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삐이이이이——"

단조롭고 건조한 전자음이 세인대학병원 응급의료센터 3번 처치실의 공기를 짓눌렀다. 산소포화도 81퍼센트. 맥박수 분당 39회. 바이탈 모니터에 그려지는 녹색 선들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바닥을 향해 꺾이고 있었다.

"뇌부종으로 인한 뇌간 압박, 텐토리얼 헤르니에이션(Tentorial Herniation, 천막개 탈출) 직전입니다. 이대로 방치하면 3분 내로 자가 호흡이 완전히 정지합니다."

백서진은 침상 위 환자의 동공을 향해 펜라이트를 비추며 담담하게 내뱉었다. 빛을 받아도 축소되지 않는, 완전히 풀려버린 무감각한 눈동자. 그것은 죽음의 그림자가 뇌간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는 명확한 신호였다.

"야, 백서진! 미쳤어? 오른팔도 제대로 못 쓰는 반병신 새끼가 어딜 기어들어 와서 헛소리야?"

성큼 다가온 치프 레지던트 계승우가 서진의 오른쪽 어깨를 억척스럽게 밀쳐냈다. 서진의 몸이 뒤로 크게 휘청였다. 오른팔이 맥없이 허공을 가르며 허벅지 옆으로 툭 떨어졌다. 신경계 마비로 손끝 하나 제대로 구부리지 못하는 쓸모없는 오른손. 동료들의 노골적인 멸시와 방치 속에서 서진이 매일 마주해야 하는 비참한 현실이었다.

계승우는 일그러진 얼굴로 환자의 차트를 신경질적으로 뒤적였다.

"어차피 DNR(연명치료 중단 동의서) 동의 단계까지 간 환자야. 연고지도 없는 행려병자 하나 가지고 소란 피우지 말고 네 구역으로 꺼져. 인턴보다 손도 느린 주제에 감히 누굴 가르치려 들어?"

계승우의 비아냥거림이 고막을 파고들었지만, 서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환자의 머리맡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순간, 서진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이명이 일었다.

'웅——'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진동과 함께, 시야가 극도로 좁아지며 하얗게 탈색되기 시작했다. 뇌수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서진은 자신도 모르게 왼쪽 손으로 관자놀이를 강하게 압박했다. 안구 뒤편의 시신경이 터져 나갈 것처럼 부풀어 오르는 감각.

그리고, 세상이 변했다.

흑백으로 변해버린 수술실 풍경 위로, 오직 침상 위 환자의 신체만이 기이할 정도로 선명한 입체적 천연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투명하게 비쳐 보이는 두개골 내부. 그 안에서 요동치는 혈관들이 붉고 푸른 선형의 에너지 흐름이 되어 서진의 눈앞에 그려졌다.

붉은색은 산소를 가득 머금은 동맥, 푸른색은 정맥, 그리고 그 사이를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얽어매며 황금빛으로 흐르는 미세한 생명의 길.

'기맥(氣脈)이다.'

전생의 기억이 해일처럼 뇌리를 덮쳤다. 조선 최고 어의(御醫)로서 수많은 왕족과 사대부의 숨줄기를 쥐고 흔들던 시절의 감각. 인체의 경락과 혈류를 실시간으로 투시해 내던 초감각적 비술, '기맥 투안(氣脈 透眼)'이 현대의 껍데기를 쓴 서진의 안구 속에서 마침내 눈을 뜬 것이었다.

동시에 깊은 심연에 묻어두었던 부채감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내 손끝에서 숨을 거두었던 선대 왕…….'

조선의 지존이었던 임금의 붕어를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무력감. 그것은 수백 년의 세월을 넘어 환생한 이 순간에도 서진의 영혼을 옥죄는 사슬이었다. 환자를 살려내지 못하면 자신은 그저 시체를 만지는 인형에 불과하다는 자조와, 다시는 실패하지 않겠다는 병적인 집착이 서진의 전신을 차갑게 식혔다.

서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슬픔도, 분노도 배제된 철저한 기계의 눈빛이었다.

눈앞의 환자는 살려내야 할 정교한 피조물일 뿐이었다. 현대 의학이 자랑하는 정밀한 메스와 카테터는, 전생에 자신이 사용하던 은침(銀針)이 극대화된 형태에 불과했다. 도구의 모양새가 바뀌었을 뿐, 사람을 살리는 법리는 단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

"비키십시오."

