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철갑을 관통한 탄환의 열기가 걷히기도 전에, 골짜기를 메운 것은 비릿한 동(銅)의 증기와 초연, 그리고 이성적인 사고를 불허하는 침묵입니다. 자율 구동 식 다포신 기관포가 뿜어낸 극초음속의 화력은 토호의 사병 수백을 단 몇 분 만에 완벽히 분쇄했습니다. 전근대적인 화약 무기의 한계를 거부하는 이 압도적인 학살극 앞 세간의 반응은 외경을 넘어선 극도의 공포였습니다.

그러나 전술적 압승은 곧 정무적 위기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지방 사족 일가의 몰락과 사병 집단의 증발은 인근 삼남 지방의 세곡 수송망을 즉각적으로 마비시킵니다. 관할 관찰사는 황급히 한양의 병조(兵曹)로 변란을 알리는 급보를 올렸고, 무명의 이인이 다스리는 '철제 기지'의 존재는 조정뿐 아니라 정동(貞洞)에 포진한 외세의 밀정들까지 자극합니다. 한강 너머의 일본 공사관과 청국의 북양 조계지는 이 전대미문의 화기 분석을 위해 서둘러 첩보원을 급파합니다.

당신의 자동화 공장은 규격화된 무기를 무한히 생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교하게 맞물린 외줄타기와 같습니다. 정밀 탄약의 비축분은 한계가 명확하며, 뇌관에 필수적인 기폭제인 풀민산 수은과 황동 탄피는 현 조선의 조악한 광업 기술과 제련법으로는 공급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함경도 삼수갑산의 구리 광산과 연계된 조업 체계를 구축하거나, 조정과의 공식적인 무역 통로를 열어 수입 원자재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이 첨단 기지는 머지않아 정전된 고철 더미로 전락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조정에서 파견한 이른바 '비적 토벌군'의 깃발이 기지 서쪽 능선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한양의 친군 장위영(壯衛營) 소속 정예병과 경기 지역의 포수 등 1,500명에 달하는 병력입니다. 그들은 독일제 크루프 야포와 신식 레밍턴 소총을 마차에 싣고 다가오고 있습니다. 장마철의 진흙더미로 인해 포병대의 보급 마차가 전선 후방에 묶여 지체되고 있으나, 비가 그치고 노면이 마르는 즉시 그들의 화구는 전자기 신호로 가득한 당신의 기지를 정조준할 것입니다.

기지의 외곽 열화상 센서가 젖은 군복을 입은 토벌군의 척후들을 포착합니다. 그들이 기지 경계선 주변에 차단 목책을 세우며 압박해 들어오는 순간, 백기를 든 한 명의 군관이 홀로 정문 앞으로 걸어옵니다. 그의 양손에는 한양의 고관들이 보낸 붉은 칠함과 서신이 들려 있습니다. 거대한 강철 장벽 너머로 침묵하는 기지를 향해, 군관이 목청을 높여 상소와 어명이 담긴 서신이 당도했음을 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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