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스템의 소스코드 그 자체를 물리적으로 구현해 낸 압도적인 권능이었다.
[경고! 시스템 제어 코어 '오레아 엔진'의 물리적 주파수 간섭 발생!] [경고: 무장 거래 통로의 입출력 신호 라인이 강제로 폐쇄되었습니다.] [차원 거래소 권능 사용 불가 (Lock)] [강제 경매 권능 사용 불가 (Lock)]
"커흑……! 이, 이게 무슨……!"
강태윤이 무릎을 꿇으며 바닥을 짚었다. 전투력 2,500의 초인적인 버프를 두르고도 신체의 제어권을 빼앗긴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의 육중한 대검이 바닥에 부딪히며 신경질적인 쇳소리를 냈다.
"독점. 한강진."
천도현이 수트 깃을 가볍게 정리하며 한 걸음 내디뎠다. 그의 기계적인 푸른 안광이 한강진의 얼굴을 집요하게 훑었다.
"네놈이 전 서버 유저들의 수수료 트랜잭션을 모아 내 목을 조르려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의 영역을 침범한 대가는 혹독할 것이다. 거래소가 없는 너는 그저 나약한 버그 캐릭터에 불과하지."
천도현의 손짓 한 번에 챔버 천장의 백색 레이저 포문들이 일제히 가동되었다. 그 조준선이 한강진의 이마와 심장에 정렬되는 순간, 한강진은 오히려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버그 캐릭터라."
한강진의 목소리는 기묘할 정도로 차분했다. 배신과 음모의 구렁텅이에서 뼈를 깎아내며 배운 것이 있다면, 적이 승리를 확신하고 이빨을 드러낼 때가 가장 확실한 ‘기회’라는 사실이었다.
"천도현 사장님. 현실에서 대기업 좀 굴려 보셨다고 게임 시스템도 아주 본인 지갑처럼 편하게 쓰시는 모양인데."
"허장성세는 거기까지다."
"장사꾼이 밑천도 없이 판에 들어오는 거 보셨습니까?"
한강진이 품에서 푸른빛으로 진동하는 반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은은한 어둠의 마력이 실핏줄처럼 얽혀 있는 장신구. 그것은 드래곤의 둥지에서 서지수의 손가락을 통째로 압류하며 뜯어냈던 영혼 귀속 아이템, ‘영겁의 밤 반지’였다.
"이게 왜 내 손에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무슨 수작이냐."
천도현의 무감각한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서지수 그 멍청한 여자는 이 반지의 진짜 가치를 몰랐지. 오직 마력 증폭률만 보고 헤헤거렸겠지만, 이 물건에는 치명적인 설계 결함이 있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채지안 씨?"
뒤쪽에서 안경을 치켜올린 채 태블릿을 두드리던 채지안이 감정이 거세된 어조로 답했다.
"정확합니다. 해당 반지는 마력의 과부하를 방지하는 댐퍼 회로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외부에서 강력한 동조 주파수가 유입될 경우, 방출된 마력을 무한 루프로 흡수하다가 임계점에서 대폭발을 일으키는 구조입니다. 한마디로, 걸어 다니는 마력 누수 시한폭탄이죠."
"그 폭탄에 불을 붙여 보죠."
한강진이 반지를 천도현의 발밑, 오레아 엔진의 에너지가 흘러나오는 도선 위로 정확히 던져 넣었다.
파지직! 퍼어어억!
반지가 보랏빛 주파수와 접촉하는 순간, 상상을 초월하는 기계적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었다. 영겁의 밤 반지가 가진 마력 누수 루프가 오레아 엔진의 출력 파동을 강제로 동조시켜 빨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시스템 간섭의 주파수가 급격히 교란되며 점멸했다.
[시스템 경보: 외부 노이즈 주파수 유입! 물리적 간섭 제어력 14% 저하!] [차원 거래소 접속 차단 상태가 불안정해집니다.]