서진이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이 새끼가 진짜 돌았나……."

"우측 중대뇌동맥(MCA) 분지 부위의 기맥이 완전히 막혔습니다. 뇌압이 급격히 상승해 압박을 이기지 못한 뇌간이 밑으로 밀려 내려가고 있어요. 지금 당장 감압하지 않으면 뇌사가 아니라 즉사입니다."

"이게 어디서 아는 척이야? CT도 안 찍어본 환자 상태를 네가 어떻게 알아? 장비도 없이 무당질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계승우가 코웃음을 치며 서진의 앞을 막아서려 했다.

그때, 처치실의 슬라이딩 도어가 거칠게 열리며 한 여성이 걸어 들어왔다.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칼 아래로 날카로운 지성이 빛나는 눈매. 소아외과 펠로우 한채원이었다. 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상황을 빠르게 훑었다.

"무슨 소란이죠? 응급실에서 고성방가입니까?"

"한 선생, 이것 좀 봐요. 이 병신 같은 이비인후과 레지던트 놈이 DNR 환자한테 손을 대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잖습니까."

계승우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한채원의 편을 들며 서진을 가리켰다.

한채원은 서진의 초점 없는 눈빛과 늘어진 오른팔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전형적인 인도주의적 신념을 가진 의사였지만, 동시에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무모한 객기로 환자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를 가장 혐오했다.

"백서진 선생. 본인 몸 상태는 본인이 가장 잘 알 텐데요. 오른손 제어도 안 되는 상태에서 응급 처치라니요? 라이센스 박탈당하고 싶어서 환자를 인질로 잡는 겁니까?"

채원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서진은 흔들리지 않고 채원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투안(透眼)은 이미 채원의 신체 반응마저 읽어내고 있었다. 불규칙하게 요동치는 그녀의 미세한 맥박. 환자를 진심으로 걱정하지만, 현대 의학의 프로토콜이라는 한계에 갇혀 절망하고 있는 여자의 흔들림.

"한채원 선생."

서진이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목소리는 수술실의 차가운 금속 메스처럼 날카로웠다.

"현대 의학의 매뉴얼이 만능이라 믿습니까? 지금 환자의 두개내압(ICP)은 최소 38mmHg 이상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정상 범주의 세 배가 넘는 수치죠. 이 상태에서 제아무리 뛰어난 소아외과 전문의라 해도 수술실로 이동해 두개골을 열기까지 걸리는 최소 시간은 20분입니다. 그 20분 동안 환자의 뇌세포는 돌이킬 수 없이 사멸합니다."

"그, 그건……."

"장비와 절차를 핑계로 환자가 죽어가는 것을 방치하는 것. 그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고상한 원칙입니까? 내 눈에는 그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비겁한 변명으로밖에 보이지 않는군요."

"뭐라고요?"

채원의 뺨이 모욕감으로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서진의 논리적인 지적에는 반박할 단어를 찾지 못해 입술을 잘게 떨었다. 실제로 두개골 절개술(Craniotomy)을 준비하는 동안 환자가 사망할 확률은 90퍼센트 이상이었다.

"비키라고 했습니다. 이 환자의 생사여탈권은 이제 제 손에 있습니다."

서진은 지체하지 않고 수술용 트레이로 손을 뻗었다.

문제는 그의 오른팔이었다. 신경이 마비되어 제멋대로 떨리는 오른손으로는 정밀한 기구 조작이 불가능했다. 이대로는 카테터를 쥐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기맥을 강제로 소통시킨다.'

서진은 왼손으로 트레이 위에 놓인 굵은 일회용 주삿바늘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자신의 오른쪽 팔뚝, 수삼리(手三里)와 곡지(曲池) 혈 자리를 향해 깊숙이 찔러 넣었다.

서걱.

살을 뚫고 들어가는 차가운 금속의 감각과 함께 끔찍한 통증이 전신을 강타했다.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는 자해에 가까운 무모한 짓이었지만, 서진에게는 막힌 신경 망을 강제로 자극해 일시적으로 전류를 통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침술 처방이었다.

"악! 미친…… 자기 팔에 뭘 찌르는 거야?!"

계승우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한채원 역시 충격으로 눈을 크게 떴다.

서진은 이를 악물었다.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의 눈빛은 오히려 더 투명하게 빛났다. 주삿바늘을 타고 들어간 강한 자극이 마비되어 있던 우측 상완신경총을 강타했다. 전기가 통하듯 찌르르한 감각이 손끝까지 뻗쳐 나갔다.

