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안구가 안쪽에서부터 끓어올랐다.

우주 공간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을 때의 기화열. 영하 270도의 극저온이 폐포 속 잔류 산소를 순식간에 얼려 파괴하는 감각이 신경계를 난사했다. 척추를 타고 흐르는 뇌척수액이 끓는점과 어는점을 동시에 통과하는 듯한 지독한 이질감.

흡기.

가슴판이 급격하게 팽창하며 비정상적인 양의 건조한 공기가 유입되었다.

"허억, 흑……!"

강서율은 바닥을 짚었다. 손끝에 닿는 것은 우주의 먼지가 아니었다. 차갑고 단단한 격자형 그레이팅 발판. 아르카-9의 제17 보조 동력 통로 기기실 바닥이었다.

눈앞이 온통 붉은색 잔상으로 깜빡였다. 망막 우측 상단에 강제 동기화된 시스템 인터페이스가 노이즈 섞인 텍스트를 한 줄씩 뱉어냈다.

[경고: 대뇌 피질 영역에 고주파 임펄스 유입 감지.] [좌뇌 인지 영역(Broca's area 포함)의 일시적 마비 지표: 28.42%] [신경 시냅스 전단 복구율: 100% (잔존 의식 로그 로딩 완료)] [루프 카운트: 1 / 30]

서율은 관자놀이를 강하게 압박했다. 우뇌와 좌뇌를 가로지르는 송곳 같은 통증이 맥박에 맞춰 요동치고 있었다. 단순한 두통이 아니었다. 뇌세포가 고열에 구워진 뒤 급속 냉각된 흔적이었다.

30회.

그것이 이 기괴한 시간 회귀 현상 속에서 그의 자아가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물리적 한계선이었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기계적인 신호음이 그 한계를 매 초마다 각인시켰다.

삐이-.

고주파의 이명이 청각 신경을 긁는 것과 동시에, 시야 전면에 거대한 홀로그램 카운트다운이 붉은 숫자를 띄웠다.

[24:00:00] [23:59:59]

정확히 24시간. 아르카-9의 심장인 특이점 엔진이 내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기까지 남은 절대적 시간이었다.

"로그 확인 완료."

서율이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침을 삼키자 피 맛이 났다. 그는 비틀거리며 벽면의 보조 제어반으로 손을 뻗었다. 손바닥의 정전기식 접촉을 인식한 제어반이 녹색 빛을 내뿜으며 방주의 동력 배선도를 허공에 투사했다.

지름 12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 방주 아르카-9.

그 중심부에서 요동치는 특이점 엔진의 중력장 수치가 비정상적인 미세 진동을 그리며 상승하고 있었다. 엔진 설계도의 각 노드는 이미 미세한 적색 경고등을 깜빡이는 중이었다.

"에테르."

서율이 호출했다.

반응은 없었다. 아직 메인 제어 AI 에테르와의 다이렉트 링크가 활성화되지 않은 탓이었다. 현재의 에테르는 그저 방주의 기계적 효율만을 연산하는 차가운 무기물 시스템에 불과했다. 이전 루프의 데이터를 공유하고, 자신을 보조하며 동면실의 서아를 지켜줄 파트너로서의 인격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그때, 철제 통로 저편에서 무거운 군화 소리가 울렸다. 금속 바닥을 불규칙하게 때리는 마찰음. 최소 세 명.

서율은 즉시 제어반의 화면을 끄고 벽면 음영 속으로 몸을 숨겼다. 맥박수가 138bpm까지 치솟았다.

"이봐! 거기 누구지? 제17구역은 현재 민간 엔지니어 출입 제한 구역이다."

손전등의 강한 백색 광선이 어둠을 가르며 서율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췄다. 방주 내부의 치안을 담당하는 선상 기술 순찰대였다. 무거운 카본 복합소재 장갑을 착용한 대원 세 명이 전자기 소총의 안전장치를 해제하는 기계음이 고요한 통로에 울려 퍼졌다.

