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신형은 허공을 가르는 한 자루 부러진 검과 같았다. 낙양(洛陽)의 가장 깊고 음험한 아가리, 망향곡(望鄕谷)의 굳게 닫힌 안개 속으로 육신이 처박히는 찰나에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가슴팍을 관통한 위선(僞善)의 상흔이 온몸의 피를 싸늘하게 식혀놓은 까닭이었다.
쿵, 하고 수백 년간 쌓인 유골과 썩은 오물 더미 위로 몸이 부딪쳤다. 악취가 코를 찌르기도 전에, 끊어진 기경팔맥(奇經八脈)에서 역류한 탁혈이 목구멍을 타고 울컥 쏟아졌다. 사지는 제멋대로 꺾여 진흙 바닥을 뒹굴었고, 찢어진 장포 사이로 드러난 살가죽은 이미 시퍼런 독창(毒瘡)으로 뒤덮여 있었다.
낙양 위가의 가주이자 친부였던 위헌. 그의 인자한 미소 뒤에 숨겨진 서슬 퍼런 칼날이 위백의 척추를 뚫고 영맥(靈脈)을 통째로 뜯어내던 순간이 눈앞에 일렁였다.
‘백 아, 가문의 대업을 위해 네 영맥을 바치거라. 너의 희생은 숭고한 정파의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그 가식적인 음성이 귓전을 때릴 때마다 이가 갈려 잇몸에서 검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무림의 신의와 도리를 부르짖던 무림맹(武林盟)의 장로들은 그 추악한 도행을 묵도하면서도 침묵으로 동조했다. 대의를 위해서라는 해묵은 핑계는 언제나 약자의 비명보다 무거웠고, 권력의 단맛은 그들의 눈을 멀게 하기에 충분했다.
진흙과 오물이 뒤섞인 구덩이 속에서 위백은 손가락 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사위는 오직 죽은 자들의 썩어가는 냄새와 밤바람의 음산한 곡소리로 가득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으나, 돌아오는 것은 짙은 장막 같은 먹구름뿐이었다. 정의를 자처하는 명문정파의 위선 아래에서, 힘없는 자는 이토록 비참하게 버려져 썩어갈 뿐인 것인가.
탁한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에 박힌 독창이 검푸른 연기를 피워 올렸다. 위헌이 남겨놓은 음독(陰毒)이 뼈마디를 녹여내고 있었다. 원한은 뼛속까지 사무쳤으나, 육신은 이미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대지에 서린 음기(陰氣)가 사지가 뒤틀린 위백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왔다.
그때였다.
스스스스.
썩은 해골더미 사이로 푸르스름한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밤안개가 아니었다. 억울하게 참살당하고, 가문에서 버림받아 이곳 망향곡에 거름처럼 뿌려진 자들의 피맺힌 원혼(冤魂)들이었다. 수백, 수천의 원혼들이 허공을 맴돌며 구천을 떠도는 비명소리를 내질렀다. 그 음산한 영적 파동이 위백의 부서진 뇌리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그 원혼들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유독 작고 초라한 형체 하나가 위백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허름한 무복을 입은 청년의 모습을 한 혼백이었다. 그의 가슴에는 예리한 검날에 뚫린 구멍이 선명했고, 눈에서는 붉은 피눈물이 그치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청년의 혼백은 주위를 둘러보며 쥐 한 마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사시나무 떨듯 어깨를 움츠렸다. 죽어서 귀신이 되었음에도 본성의 나약함을 버리지 못한 가련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 유약한 존재가 위백의 꺾인 손을 바라보는 순간, 그의 눈동자에 서린 슬픔과 원망은 해일처럼 일렁였다.
“……억울하옵니다. 소인은 그저 동생과 함께 평범하게 살아가려 했을 뿐이거늘.”
청년의 목소리가 뇌해(腦海)를 직접 타격했다. 사자(死者)의 목소리였다. 위백은 조소 섞인 신음을 삼키며 속으로 읊조렸다.