떨림이 멈췄다.

완벽하게 제어되는 오른손. 서진은 지체 없이 오른손으로 7프렌치(Fr) 카테터 가이드 와이어를 쥐었다. 그 움직임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오차도 없었다.

"지금부터 대퇴동맥을 통해 뇌저동맥까지 카테터를 진입시킵니다. 조영제 없이 진행합니다."

"조영제도 없이 플루오로스코피(방사선 투시 장비)도 안 보고 카테터를 진입시키겠다고? 혈관을 찢어 죽일 작정이야?!"

계승우가 경악하며 소리쳤지만, 서진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서진의 눈앞에는 이미 환자의 전신 혈관이 한 폭의 정밀한 삼차원 지도로 펼쳐져 있었다. 기맥 투안이 가리키는 황금빛 길. 그것은 현대의 어떤 최첨단 영상 장비보다도 정교하고 확실한 내비게이션이었다.

서겁.

서진의 손끝이 움직였다. 환자의 사타구니 부근 대퇴동맥으로 바늘이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가이드 와이어가 혈관의 내벽을 단 한 번의 마찰도 없이 타고 올라갔다. 복부대동맥을 지나, 흉부대동맥, 그리고 경동맥을 거쳐 뇌저동맥의 기맥 교차점에 이르는 길.

그것은 마치 숙련된 사수가 장애물로 가득한 미로를 단숨에 관통하는 것과 같았다.

"말도 안 돼…… 인터벤션 장비도 없이 어떻게 이 속도로 진입하는 거지?"

한채원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서진의 손끝은 마치 환자의 혈관 내부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단 30초. 보통의 숙련된 전문의라도 몇 분은 걸릴 과정을 서진은 눈을 감고도 길을 찾듯 단숨에 끝마쳤다.

"뇌저동맥 폐색 부위 도달."

서진이 중얼거리며 카테터 끝의 미세 밸브를 열었다.

동시에 막혀 있던 혈류의 흐름이 급격히 뚫리며, 황금빛 기맥이 환자의 뇌 전체로 퍼져 나가는 것이 서진의 투안에 포착되었다. 압박받던 뇌간의 정체가 풀리고, 세포들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흡……! 컥!"

침상 위의 환자가 크게 몸을 떨며 가슴을 들어 올렸다. 멈춰 있던 자가 호흡이 터져 나온 것이었다.

"삐비빅! 삐비빅!"

사망을 경고하던 바이탈 모니터의 경고음이 정상적인 박동음으로 바뀌었다. 산소포화도 96퍼센트. 맥박수 분당 72회. 혈압 120에 80.

완벽한 소생이었다.

처치실 내부에는 기괴할 정도의 침묵이 흘렀다. 계승우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았고, 한채원은 서진의 오른손과 환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전율했다. 현대 의학이 사망 선고를 내리기 직전의 환자를, 단 한 자루의 카테터와 기적 같은 감각만으로 살려낸 것이었다.

"하아…… 하아……."

서진은 카테터를 고정하고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눈을 찌르는 듯한 안통이 밀려왔다. 기맥 투안을 과도하게 사용한 대가였다. 머릿속이 깨질 것처럼 아파왔고, 일시적으로 통증을 마비시켰던 우측 팔이 다시 기분 나쁜 떨림과 함께 굳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진은 표정을 흩트리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오른손을 의사 가운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으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환자는 안정되었습니다. 사후 처리는 원칙을 아주 잘 지키시는 한채원 선생께서 맡아주시지요."

서진의 냉소적인 말투에 채원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경멸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경외감과 열등감이 뒤섞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위이이잉——! 위이이잉——!"

소아외과 중환자실 전체를 울리는 붉은색 비상 경고등이 요란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응급 상황과는 차원이 다른, 최고 등급의 비상 사이렌이었다.

동시에 처치실의 무전기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 "응급의학과 송 본부장입니다! 지금 즉시 소아외과 하이브리드 수술실 오픈하세요! 차기 유력 대선후보인 유민형 의원의 친손자가 이송 중입니다! 사인은 급성 뇌동맥류 파열로 인한 대량 출혈! 이송 완료까지 남은 시간 3분!"

지독한 폭풍이 세인대학병원을 향해 몰아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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