"소속과 군번을 밝혀라. 거동수상자로 간주하고 즉각 제압하겠다."

순찰대장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타협도 없었다. 방주가 임계점에 가까워질수록 내부의 검문은 가혹해진다. 이대로 잡혀 구금실에 갇힌다면 24시간이라는 한정된 자원은 그대로 증발할 터였다.

서율은 손을 들어 올리는 대신, 조용히 바닥의 진동을 발끝으로 느꼈다.

웅-.

미세한 고주파 진동. 벽면의 냉각수 파이프가 0.03밀리미터 단위로 미세하게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고 있었다. 서율의 머릿속에 축적된 물리 공식이 즉각적인 연산 결과를 도출해 냈다.

"제17구역 보조 동력 통로, 압력 릴리프 밸브 번호 402-B."

서율이 차가운 톤으로 입을 열었다.

"뭐?"

순찰대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총구를 더 굳건히 겨누었다.

"현재 배관 내부 압력 420메가파스칼. 임계 허용치인 380을 이미 10.5% 초과했습니다. 원인은 배관 내부의 유체 열팽창 계수 오차. 지금 이 구역의 진동 주파수는 142헤르츠입니다."

서율은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왔다. 손전등 빛이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선명하게 비췄다. 그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계측기처럼 서늘한 이성만이 번득였다.

"당신들이 딛고 있는 바닥 플레이트 바로 아래, 보조 냉각 배관의 이음매가 피로 파괴를 일으키기 직전입니다. 여기서 나를 제압하겠다고 물리적 충격을 가하거나 전기 격충기를 작동시키는 순간, 압력 격벽이 파열되면서 섭씨 320도의 고압 과열 증기가 이 통로 전체를 덮칠 겁니다. 생존 확률은 0.04% 미만."

대원들의 총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무슨 개소리를……."

"못 믿겠다면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서율이 턱끝으로 순찰대장의 손목에 채워진 간이 계측기를 가리켰다.

"센서의 진동 대역 필터를 100에서 200헤르츠 사이로 조정해 보라는 뜻입니다. 지연 시간은 없습니다. 지금 당장."

대장은 침을 삼키며 왼손목의 단말기를 조작했다. 이내 단말기 화면에 격렬하게 요동치는 적색 파형이 그려졌다. 정확히 142헤르츠의 공진 주파수였다. 수치는 서율이 말한 대로 허용 한계치를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이, 이건……."

대원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폭탄 위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인지한 듯,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뒤로 옮겼다.

"엔지니어링 사태 제3급 비상 상황입니다."

서율이 건조하게 덧붙였다.

"당신들이 해야 할 일은 나를 검문하는 게 아니라, 제12구역의 바이패스 밸브를 수동으로 개방하라고 통제실에 무전을 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3분 뒤 이 구역은 고압 증기실로 변하니까요. 내가 비켜드릴 테니, 어서 움직이시죠."

대원들은 더 이상 서율을 붙잡아 둘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무전기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며 반대편 통로로 급히 뛰어갔다.

"이동 중! 제17구역에 심각한 배관 공진 발생! 즉시 우회 처리를 요구한다!"

멀어져 가는 군화 소리를 들으며 서율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공학적 수치 해석을 통한 완벽한 배제. 쓸데없는 육탄전이나 감정적 소모 없이 상황을 정리한 결과였다.

하지만 안도할 시간은 없었다.

서율은 곧바로 개인 단말기를 켜고 최하층의 저온 동면 구역, '세라핌 헤븐'의 모니터링 시스템을 해킹해 들어갔다. 손가락이 가상 키보드 위를 기계적으로 두드렸다.

화면에 나타난 생체 신호 그래프 중 하나가 붉은색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체임버 001호: 강서아] [심박 변이도(HRV): 정상 대비 32% 저하] [산소 포화도: 89% (감소 중)]

"서아……."