"이깟 장난감 편법으로 내 제어권을 뚫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천도현이 격노하며 오레아 엔진의 출력을 더 올리려 했다.
하지만 한강진의 진짜 패는 이제 시작이었다.
"지안 씨. 장부 열어젖히시죠. 우리가 그동안 냈던 세금, 이제 환급받을 시간입니다."
"예. 독점 님. 국세청의 뺨을 갈겨버릴 준비가 끝났습니다."
채지안이 품에서 꺼내 든 것은 누렇게 빛이 바랜, 그러나 찬연한 금색 마력이 깃든 고대의 양장 문서였다. 과거 극초반 전장에서 획득했으나 정체불명의 봉인에 묶여 사용할 수 없었던 히든 아이템.
| 아이템 정보 | | | :--- | :--- | | **아이템명** | 고대 아스텔리아 제국 면세 칙령 (해독 완료) | | **등급** | 신화 (Mythic) | | **보유 효과** | [세금 면제 및 강제 환급]: 사용 즉시 시스템 세무국에 동결된 모든 자산의 락(Lock)을 영구 해제하며, 징수된 수수료의 100%를 지체 없이 인출 가능한 가용 재화로 전환함. | | **특이 사항** | 세무 광인 채지안의 완벽한 세법 해독으로 인해 시스템 보안 우회 적용. |
"이 봉인된 증서의 세무적 문맥을 해독하는 데 꽤나 애를 먹었습니다만."
채지안의 손가락이 가볍게 튕겨지자, 면세 칙령 문서가 빛의 입자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아스텔리아 시스템의 자금 동결 규정 제47조 2항. '제국의 위기 상황 시, 면세 면허를 소지한 거상의 자산은 국가 비상 재원으로 강제 우선 인출된다.' 천도현 씨. 당신이 서버 리셋 프로토콜을 가동한 덕분에, 시스템은 지금을 '비상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아주 고맙게도 말이죠."
쿠구구구궁-!
그랜드 아카이브 내부뿐 아니라, 전 서버의 하늘이 황금빛 동전의 비로 가득 차는 환각이 유저들의 시야에 펼쳐졌다.
[시스템 메시지: '고대 아스텔리아 제국 면세 칙령'의 효력이 발동합니다!] [세수 독촉 인스턴스 전장에 동결되어 있던 '독점'의 자산 4,500억 골드가 즉시 동결 해제됩니다!] [가용 재화 잔액: 457,890,231,100 Gold]
"4,500억…… 골드라고?"
강태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게임 역사상 단 한 번도 단일 유저가 보유해 본 적 없는, 전 서버의 유통 화폐를 통째로 긁어모은 듯한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천도현의 이마에 마침내 핏대가 섰다.
"자금이 풀렸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냐! 입출력 신호 라인이 닫혀 있는 한, 네놈은 그 돈을 단 1골드도 경매장에 올리지 못한다!"
"아, 그럴 겁니다. 보통의 시스템 안에서는 말이죠."
한강진이 시계를 보았다. 정확히 오후 11시 58분.
"하지만 천 사장님. 당신이 만든 오레아 엔진의 기저 소스코드를 분석해 보니까 아주 재미있는 취약점이 하나 있더군요. 시스템 제어 코어는 단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최대 트랜잭션 수량에 한계가 있어요. 특히, 수수료 계산 공식에 버그가 있지."
"……뭐라?"
"수수료 99.9% 짜리 초고가 단일 경매가 일제히 격발되면, 오레아 엔진은 그 세금과 수수료를 연산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모든 제어 프로세스를 중단하고 연산 루프에 빠집니다. 그 지연 시간이 정확히 몇 초인지 아십니까?"
한강진이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딱 3초."
"미친 소리! 그런 대규모 트랜잭션을 한순간에 일으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혼자라면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내가 왜 전 서버 유저들의 자산을 크라우드 펀딩으로 모았겠습니까?"
