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차가움은 목덜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척추를 타고 흘러내린 냉기가 꼬리뼈에 닿았을 때야 비로소 감각의 회로가 하나씩 연결되었다. 젖은 모래를 삼킨 것처럼 서걱거리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지독할 정도로 선명한 백색의 광증(狂症)이 시야를 난도질했다.

사방이 거울이었다.

정면도, 후면도, 천장과 바닥조차도 빈틈없이 매끄러운 유리 거울로 마감된 방. 거울과 거울이 서로를 무한히 복제해 내는 비현실적인 공간의 중심에 그가 누워 있었다. 이음새마다 검은 실리콘이 기하학적인 격자무늬를 그리며 굳어 있는 콘크리트 벽면. 그 인공적인 밀실의 한가운데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이름도, 나이도, 이곳에 오기 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던 풍경도 머릿속의 하얀 안개 너머로 소멸해 있었다.

지독한 공백이었다. 뇌의 일부분이 날카로운 메스로 도려내진 것 같은 기괴한 상실감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은 기계적인 감각뿐이었다.

그때, 보이지 않는 벽 너머에서 아주 일상적이고 무의미한 소음이 고막을 두드렸다.

“어머, 302호 환자는 오늘도 미동이 없네.” “약물 들어갑니다. 주사 바늘 들어갈 때 조금 뻐근하실 거예요.” “퇴근하고 마라탕 먹으러 갈래? 마라탕 먹고 탕후루는 내가 살게.”

가볍게 껌을 씹는 소리, 카트의 삐걱거리는 바퀴 음, 그리고 플라스틱 컵이 쟁반 위에서 부딪히는 둔탁한 마찰음.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대화가 거울 방의 균열된 틈새를 타고 들어와 고요를 깨뜨렸다. 그중 한 여자가 손가락 끝으로 스테인리스 카트 상판을 규칙적으로 톡, 톡, 톡 두드렸다. 세 번의 가벼운 타격음.

그 사소한 자극은 거울 방 안에서 거대한 해일로 번역되어 이현의 신경망을 강타했다.

왼팔 정맥에 기괴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살갗을 뚫고 들어간 차가운 플라스틱 튜브가 보였다. 튜브는 거울로 된 바닥을 관통해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심해(深海)로 연결되어 있었다. 투명한 관을 타고 흐르는 무색의 액체가 심장에 닿을 때마다, 이현의 머릿속에서 거울의 방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현실의 정맥 주사기가 가상의 정신 수용소를 묶어 두고 있는 기괴한 닻 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의식이 명료해질수록 심박수가 가파르게 치솟았다. 1분에 120회.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려 거울 바닥에 툭 떨어졌다. 공포가 목구멍까지 차올라 숨을 가로막으려던 찰나, 그의 차갑게 식어 버린 이성이 본능적인 공포의 덜미를 낚아챘다.

‘울부짖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이현은 떨리는 손가락을 바닥에 밀착시켰다. 거울 표면의 온도는 영하에 가까웠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뇌로 들어오는 자극을 정량적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호흡을 4초간 들이마시고, 2초간 멈춘 뒤, 4초간 내뱉는다. 요동치던 장기들이 서서히 제 자리를 찾아갔다. 기억은 지워졌으나, 위기 상황에서 신체를 통제하는 극단적인 초이성주의적 메커니즘은 뼈에 새겨진 각인처럼 즉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인지 상태를 분석하려는 순간, 정면의 거울 벽면에 기이한 변화가 일어났다.

스르륵.

거울 너머의 은박이 안쪽에서부터 녹아내리듯 흘러내리더니, 차가운 활자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포처럼 벽면을 채우기 시작했다. 거울 이면에 붉은 피로 인쇄된 것 같은 글자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고딕체였다.

[ 브레인 필터: 공범자의 생존 수칙 ]

이현의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글자들은 그의 시선이 닿는 속도에 맞춰 스스로를 뇌리에 박아 넣었다.

[ 첫째, 뇌내 탐정 인격의 조언을 절대로 맹신하지 말 것. ] [ 둘째, 추리의 오류는 뇌세포 파괴로 즉시 징벌된다. ] [ 셋째, 자신이 과거 연쇄살인마 '설계자'의 완벽한 알리바이를 조작해 준 '공범자'라는 사실을 외부인에게 들키지 말 것. ]

마지막 세 번째 수칙이 뇌를 관통하는 순간, 이현은 관자놀이가 찢어지는 듯한 극심한 두통을 느꼈다. 공범자. 설계자. 연쇄살인마. 단어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뇌세포를 찔러댔다. 자신이 살인마의 판을 짠 공범일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가설이 무의식의 심연에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이현은 고통 속에서도 눈을 부릅뜬 채 벽면의 문장들을 뇌리에 문신처럼 새겼다. 이것은 경고장이자, 이 기괴한 정신적 감옥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이정표였다.