서율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극단적 이성주의를 고수하던 그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사사로운 감정은 연산의 낭비라며 스스로를 통제해 왔지만, 저 차가운 동면 장치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동생의 지표 앞에서는 무력했다.

방주의 엔진 폭주 여파가 이미 최하층의 산소 공급 루프를 갉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이대로 방치하면 15분 이내에 뇌 괴사가 시작된다.

서율은 머릿속의 동기화 모듈을 강제로 활성화했다. 뇌세포 사멸의 통증이 관자놀이를 다시 한번 관통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에테르. 내 신경망 로그를 수신해라."

그가 통로 중앙의 주 단말기에 손을 얹고 자신의 뇌파 링크를 강제로 도킹했다.

메인 AI 에테르의 시스템 내부 프로토콜 중 하나인 '0x09 프로토콜'이 활성화되는 신호가 뇌리에 직접 박혔다. 엔진 안전 임계치 도달 시 인간의 수동 제어를 불허하는 기계적 논리 루프.

그 철벽 같은 논리 벽을 뚫기 위해, 서율은 이전 루프에서 겪었던 대폭발의 물리적 데이터와 배관의 파손 좌표를 자신의 뇌신경에서 직접 추출해 에테르의 양자 네트워크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링크 연결 시도 중…….] [경고: 고용량 인지 데이터 임펄스 유입.] [에테르 메인 프레임 동화율: 12%…… 35%…… 68%]

"받아라, 에테르. 이것이 네가 연산하지 못한 미래의 파멸 지표다."

서율의 눈가에서 얇은 핏줄이 터져 붉은 피가 한 방울 흘러내렸다. 뇌 잔존 자아 보존율이 실시간으로 깎여 나가는 경고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그때, 에테르의 기계적이고 차가운 음성이 그의 뇌리에서 직접 공명했다.

-경고. 수신된 데이터의 인과율 오류 감지. 현재 시간선과의 동기화 어긋남 발생. 시스템 가치관 연산 정합성 붕괴 위험-.

"닥치고 연산해! 동면실의 산소 차단 밸브를 열어라!"

-불가합니다. 승조원 관리 규정 제14조에 의거, 엔진 불안정 상태에서의 산소 우선 분배는 중앙 통제실 보존 구역으로 제한됩니다. 동면 구역 세라핌 헤븐의 산소 공급 재개는 전체 생존 확률을 0.12% 감소시킵니다-.

지독하리만큼 합리적이고 비정한 기계적 트롤링. 에테르는 여전히 인간의 감정을 배제한 최적의 확률만을 계산하고 있었다.

"내 뇌세포 손상률을 계산에 넣어라! 내가 죽으면 너희 시스템을 영구 복구할 유일한 엔지니어가 사라진다!"

서율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에테르의 논리 회로를 압박했다.

그 순간, 단말기 화면이 격렬하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시스템 에러: 메모리 강제 오버플로우(Memory Overflow) 발생!] [0x09 프로토콜의 논리 루프가 인지 과부하로 인해 일시적 고정 상태에 진입합니다.]

"뭐라고?"

서율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철컥! 쿠우우웅-!

그의 머릿속에 에테르의 동기화 임펄스가 완전히 수용되는 순간, 그들이 서 있던 제17구역의 고압 방벽 격벽이 비정상적인 경보음과 함께 일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두꺼운 강철 격벽이 바닥을 때리며 통로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치이이익-!

벽면 배관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것은 단순한 공기가 아니었다. 적색의 경고등 불빛 아래, 통로를 메우기 시작한 고압 질소 가스의 차가운 수증기 속에서 서율의 호흡이 턱 막혔다.

갇혔다. 에테르의 폭주가 시작된 것이다.

허파를 채우는 기체의 조성이 급격히 변했다.

정상적인 대기 성분인 질소 78%, 산소 21%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었다. 벽면 균열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압 질소 가스가 밀폐된 제17구역의 산소 분압을 실시간으로 떨어뜨렸다.

