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의 차가운 습기를 머금은 삭풍이 함경도 영흥(永興)의 야산 골짜기를 사정없이 때려치우던 해 질 무렵이었다. 유배지로 지정된 도평대군 이선의 적거(謫居)는 무너져가는 서까래 사이로 칼바람이 들이치는 황량한 초가삼간에 불과했다. 조정의 삼사(三司)가 역모의 혐의를 씌워 가두고, 훈구 대신들이 밤낮으로 사약을 내리라 주청하는 사지(死地).
그 음산한 방 한가운데서, 이선은 바닥을 구르며 신음하고 있었다.
"아아아악……!"
목구멍을 찢고 나오는 비명이 처절하게 울렸다. 머릿속이 수천 개의 달궈진 바늘로 쑤셔지는 듯한 극통이었다. 평범한 인간의 뇌가 감당할 수 없는 방대한 정보의 해일이 그의 영혼을 덮치고 있었다. 전생에 이룩했던 현대 기계공학의 극의, 수만 장의 청사진, 열역학 선도, 유체역학의 복잡한 수식과 금속 야금학의 결정 구조식들이 15세기 조선의 육체와 강제로 동기화되는 과정이었다.
두개골 내부의 압력이 한계에 달했다. 혈맥이 요동치며 역류하기 시작했다.
"흡, 컥……!"
이선은 가슴을 쥐어짜며 바닥을 짚었다. 허연 창지문 위로 뿜어져 나온 것은 검붉은 선혈이었다. 코와 입에서 투득, 투득 하며 끊임없이 핏방울이 떨어져 멍석을 적셨다. 뇌리각혈(腦裏咯血). 전생의 고차원 지식을 이 보잘것없는 육신에 아로새길 때마다, 목숨을 깎아 먹는 신경 과부하의 대가였다. 시야가 붉게 물들고 숨이 가빠왔으나, 그의 눈동자만큼은 기괴할 정도로 투명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정밀 설계의 혜안'이었다.
피를 닦아낼 겨를도 없이, 이선은 떨리는 손을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단순한 시야가 아니었다. 낡은 방바닥의 틈새, 문고리의 쇠붙이, 흙벽의 미세한 균열들이 분자 단위의 격자망과 응력 분포도로 변환되어 눈앞에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열의 흐름과 물질의 내부 결함이 선명하게 투시되었다.
'살아야 한다.'
이선은 피 묻은 입술을 악물었다. 종묘사직을 보전하고, 장차 서구 열강의 거대한 기계 괴수들이 이 땅을 짓밟기 전에 조선을 자립적인 기계 제국으로 세우는 것.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천명이었으나, 당장 내일 역모의 칼날이 목에 닿을지도 모르는 피해망상에 가까운 완벽주의가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아주 작은 오차도, 단 한 명의 감시자도 용납해서는 안 되었다.
그때, 거친 발소리가 흙마당을 밟으며 다가왔다.
"대군 대감, 기침하셨사옵니까?"
문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낮고 간사했다. 조정에서 파견된 서리이자 사적 감시관인 조태구였다. 그는 겉으로는 대군을 모시는 척했으나, 실상은 민우식을 비롯한 한양의 훈구파들에게 이선의 일거수일투족을 밀고하는 간작(間作)이었다.
서리는 대답이 없자 문고리를 잡고 흔들었다.
"안에서 괴이한 신음과 피비린내가 진동하기에 소인이 들어가 확인하고자 하나이다."
무단으로 종친의 처소를 수색하려는 무례한 거동이었다. 이선은 소매로 입가의 피를 급히 훔치고, 뇌리의 통증을 억누르며 의관을 정제했다. 그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멈추어라."
이선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방 안을 진동시키는 묵직한 위엄이 있었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조태구의 손길이 멈칫했다.
이선은 천천히 문을 열고 마루로 나섰다. 그의 안색은 창백했으나, 대군의 격식과 권위는 추호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조태구는 대군의 서슬 퍼런 기색에 움츠러들면서도, 짐짓 고개를 치켜들며 아뢰었다.
"대감, 유배지의 죄인은 조정의 사찰을 성실히 받아야 하는 법이옵니다. 방 안에 무엇을 숨기셨기에 이리 문을 걸어 잠그고 계십니까?"
이선은 가볍게 콧방귀를 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법리는 준엄하고도 정교했다.
"네 이놈, 조태구야. 네가 일개 서리의 몸으로 『경국대전』의 예전(禮典)과 형전(刑典)을 어찌 이리도 무참히 짓밟는단 말이냐?"
"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내 비록 무고한 참소로 인해 이곳 영흥에 적거하고 있으나, 주상 전하께서는 나의 대군 작첩을 거두지 않으셨고, 종친부의 명부에서도 내 이름을 지우지 않으셨다. 종친부의 법도에 따르면, 대군의 처소를 사찰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의금부의 당상관 이상이나 전하의 어명이 담긴 밀지가 있는 자에게만 한정된다. 일개 종9품 서리에 불과한 네놈이 어찌 어명도 없이 수색을 논하며 하극상을 부린단 말이냐? 이는 조정을 기만하는 참람(僭濫)이요, 왕실을 능멸하는 대역죄에 해당하거늘, 정녕 네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는 모양이구나."