한강진이 허공에 손을 뻗어 시스템 채널을 개방했다. 그의 목소리가 아스텔리아 전역에 울려 퍼졌다.
[전 서버의 유저 여러분. 아틀라스의 노예로 살다 계정 삭제를 당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악마 같은 지배자의 대가리를 깨부수는 데 동참하시겠습니까?]
화면 너머로 수백만 유저들의 울분과 갈망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계정과 피땀 어린 자산이 한강진이 개설한 '차원 연동 신탁 계좌'로 실시간으로 동기화되었다.
"전 서버 유저 통합 트랜잭션, 격발합니다."
한강진이 손을 내리치자, 채지안이 대기시켜 두었던 매크로 연산 장치가 미친 듯이 돌아가기 수작했다.
[시스템 경보: 전 서버 유저 14,200,981명의 자산 통합 경매 신청 감지!] [거래 품목: '녹슨 단검' 1,420만 개] [개당 입찰가: 30,000 Gold] [설정 수수료율: 99.9%]
수천억 골드가 단 하나의 트랜잭션 파일로 묶여 오레아 엔진의 연산 장치 속으로 들이쳤다. 99.9%라는 악랄하기 짝이 없는 수수료 공식을 1,400만 번 동시에 연산해야 하는 과부하가 엔진의 중앙 처리 장치를 강타했다.
쿠웅-!
오레아 엔진의 회전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터빈에서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천도현의 눈동자에 켜져 있던 푸른 안광이 완전히 소등되었다.
"어…… 억……!"
천도현의 몸이 돌처럼 굳어졌다. 그의 절대적인 시스템 지배력이 완전히 정지한 순간이었다.
[시스템 에러: 오레아 엔진 연산 과부하 발생!] [경보: 시스템 제어 루프가 3.00초간 일시 중단(Hang)됩니다.] [기믹 윈도우(Gimmick Window) 개방! - 남은 시간 3초]
"3초."
한강진의 눈이 번쩍였다.
"내 평생 동안 가장 길고, 가장 비싼 3초가 되겠군."
[차원 거래소 접속 성공 (Temporary Unlock)] [강제 경매 권능 사용 가능]
간섭이 해제된 찰나의 틈새를 타, 한강진은 주저 없이 오레아 엔진의 중심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차원의 문을 여는 칠흑 같은 균열이 뿜어져 나와 거대한 회전 구체를 통째로 감쌌다.
"가압류 신청합니다."
[특수 권능 '차원 거래소' 가 발동합니다!] [가압류 대상: 아스텔리아 시스템 제어 코어 - '오레아 엔진 핵심 연산 장치'] [경매 등록 완료! 강제 경매를 시작합니다.]
"미, 미친놈……! 감히 시스템의 심장을 경매에 올려?!"
석화 상태에서 풀려난 천도현이 비명을 지르며 손을 뻗었으나, 이미 경매 창은 전 서버 유저들의 눈앞에 거대하게 선포된 뒤였다.
| 경매 물품 정보 | | | :--- | :--- | | **물품명** | [영혼 귀속] 아스텔리아 시스템 관리자 권한 디스크 (오레아 엔진 핵심부) | | **소유 지분** | 100% (현 소유자: 천도현) | | **시작 입찰가** | 4,500억 Gold (즉시 낙찰가 동일) | | **현재 입찰자** | 독점 (한강진) | | **남은 시간** | 1초 |
"낙찰."
한강진의 짧은 한마디와 함께, 면세 칙령으로 해제되었던 4,500억 골드가 단숨에 증발했다.
[낙찰 완료!] [시스템 제어 코어 '오레아 엔진'의 소유 지분 99%가 유저 '독점'에게 강제 귀속됩니다!] [수수료 99% (4,455억 Gold)가 임의 책정법에 의해 다시 '독점'의 계좌로 즉시 환급됩니다!]
"……어?"