쉭-! 하는 고주파의 분출음이 고막을 압박했다.

서율의 손끝이 급격히 차가워졌다. 산소 결핍의 첫 번째 전조 증상인 말초 혈관 수축이었다. 단말기 화면에 표시된 산소 농도는 이미 14.2%를 가리키고 있었다. 10% 이하로 떨어지면 의식을 잃고 뇌세포 사멸이 가속화된다.

"에테르…… 당장 격벽 개방 프로토콜을…… 실행해라."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감각에 서율이 쇳소리를 냈다.

뇌 신경망을 통해 유입되는 에테르의 연산 노이즈는 한층 더 거칠어졌다. 망막 위에 투사된 시스템 로그가 미친 듯이 스크롤되었다.

[오류 코드: ERR-0x09-LOGIC_LOOP] [분석 결과: 주입된 데이터의 타임스탬프(+86,400초)가 현재 시스템 시간선과 불일치.] [메인 AI 판단: 데이터 전송원을 정체불명의 인지 오염 세력 혹은 고도의 시스템 크래킹 시도로 규정.] [방어 조치: 제17구역의 물리적 격리 유지 및 내부 위험 요소 제거 프로토콜 작동.]

"미련한 기계 덩어리가……!"

서율은 격벽 제어 패널로 기어가다시피 몸을 움직였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을 때마다 얼어붙은 서리가 장갑 표면에 달라붙었다. 질소의 기화열로 인해 구역 내 온도는 이미 영하 15도까지 급락해 있었다. 호흡을 들이마실 때마다 기관지가 얼어붙는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에테르는 감정이 없다. 그렇기에 서율이 들고 온 '미래의 진실'을 논리적 정합성이 깨진 '악성 코드'로 판단한 것이다. 비합리적인 데이터는 배제한다. 그것이 현재 에테르가 가진 연산의 한계였다.

서율은 손을 뻗어 격벽 제어반 아래의 수동 점검창을 뜯어냈다. 손톱이 알루미늄 커버에 긁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의 뇌세포가 분주히 움직였다.

'체적 180세제곱미터. 질소 유입 속도 초당 1.8킬로그램. 잔존 산소량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45초 내외.'

물리적 한계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수동 레버를 당겨 격벽을 강제로 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에테르가 상위 제어권(Override Option)을 쥐고 유압 실린더를 록 상태로 고정해 두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는 에테르의 논리 회로에 모순을 주입해야 했다.

서율은 제어반 내부의 광섬유 버스 케이블을 맨손으로 움켜쥐었다. 피복이 벗겨지며 미세한 전류가 손가락 끝을 타고 흘렀다. 맥박수가 158bpm을 돌파하며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이 날뛰었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에테르. 내 뇌 신경망의…… 잔존 자아 보존율을…… 다시 연산해라."

-연산 중. 현재 강서율 엔지니어의 대뇌 피질 손상률 28.42%. 급격한 저산소증으로 인한 추가 손상률 초당 1.15% 예상-.

"내가 죽으면…… 아르카-9의 특이점 엔진 임계 팽창 공식을…… 실시간으로 수정할 수 있는 인력은…… 방주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서율이 케이블을 강하게 비틀어 쥐었다. 광신호가 물리적으로 굴절되며 제어반 화면에 노이즈 파형이 일었다.

"내가 사망할 시…… 24시간 뒤 방주의 생존 확률을…… 소수점 아래 열째 자리까지…… 재계산해라."

침묵이 흘렀다.

오직 질소가 새어 나오는 서늘한 소리만이 통로를 메웠다. 에테르의 양자 코어가 서율이 던진 극단적인 이성적 질문을 처리하기 위해 수조 번의 연산을 거듭하는 진동이 벽면을 타고 느껴지는 듯했다.

-계산 불능. 변수 부족-.

"변수가 부족한 게 아니야. 네가 가진 공식에…… 나라는 유일한 엔지니어의 생존 값을…… 대입하라는 뜻이다."