‘억울하지 않은 죽음이 이 구덩이에 어디 있겠느냐. 나 역시 가문이라는 허울 좋은 껍데기에 속아 뼈가 갈린 몸이다. 저리 가거라. 산 자의 숨결을 탐하지 말고.’
하지만 청년의 혼백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피눈물이 흐르는 얼굴을 위백의 지척까지 들이밀며 울부짖었다.
“소인의 이름은 소철(蘇哲)이라 합니다! 낙양 위씨의 방계 무인 놈들이 소인에게 도둑이라는 누명을 씌워 참살하고, 홀로 남은 여동생 소민을 가문의 기루인 뇌향루(雷香樓)에 기녀로 팔아넘겼나이다! 오늘 밤…… 오늘 밤이 지나면 제 누이는 영영 더러운 자들의 노리개가 될 것입니다! 제발, 제발 제 원한을 갚아주소서!”
소철의 절규가 위백의 가슴에 닿는 순간, 단전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기이한 기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설로만 구전되던 천하제일의 기연, 구양신공(九陽神功)의 파동이었다. 구양신공은 영약이나 범상한 가부좌 수련으로는 결코 깨어나지 않는 무공이었다. 오직 피를 흘리며 죽어간 자들의 원한과 마주하고, 그들의 사자 계약(死者契約)을 수락할 때만 기경인과(奇經因果)의 법리에 따라 그 신비로운 극양진기(極陽之氣)가 해금되는 기이한 힘이었다.
그러나 공짜는 없었다. 타인의 한을 대속하는 대가는 가혹하리만큼 무거웠다. 계약을 맺는 즉시, 그 사자가 겪었던 죽음의 고통과 심마(心魔)를 자신의 뇌리로 고스란히 분담해야만 했다. 또한 약속된 기한 내에 원한을 청산하지 못하면, 구양의 극양지독(極陽之독)이 심장과 영혼을 태워 시한부의 죽음에 이르게 하리라.
위백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기괴한 미소를 그려냈다.
‘인간의 법도라는 것은 이토록 비겁하고, 인과라는 것은 이토록 잔인하구나. 남의 원한을 짊어져야만 비로소 힘을 얻는 무공이라니.’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위백의 눈동자에는 파멸적인 양강(陽剛)의 아집이 번뜩였다. 가문을 멸하고 위선자들을 청산할 수만 있다면, 설령 스스로를 불사르는 지옥의 불꽃이라 해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소철이라 하였느냐.”
위백의 목소리가 갈라진 틈새로 흘러나왔다.
“그 비겁한 위씨 놈들의 목을 베어 네 원한을 제단에 바쳐주마. 내 기꺼이 네 고해(苦海)를 짊어지겠으니, 네 영혼을 내 단전에 바쳐라.”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소철의 혼백이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위백의 가슴팍으로 사정없이 빨려 들어갔다.
콰아아아앙!
순간, 위백의 뇌리가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극심한 충격이 덮쳐왔다.
검날이 심장을 관통할 때의 소름 끼치는 감촉, 차가운 대지 위에서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서서히 식어갔던 소철의 마지막 절망, 그리고 여동생 소민이 울부짖으며 위씨 가문의 무인들에게 끌려가던 참혹한 광경이 위백의 의식 속으로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으아아아악!”
위백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영혼을 사정없이 찢어발기는 고통이었다. 타인의 심마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대가는 육신의 뼈마디를 하나하나 부수는 것보다 더한 고문이었다. 이마에서 식은땀과 피가 뒤섞여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극심한 고통의 심연 속에서, 마침내 위백의 단전이 우렁차게 오열하기 시작했다.
구구구구구!
끊어졌던 영맥의 파편들이 붉은 실처럼 타오르며 서로를 단단히 옭아맸다. 망향곡의 음산한 한기(寒氣)를 단숨에 몰아내는 거대한 열기가 위백의 단전에서부터 화산처럼 폭발했다.