천도현이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끝에서 흐르던 보랏빛 물리 파동이 연기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시스템의 관리자 전용 UI가 그의 시야에서 차례차례 강제로 로그아웃되며 붉은색 '권한 상실(Unauthorized)' 문구로 도배되었다.
"이, 이게 무슨…… 내가 어떻게 쌓아 올린 제국인데! 단돈 몇 초 사이에 주인이 바뀌어?!"
"주인이 바뀐 게 아닙니다."
한강진이 다가가 천도현의 어깨를 툭 쳤다. 그 가벼운 터치 한 번에, 천도현의 캐릭터가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사정없이 고꾸라졌다.
"원래 내 가문의 자산이었던 것을, 이제야 정당한 수수료를 얹어서 회수한 것뿐이지."
천도현이 절망적인 눈빛으로 한강진을 올려다보았다. 전 서버를 리셋해 모든 유저를 디지털 소작농으로 만들려던 그의 야망은, 단 3초의 랙과 수수료 99%의 덫에 걸려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태윤 씨."
한강진의 부름에 강태윤이 짓눌려 있던 몸을 일으키며 흉포한 미소를 지었다.
"이야, 대가리 조준 완료했습니다, 독점 님."
"깔끔하게 청소해 주십시오. 더러운 버그 덩어리는 시스템에 남겨둘 필요가 없으니까요."
"오냐! 이 아틀라스 개새끼들아! 오늘이 느들 제삿날이다!"
강태윤의 거대한 대검이 불꽃을 뿜으며 천도현의 머리 위로 낙하했다. 단 한 격에 천도현의 캐릭터는 무참히 파괴되며 데이터 파편이 되어 아카이브 바닥으로 흩어졌다.
전 서버에 울려 퍼지는 시스템 메시지는 명확했다.
[알림: 시스템 제어권의 99%가 새로운 최고 주주 '독점'에게 이전되었습니다.] [서버 리셋 프로토콜이 영구 중단됩니다.] [아스텔리아의 경제 주권이 유저 연합으로 반환됩니다.]
"해, 해냈어……! 우리가 이겼어!"
"독점 만세! 수수료 깡패 만세!"
전역에서 들려오는 유저들의 환호성이 아카이브의 천장을 뒤흔들었다.
채지안마저도 안경을 고쳐 쓰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완벽한 세무 조율이었습니다. 이로써 아틀라스의 분식 회계 장부는 완전히 소멸했고, 우리의 순이익은 전 분기 대비 4,200% 증가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지안 씨."
한강진은 천도현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오레아 엔진의 제어 콘솔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아스텔리아의 모든 시스템은 그의 손안에 있었다. 현실의 아틀라스 코퍼레이션을 인수합병하기 위한 마지막 단추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바로 그 순간.
위이이이잉-!
콘솔의 비상 경보 장치가 다시 한번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시스템 내부의 에러가 아니었다. 외부 네트워크망을 통해 전송되는 극비 통신 로그였다.
[경고! 현실 아틀라스 본사 연구소로부터 극비 주파수 하이재킹 감지!] [대상 데이터: '아스텔리아 시스템 코어 백업 물리 드라이브'] [경보: 서지수가 현실 사설 수송기를 이용해, 시스템의 원천 기술 데이터가 담긴 물리 드라이브를 해외로 유출하려 시도 중입니다!]
화면에 띄워진 실시간 GPS 추적 장치에는, 현실의 인천국제공항 격납고에서 이륙 준비를 서두르는 사설 제트기의 실루엣이 선명하게 표시되고 있었다.
"서지수……."
한강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게임 속 권능을 잃자, 현실의 물리적인 드라이브를 훔쳐 해외로 망명하려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게임은 끝났는데, 현실판 추격전을 원하시는 모양이군."
한강진이 품에서 현실 연동 단말기를 꺼내 들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게임과 현실을 관통하는 거대한 전쟁의 마지막 막이, 마침내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