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기름때와 탄포 향이 가득한 군기시(軍器寺)의 대장간, 이제는 '군무사정 기계창'이라 불리는 철강 연동 공장의 중앙에 서 있다. 고종 황제의 전폭적인 신임으로 군기시 판사 겸 군무백(軍務伯)의 직제를 하사받은 지 고작 석 달. 조정의 완고한 사대부들은 당신을 가리켜 나라의 재정을 파탄 내는 요술쟁이라 극언을 퍼부었으나, 당신이 공창에서 찍어낸 강선 소총과 균일한 규격의 황동 탄피를 목도한 임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기술의 도약에는 반드시 혹독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탄피 제작을 위해 전국의 구리 엽전과 사찰의 놋그릇까지 징발하자 시장의 물가는 요동쳤고, 초석과 유황의 수입 통로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국가 재정의 삼분의 일이 고갈되었다. 기계화 병기를 주조하기 위한 무연탄과 철광석의 수송선이 대동강을 메웠으나, 분업화되지 못한 조선의 장인들을 압박하여 정밀한 기계 부품을 깎아내게 하는 공정은 수많은 사상자를 낳았으며 민심은 흉흉했다.
바로 그 틈을 타, 북방의 거대한 야수가 이빨을 드러냈다.
러시아 제국의 외무대신이 보낸 국서가 외아문(外衙門)에 도달한 것은 동지(冬至)를 사흘 앞둔 날이었다. 러시아는 조선의 급진적인 군사 국산화가 극동의 세력 균형을 깨뜨린다는 명목 하에, 두만강과 압록강 국경 너머 연해주와 만주 지역에 10만 대군을 집결시켰다. 철도 부설이 채 끝나지 않은 시베리아 노선의 한계로 인해 그들의 군수품 보급선은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있었지만, 조선 북부의 험준한 산악 지형을 감안하더라도 10만의 정규 카자크 기병과 최신식 맥심 기관총 포병대의 위세는 파멸적이었다.
"이대로 저들이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넌다면, 한반도 전역이 도륙날 것이다."
어전회의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갑다. 비축된 군량은 함경도 관군이 고작 한 달을 버틸 수준에 불과하며, 만약 이 전쟁을 위해 농민들을 대규모 보상 징발(徵發)한다면 내년 봄에는 대기근이 조선을 덮칠 것이 자명했다. 조정의 대신들은 겁에 질려 러시아와의 굴욕적인 타협을 읊조리고, 고종은 떨리는 눈빛으로 전권을 쥔 당신을 바라본다.
조선의 명운이 걸린 북방 해빙기 전야. 적들의 대대적인 남하를 저지하고 침략의 예기를 꺾기 위해, 당신은 설계도 군단이 잠든 무기고의 묵직한 철문을 열어젖힌다. 국경을 흔드는 철마들의 진군 소리가 동풍을 타고 한양까지 들려오는 듯한 착각 속에서, 당신의 손가락 끝이 두 개의 작전 계획서 위를 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