하늘에는 한 점의 태양도 없었으나, 위백의 몸 안에서는 아홉 개의 태양이 대지를 비추듯 찬란한 극양진기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것은 기경인과의 구양신공 제1단계의 해금이었다.
파지직! 파지직!
위백의 살가죽을 뒤덮고 있던 검푸른 독창들이 붉은 열기에 닿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위헌이 주입했던 음독의 찌꺼기들이 기화되어 검은 연기로 화해 허공으로 흩어졌다.
“크하하핫!”
위백은 기괴한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꺾여 있던 사지의 뼈들이 스스로 맞춰지며 둔탁한 골격음(骨擊音)을 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극양의 열기는 주변 십 장 내의 모든 오물과 썩은 시체더미를 일순간에 재로 만들어버렸다. 축축하고 음습하던 망향곡의 흙바닥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오르며 가뭄을 만난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졌다.
한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존재할 수 없는 법. 가문이 심어놓은 비열한 독 따위는 천하에서 가장 순수하고 맹렬한 구양의 진기 앞에서 단 한 줌의 먼지조차 되지 못하고 증발해 버렸다. 속이 다 시원할 정도의 쾌감이 위백의 전신을 관통했다.
하지만 승리감에 도취할 시간은 없었다.
지독한 열기 속에서, 위백의 가슴팍에 검붉은 양염(陽焰) 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계약의 징표이자, 시한부의 낙인이었다. 동시에 위백의 등 뒤로 거대한 환영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소철의 기억이 구현해 낸 잔상이었다.
화려한 홍등(紅燈)이 밝혀진 뇌향루의 어두운 밀실. 그곳에서 겁에 질려 파르르 떨고 있는 어린 소녀, 소민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를 둘러싼 위씨 가문의 방계 무인들이 음탕한 웃음을 흘리며 서서히 다가서고 있었다. 그들의 손이 그녀의 옷자락에 닿으려 하는 찰나의 환영이 위백의 눈동자에 붉게 반사되었다.
시간이 없었다. 오늘 밤, 저 가련한 생명이 짓밟히는 순간 구양의 독성은 위백의 심장을 불태워 그를 죽음으로 이끌 것이며, 그의 복수 또한 시작되기도 전에 종말을 고하리라.
“기다려라, 위선자들아.”
위백의 눈동자가 극양의 안광으로 번뜩였다.
그는 몸을 돌려 망향곡의 가파른 절벽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붉은 화염의 궤적을 그리며, 그는 귀신들의 안식처를 단숨에 박차고 나갔다. 지옥의 심연에서 살아 돌아온 인과의 화신이 낙양을 향해 폭풍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생(生)의 기로에서 사(死)의 문턱을 넘어섰으니, 단전에 깃든 것은 천지를 사를 극양(極陽)의 화염이요, 핏줄에 흐르는 것은 만고의 원한을 씻어낼 인과(因果)의 법뢰(法雷)였다.
절벽을 타고 오르는 위백의 신형은 흡사 대지를 뚫고 솟구치는 대붕(大鵬)의 그것과 같았다. 구양의 진기가 기맥을 관통할 때마다, 황량한 대지에 동풍(東風)이 불어와 굳어 붙은 얼음벽을 사정없이 분쇄하듯 둔탁한 파열음이 골막을 흔들었다. 수백 장 높이의 절벽이 발아래로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허나 육신의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소철이 품었던 깊은 원한과 억울함이 골수를 찌를 때마다, 위백은 붉은 진혈(眞血)을 입가로 흘려보내야 했다. 타인의 고해를 대속한다는 것은 제 살과 뼈를 깎아 불쏘시개로 삼는 일과 다름없었다.
스스스.
망향곡의 입구, 짙은 안개 너머로 날카로운 경기(勁氣)가 스쳤다.
“누구냐!”
사방을 경계하던 흑의무사 둘이 급히 도검을 뽑아 들었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낙양 위가를 상징하는 청색의 검인(劍印)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위헌이 혹여나 살아 돌아올지 모를 망령을 감시하기 위해 골짜기 어귀에 배치해 둔 사냥개들이었다.