“꽤나 흥미로운 표정이네. 마치 제 무덤에 적힌 비석을 읽는 장례식 손님 같아.”

공기를 찢는 서늘한 음성이 이현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귀를 타고 흐르는 목소리는 지나치게 단정하고 인위적이었다. 이현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 완벽한 반사체였던 거울 벽면 중 하나가 물안개처럼 흐려지더니, 그 너머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먼지 한 톨 앉지 않은 감청색 수트를 입고, 금속 테 안경을 쓴 남자. 그의 눈빛은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가웠고, 입꼬리는 자로 잰 듯 정확한 각도로 비틀려 있었다. 남자는 가상 세계의 경계를 아무런 저항 없이 통과해 이현의 눈앞에 멈춰 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이현 씨. 아니, 정확히는 매일 보던 얼굴이지만 공식적인 대면은 처음이군요.”

남자가 가슴 주머니에서 실크 손수건을 꺼내 안경 유리를 닦으며 나직하게 웃었다.

“내 이름은 한로직. 당신의 뇌세포 한구석을 빌려 쓰고 있는, 지극히 ‘논리적인’ 동반자입니다.”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한로직의 구두 끝에서부터 안경 너머의 눈동자까지 섬세하게 읊조리듯 훑어 내렸다. 발걸음의 보폭, 어깨의 기울기, 손수건을 쥐는 손가락의 미세한 긴장도. 모든 행동이 고도로 계산된 연극 배우의 기하학적 동선과 일치했다.

“경계하는 건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한로직이 안경을 다시 고쳐 쓰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에요. 지금 이 순간에도 하이퍼 네스트의 주사액은 당신의 전두엽을 마비시키고 있으니까. 우리가 협력하지 않으면, 당신은 이 거울 방에 영원히 박제된 박제 생물이 될 겁니다.”

“협력?” 이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밀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갈라지고 메마른 음성이었지만, 그 안에는 흔들림 없는 이성의 뼈대가 들어 있었다. “내 뇌 속에 기생하는 인격이 협력을 말하는군. 그것도 내 생존 수칙에 ‘맹신하지 말라’는 경고가 적히자마자.”

한로직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미소라기보다는 안면 근육의 정교한 수축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그 수칙을 만든 것 역시 과거의 당신입니다. 스스로를 믿지 못해 분열을 택한 나약한 천재의 방어 기제죠. 하지만 기억하세요.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인과관계는 언제나 단 하나의 결론만을 향해 수렴하니까요.”

한로직이 거울 벽면을 툭툭 쳤다. 그러자 거울 표면 위로 수많은 숫자와 타임라인이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피해자들의 사진, 사망 추정 시각, 살인 현장의 평면도들이 어지럽게 나열되었다.

“당신이 진범이 아니라는 증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내가 제시하는 논리의 궤적을 따르십시오. 그것만이 이 뇌세포 사멸의 징벌에서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입니다.”

한로직의 눈빛에 언뜻 스쳐 지나간 것은 탐욕이었다. 이현의 육체 주도권을 찬탈해 현실의 빛을 보려는 포식자의 굶주림.

이현은 침묵 속에서 사태를 파악했다. 이 인격은 나를 돕는 구원자가 아니다. 기회를 틈타 내 자아를 집어삼키려는 가장 지능적인 적대자다. 하지만 동시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자가 가진 논리적 분석 데이터가 필요하다.

위험한 외줄 타기.

이현은 입술을 짓씹으며 거울 벽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살아남아야 한다. 기억을 되찾고, 내가 정말로 그 괴물의 공범이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이 주도권을 넘겨줄 수 없다.

그는 공포를 이성으로 완전히 짓누른 채, 한로직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좋아, 한로직. 그 잘난 논리를 어디 한번 펼쳐 봐.”

차가운 동조가 밀실을 가득 채웠다.

그 순간, 이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서 기이한 이질감을 느꼈다.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거울 속의 정이현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거울 속 이현의 눈동자가 좌우로 기괴하게 흔들리더니, 이현 본인의 의지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꼬리가 찢어질 듯 위로 당겨지며, 거울 속의 ‘나’가 진짜 나를 향해 소리 없이 비웃음을 흘렸다.

주도권을 빼앗으려는 뇌 속의 또 다른 포식자가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목덜미를 가칠하게 긁어내린 것은 서늘한 한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오른손이었다.

의지와 무관하게 비틀린 손가락들이 목뼈의 가장 취약한 마디를 찾아가 지그시 압박했다. 기도를 누르는 손끝의 감각은 지독할 정도로 생생했다.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기괴한 자해 행위 속에서, 거울 속의 정이현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그 모습을 관찰하며 기괴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아하하! 너무 점잖게 굴 필요 없다니까, 로직? 이 몸뚱이는 결국 먼저 움직이는 놈이 임자야.”