이선의 목소리에는 서릿발 같은 기상이 서려 있었다.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국법의 자구 하나하나를 칼날처럼 들이대는 논리정연함에 조태구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조선 전기, 명분과 법도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대부 사회에서 왕실 종친을 사사로이 핍박했다는 기록이 사관의 붓끝에 남는 날에는 그의 삼족이 무사치 못할 터였다.
"대, 대감…… 소인은 그저 대감의 안위가 걱정되어……."
"걱정이라 하였느냐? 그렇다면 내 처소 동쪽의 야철장(冶鐵場)으로 통하는 길목을 비우거라. 내 몸이 쇠약하여 그곳의 화기(火氣)를 빌려 기력을 회복하고자 하니, 네놈이 감히 내 뒤를 밟는다면 즉시 관아에 고하여 사사로운 사찰로 다스릴 것이다."
조태구는 이선의 서슬 퍼런 기세에 압도되어 감히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소, 소인의 결례를 용서하시옵소서."
서리가 흙마당 뒤로 물러나자, 이선은 비로소 숨을 깊게 내쉬었다. 첫 번째 고비를 넘겼으나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는 소매 속에 숨겨둔 정밀 도면을 움켜쥐고, 처소 뒤편의 어두운 오솔길을 따라 영흥의 하급 야철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야철장은 매캐한 유황 연기와 벌겋게 달아오른 숯불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망치질 소리가 고막을 때리는 그곳에서, 야장 최두칠이 땀방울을 흘리며 쇠붙이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천민 대장장이였으나, 북방에서 손꼽히는 완고한 장인이었다.
"어이, 거기 불 더 지펴라! 쇠가 식으면 탄소가 제대로 안 빠져나가서 푸석해진단 말이다!"
최두칠이 조수들을 다그치며 소리쳤다. 그때, 어둠을 뚫고 귀한 비단 도포를 입은 이선이 걸어 들어오자 야철장의 인부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었다.
최두칠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망치를 내려놓고 겉으로만 허리를 굽혔다.
"대군 대감께서 이 누추하고 불꽃이 튀는 야철장에는 어찌 걸음을 하셨습니까? 이곳은 사대부 대감들께서 오실 곳이 못 되옵니다."
말투에는 천민으로서의 비굴함이 섞여 있었으나, 눈빛에는 제 기술에 대한 고집과 은근한 무시가 깔려 있었다. 글이나 읽는 왕족이 제철의 정교함을 어찌 알겠느냐는 무언의 조롱이었다.
이선은 아무 말 없이 가마(노구)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혜안'의 능력을 다시 켰다. 이마가 찌릿하며 관자놀이의 혈관이 요동쳤지만, 노 내부의 상태가 분자 단위로 투시되어 보였다.
가마의 내벽, 진흙과 짚을 섞어 만든 벽면의 안쪽에 미세한 균열이 가 있었다. 그 균열 사이로 외부의 차가운 공기가 불균일하게 유입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철광석이 녹는 온도가 일정치 않아 고탄소강의 탄소가 제대로 제거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선은 실소를 터뜨렸다.
"네 놈이 영흥에서 으뜸가는 야장이라 자부한다 들었거늘, 다루는 가마 꼴을 보니 참으로 한심하구나."
최두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감히 평생 쇠만 만져온 자신의 기술을 모욕당하자 자존심이 상한 것이었다.
"대감! 비록 신분이 미천하나, 소인은 이 영흥에서 이십 년간 쇠를 달구고 두드렸사옵니다. 제 가마에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씀이십니까?"
"이(理)를 모르는 자가 기(氣)만을 다루려 하니 이 모양인 것이다."
이선은 차갑게 소리치며 가마의 동쪽 벽면, 중간 높이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저 지점을 보아라. 겉보기에는 진흙으로 매끄럽게 발라져 있으나, 가마 내부의 온도가 팔백 도에 이를 때마다 저 안쪽의 미세한 수소 결함과 탄소 균열 구조로 인해 틈새가 벌어지고 있다. 그 틈새로 원치 않는 냉기가 스며들어, 네가 다루는 고탄소강의 탄소가 균일하게 정련되지 못하고 취화(脆化) 현상이 일어나 쉽게 부러지는 쓰레기 철이 나오는 것이다."
최두칠은 멍하니 이선을 바라보았다. 수소 결함이니, 탄소 균열이니 하는 생경한 단어들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동쪽 벽면 중간의 균열'과 '철이 쉽게 부러지는 원인' 만큼은 뼈를 찌르는 지적이었다. 실제로 최근 주조한 철물들이 자꾸만 도중에 갈라져 골머리를 앓던 참이었다.