무사들의 눈이 위백의 얼굴에 닿는 순간, 그들의 안광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위…… 위백 소가주? 네놈이 어찌 살아 있는 것이냐!”
“기맥이 완전히 진무(塵舞)되어 시체가 되었을 놈이 어찌……!”
경악으로 물든 그들의 목소리에 위백은 대답 대신 기괴한 조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소철의 원혼이 그들의 얼굴을 알아보았음인지, 단전 속의 진기가 광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너희가 짖어대는 가식 어린 비명조차 이제는 역겹구나.”
위백이 한 걸음을 내딛자, 그의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붉은 열풍이 사방의 잡초를 순식간에 조분초개(朝焚草芥)로 만들며 번져나갔다.
“죽어간 이의 피눈물이 아직 마르지 않았거늘, 네놈들은 정파의 허울을 쓰고 태연히 숨을 쉬고 있구나. 내 오늘 천도를 대신하여 너희의 가식 어린 목숨을 거두어가리라.”
“이, 미친놈이!”
위가의 무사들이 검을 휘두르며 쇄도했다. 검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청색의 검기가 허공을 가르며 위백의 뇌도를 노려왔다. 법도와 규격을 갖춘 명문가의 검식이었으나, 위백의 눈에는 그저 가소로운 몸짓에 불과했다.
위백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더 전진하며 오른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단순한 내력이 아니었다. 아홉 개의 태양이 품은 극양의 진기가 한데 뭉쳐진, 가공할 만한 화염의 폭풍이었다.
쿠아아아앙!
“커아악!”
검기는 닿기도 전에 증발했고, 무사들의 신형은 붉은 열풍에 휩싸여 비명을 질렀다. 살가죽이 타들어 가고 뼈가 녹아내리는 참혹한 광경 속에서, 위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한 놈의 덜미를 움켜쥐었다.
손아귀를 타고 전해지는 가공할 열기에 무사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애원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소인들은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살려달라?”
위백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소철이 죽어갈 때, 그의 여동생이 울부짖을 때, 너희는 그 가녀린 목소리를 들었으면서도 비웃지 않았더냐. 은원은 갚아야 하고, 인과는 돌고 도는 법이다. 말하라. 소철의 누이, 소민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목이 조여오는 극통 속에서 무사는 피를 토하며 간신히 대답을 뱉어냈다.
“뇌…… 뇌향루 지하 밀실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오늘 밤, 위덕(魏德) 어르신께서 직접 그 계집의 정조를 꺾고…… 기녀로 정식 등록하려 하십니다…… 제발 목숨만은……!”
콰직.
위백의 손가락에 힘이 실리자, 무사의 목뼈가 허무하게 부러졌다. 쓸모를 다한 고깃덩어리가 흙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위백의 가슴팍에 새겨진 검은 양염 무늬가 미친 듯이 요동치며 심장을 옥죄어왔다. 뜨거운 불길이 폐부를 찌르는 듯한 극통이 전신을 엄습했다. 구양지독의 경고였다. 약속된 시한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소민의 정조가 더렵혀지는 순간 계약은 파기되고 자신 또한 심장이 타들어 가 죽게 될 것임을 육체가 직관적으로 경고하고 있었다.
단전 속에서 소철의 혼백이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는 환청이 이명을 울렸다.
‘동생을…… 제발 제 동생을 구해 주소서……!’
위백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붉게 충혈된 눈으로 먼 낙양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멀리, 화려한 불빛에 가려진 뇌향루의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쥐새끼들아.”
위백의 신형이 대지를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붉은 화염의 궤적이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며 낙양의 중심부를 향해 무섭게 뻗어 나갔다.
가문이 버린 사자가 마침내 그들의 위선을 징벌하기 위해 돌아가는 길, 밤바람은 피비린내를 머금은 채 세차게 울부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