등 뒤의 어둠 속에서 쇠사슬을 끄는 듯한 거친 탁성이 뿜어져 나왔다.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거울 방의 바닥이 늪처럼 출렁였다. 백행동. 이현의 운동 피질과 미세 근육 분석을 담당하는 난폭한 자아가 현실의 신경망을 강탈하려 들고 있었다.

숨이 막혀왔다. 폐포가 산소를 갈구하며 팽창하다가 이내 쪼그라들었다. 머릿속의 압력이 급격히 상승하며 관자놀이 부근의 미세 혈관들이 터져 나가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다.

한로직은 이 상황이 불쾌하다는 듯 안경테를 손가락 끝으로 밀어 올렸다.

“무식하군, 행동. 주도 인격의 급격한 질식은 전두엽의 산소 공급을 중단시켜 우리 모두의 동반 소멸을 초래할 뿐이다. 뇌세포 사멸률이 일정 수준을 초과하면 내 논리 회로의 연산 속도 역시 저하된다.”

“그럼 네가 먼저 꺼지든가!”

목을 조르는 손아귀에 힘이 더 실렸다. 이현의 시야 가장자리가 흑백의 점묘화처럼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거울 속의 일그러진 얼굴은 이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가고 있었다.

그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현의 이성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자신을 억누르는 이 기괴한 힘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이들은 단순한 환각이 아니다. 내 뇌를 나누어 가진 기생충들이다. 기생충은 숙주가 죽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이현은 왼손을 들어 오른손을 떼어내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오히려 허파에 남아 있는 마지막 공기마저 밖으로 전부 뱉어냈다. 호흡을 완전히 멈추고, 심장의 고동을 스스로 늦추는 극단적인 최면적 이완.

‘죽고 싶다면, 어디 한번 끝까지 당겨 봐라.’

그가 마음속으로 던진 무언의 선언은 거울의 방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동시에, 거울 방 외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외부의 소음이 미세하게 왜곡되어 고막을 통과했다.

“어라, 간호사님. 이 병실 벽시계 건전지 갈아야겠어요. 아까 약물 투여 기록할 때 보니까 3시 3분이었는데, 지금 스마트폰 시계는 딱 3시 정각이네.” “정말이네? 3분이나 빠르잖아. 어쩐지 교대 시간이 왜 이렇게 안 오나 했어.”

아주 일상적이고 쓸데없는 간호사들의 잡담. 3분의 오차.

그 순간, 이현의 뇌리에서 한로직이 띄워놓은 가상 살인 사건의 타임라인 중 한 부분이 예리하게 발광했다. 피해자 사망 추정 시각, 그리고 용의자의 알리바이 사이의 공백. 논리가 제시한 완벽한 톱니바퀴 사이에 미세한 틈새가 존재한다는 감각이 찌릿하게 신경계를 타고 흘렀다.

하지만 그 의문을 구체화하기도 전에, 뇌내 경고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 경고: 주격 자아의 산소 포화도 저하. 뇌세포 사멸 위험 단계 진입. ] [ 현재 사멸 진행률: 0.03%... 0.05%... ]

실제 뇌세포가 영구히 소멸하고 있다는 경고였다. 관자놀이에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손가락으로 훔쳐보지 않아도 그것이 붉은 코피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미친 새끼... 진짜로 죽으려고 작정을 했네!”

백행동의 거친 비명이 울려 퍼지더니, 목을 조르던 오른손의 힘이 서서히 풀렸다. 이현은 바닥으로 쓰러지며 격렬하게 기침을 토해냈다. 허파로 들이쳐 오는 차가운 공기가 유리 파편처럼 식도를 긁어내렸다.

“말했잖아, 행동. 이 인간은 우리보다 더한 괴물이야.”

한로직이 차가운 눈빛으로 바닥에 쓰러진 이현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안경 렌즈 위로 숫자들이 여전히 어지럽게 명멸하고 있었다.

이현은 젖은 이마를 거울 바닥에 댄 채 숨을 고르는 와중에도, 방금 전 외부에서 들려온 '3분의 오차'를 머릿속의 검은 상자에 소중히 수납했다. 한로직이 제시한 완벽한 논리에 함정이 있다. 그리고 그 함정은 나를 파멸시키기 위한 이 인격의 정교한 설계일 터였다.

그때였다.

바닥에 엎드린 이현의 시야에 들어온 거울 표면 아래, 깊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꿈틀거렸다.

바닥 거울의 이면, 검은 심해의 심연에서 수많은 사람의 형상을 한 그림자들이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세 번째 인격의 기괴한 웃음소리가 고막이 아닌 머릿속 뼈 자체를 울리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찾았다, 드디어 냄새를 맡았어. 아주 피비린내 나는 진짜 살의를 말이야!”

윤직관. 본능과 직관의 괴물이 깨어나고 있었다. 이현의 척추를 타고 다시 한번,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파괴적인 충격파가 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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