"그, 그럴 리가 없습지요…… 소인이 가마를 얼마나 정성껏 지었는데요……."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당장 저 벽을 깨어 보아라. 만약 내 말이 틀렸다면, 내 네놈에게 대군의 명예를 걸고 황금 열 냥을 내릴 것이나, 내 말이 맞다면 너는 즉시 내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다."
이선의 서슬 퍼런 선언에 최두칠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가마의 열기를 식히고, 정으로 이선이 가리킨 동쪽 벽면을 조심스럽게 파내기 시작했다.
탁! 탁!
진흙 벽이 떨어져 나가고, 가마 내벽의 단단한 흙층이 드러났다. 그리고 마침내 벽면의 깊숙한 안쪽이 드러났을 때, 최두칠은 숨을 들이켰다.
"이, 이것이 어찌……."
이선이 정확히 가리킨 그 지점에, 머리카락보다 얇지만 사방으로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미세한 검은 균열 구조가 선명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 균열 사이로 불순한 그을음과 탄소 가스가 엉겨 붙어 가마의 열 흐름을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두칠의 망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가마 내부를 뜯어보기 전에는 천하의 신선이라도 알 수 없는 비밀이었다. 평생을 쇠와 흙과 함께 살아온 장인으로서, 겉만 보고 가마의 보이지 않는 내부 결함을, 그것도 미세한 탄소의 흐름까지 정확히 짚어낸 대군의 초상적인 지식 앞에 최두칠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대, 대감…… 이것을 어찌…… 어찌 아셨나이까?"
최두칠은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로 이선의 앞에 엎드렸다. 그의 눈빛은 이제 무시가 아닌, 신(神)을 바라보는 듯한 경외와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내 너희에게 온 것은 단순히 기술을 뽐내기 위함이 아니다."
이선은 부복한 최두칠을 내려다보며 엄숙하게 선언했다.
"듣자 하니, 너희 야철장의 장인들이 조정의 가혹한 납공제(納貢制)로 인해 매달 바쳐야 할 세금철을 채우지 못해 관아에 끌려가 가혹한 매질을 당하고, 굶어 죽어간다 들었다. 맞느냐?"
최두칠의 어깨가 들썩였다. 가슴 깊은 곳에 맺힌 한이 건드려진 탓이었다.
"……그렇사옵니다, 대감. 나라에서는 쇠를 가져가면서 단 한 푼의 삯도 주지 않고, 기한을 맞추지 못하면 장형을 치르니, 저희 같은 천민 장인들은 뼈를 깎아 쇠를 바쳐도 돌아오는 것은 굶주림과 매질뿐이옵니다."
"그렇다면 내가 너희의 그 가혹한 납공을 사적으로 모두 대납해 주마."
그 파격적인 선언에 최두칠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예? 대, 대납이라 하심은……?"
"너희가 조정에 바쳐야 할 철납의 수량을 내가 사재를 털어 합법적으로 대납해 주겠다는 뜻이다. 관아의 세금 장부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록될 것이니, 너희는 더 이상 관아의 매질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선은 소매에서 정밀하게 그려진 기계 부품의 청사진을 꺼내 최두칠의 눈앞에 펼쳤다. 그것은 현대의 정밀 기어와 조밀한 공차(公差)가 적용된 특수 실린더의 도면이었다. 15세기의 기술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정교한 설계도였다.
"그 대가로 너는 나의 손과 발이 되어라. 내가 건네는 이 설계도대로 단 0.1밀리의 오차도 없이 물건을 주조해 내라. 이것이 나와 너의 첫 번째 영흥 계약이다."
최두칠은 도면을 바라보았다. 그 복잡하고 아름다운 기하학적 형상과 우주의 이치를 담은 듯한 설계안에 그의 영혼이 완전히 매료되었다. 평생 쓸모없는 농기구나 두드리다 갈 가련한 대장장이의 운명에서 벗어나, 세상을 뒤흔들 고귀한 철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기예의 갈망이 그의 심장을 고동치게 했다.
"대감…… 소인의 미천한 목숨과 기술을 대감께 바치겠나이다! 이 도면의 철기들을 반드시 제 손으로 빚어내겠사옵니다!"
최두칠이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맹세했다. 마침내 영흥의 장인 집단을 포섭하고, 비밀 기계 공정의 위대한 첫걸음을 떼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쾅!
야철장의 무거운 목조 문이 거칠게 부서지듯 열렸다. 매캐한 연기 사이로 차가운 밤바람이 들이닥치며, 횃불을 든 포졸들과 그 선두에 선 서리 조태구가 흉포한 기색으로 들이닥쳤다.
조태구의 손에는 한양의 훈구 대신 민우식의 직인이 찍힌 비밀 밀지가 들려 있었다.
"대군 대감! 야철장에서 사사로이 병장기를 주조하여 반역을 도모한다는 명백한 고변이 접수되었사옵니다! 조정의 명에 따라 이 야철장과 대감의 처소를 샅샅이 수색하겠사옵니다!"
조태구의 간사한 외침이 야철장에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칼날을 뽑아 쥔 포졸들이 이선과 최두칠을 포위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