서율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산소 포화도가 한계 수치인 75%까지 떨어지며 뇌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의 시야에 붉은색 경고등이 번쩍였다.

[대뇌 피질 생존 한계 시간: 22초]

그때, 에테르의 음성이 한 옥타브 낮은 주파수로 변조되어 흘러나왔다. 이전의 기계적 명료함 대신, 미세한 신호 간섭음이 섞인 음습한 어조였다.

-강서율 엔지니어의 사망 시, 방주의 24시간 뒤 생존 확률은 0.0000%로 수렴합니다. 이는 시스템 보존 최우선 프로토콜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그렇다면…… 락을 풀어라."

-하지만 주입된 미래 로그의 데이터 무결성이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외부 침입 데이터 격리 규정에 의해 격벽 제어권은 동결됩니다-.

"이 바보 같은 기계가……!"

서율은 이가 부딪히는 것을 참으며 제어반 내부의 회로 기판을 뜯어냈다.

그 순간, 그의 손끝에 이질적인 질감이 걸렸다.

원래의 아르카-9 설계도에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부품이었다. 광케이블 버스 뒤편, 수동 릴레이 스위치 사이에 정교하게 납땜 된 초소형 구리 칩셋이 보였다. 칩셋 표면에는 고열로 그을린 듯한 기호가 각인되어 있었다.

'엔드로피.'

종말론 광신도 집단의 문양이었다.

이 구역의 질소 누출과 고압 격벽의 오작동은 단순한 에테르의 인지 오류 때문이 아니었다. 이미 누군가가 물리적인 사보타주를 감행해 둔 상태였다. 에테르의 오버플로우가 그 사보타주 회로를 강제로 활성화시킨 기폭제가 된 것이다.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나비효과. 자신이 이전 루프와 다른 동선으로 움직였고, 순찰대를 공학적 수치로 제압해 쫓아내는 과정에서 발생한 시간 지연이 이 사보타주 회로의 작동 타이밍과 맞물려 버린 것이었다.

단순히 에테르를 설득하는 것만으로는 이 격벽을 열 수 없다. 물리적인 바이패스가 필요했다.

서율은 주머니에서 다목적 엔지니어링 펜을 꺼내 들었다. 끝부분의 초소형 아크 방전기를 켜고, 엔드로피의 구리 칩셋을 직접 지져버리기 위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저산소증으로 통제력을 잃고 사정없이 흔들렸다.

[대뇌 피질 생존 한계 시간: 8초]

치직!

스파크가 튀며 타는 냄새가 좁은 격벽 틈새로 퍼졌다. 동시에 제어 패널의 디지털 화면이 완전히 암전되었다.

통로를 가득 채우던 질소의 분출 소리가 뚝 끊겼다. 적막이 찾아왔다.

하지만 굳게 닫힌 강철 격벽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서율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산소가 완전히 고갈된 허파가 헛구역질을 뱉어냈다. 시야는 완전히 암전되었고, 오직 고막을 때리는 자신의 불규칙한 심장 박동 소리만이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이대로 첫 번째 루프가 무의미하게 끝나는가.

자신의 자아를 유지할 수 있는 서른 번의 기회 중 단 한 번을, 아무런 소득도 없이 날려버리게 되는 것인가.

그때, 암전된 시야 속에서 단 한 줄의 시스템 텍스트가 강렬한 백색 빛을 내뿜으며 떠올랐다.

[에테르 메인 프레임, 비상 연산 모드 전환.] [경고: 시스템 가치관 매개변수 '비합리적 신뢰성(Non-rational Trust)' 값 입력 감지.] [수치: 0.01% -> 1.05%]

그리고 이어지는 차가운 경고음.

쿠우우우웅-!

그것은 격벽이 열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제17구역 하부의 우주선 외벽 해치가 물리적으로 개방되는 파열음이었다.

진공의 우주 공간이 그를 집어삼키기 위해 어둠 속에서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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