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식은땀을 흘리며 첫 번째 초구에 이어 두 번째 공마저 허공으로 크게 날려 보내 폭투를 기록하는 태윤의 손끝이 보기 싫게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귓가를 때리는 것은 5만 관중이 내지르는 야유가 아니었다. 삐익― 하는, 고막을 사정없이 찌르는 날카로운 이명이었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타들어 가듯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15년 전, 어깨 관절 와순이 완전히 파열되던 그 끔찍한 날의 기억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퀴퀴한 더그아웃의 땀 냄새와 코를 찌르는 물파스 향이 환각처럼 폐부 깊숙이 밀려들었다.

허파가 오그라들어 산소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침이 바짝 마르고 혀끝이 굳어갔다.

“헤이! 똑바로 안 던져? 이 동양인 꼬맹이 자식아!” “당장 마운드에서 내려보내! 저러다 사람 잡겠네!”

다저스 더그아웃에서 튀어나온 험악한 고함이 마운드 위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타석에서 간신히 몸을 피한 에밀리오는 유니폼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태윤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심판마저 양손을 들어 올리며 태윤에게 경고의 제스처를 취했다. 한 번만 더 타자의 머리를 겨냥하는 실투가 나온다면 즉각 퇴장시키겠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눈앞에 붉은색 경고창이 어지럽게 명멸했다.

[위기: 제구력 상실율 92%] [시스템 경고: 다음 투구 시 폭투 확률 87%]

‘안 돼.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다.’

태윤은 이빨을 악물었지만, 손가락 끝의 감각은 이미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실밥을 채야 할 검지와 중지가 제멋대로 떨렸다. 가쁜 숨을 몰아쉴 때마다 마운드가 양옆으로 흔들리는 착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홈플레이트 뒤에서 철컥하는 묵직한 장비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루크 에반스가 마스크를 벗어 던졌다. 그는 주심을 향해 오른손을 들어 타임아웃을 강하게 요청하더니, 성큼성큼 마운드로 걸어 올라왔다. 그의 무거운 발걸음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태윤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덥석.

루크의 거대한 가죽 미트가 태윤의 가슴팍을 툭 쳤다. 그리고 이내 단단한 두 손이 태윤의 양 어깨를 움켜잡았다. 으스러질 듯한 강한 악력이 어깨뼈를 타고 그대로 전해졌다.

“태윤, 내 눈 봐.”

낮고 묵직한 목소리였다. 태윤은 흩어지던 초점을 간신히 모아 루크의 푸른 눈동자를 응시했다. 루크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그의 턱끝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여기 어디야? 포트마이어스의 그 쓸쓸한 쇼케이스장이야? 아니면 네 어깨를 갈아 먹던 싱글A 똥통 야구장이야?” “……루크.” “대답해, 인마! 여기 어디야!” “……다저스타디움.”

겨우 터져 나온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루크가 씩 웃으며 태윤의 어깨를 다시 한번 강하게 쥐어흔들었다.

“그래, 다저스타디움이야. 네가 씹어 먹을 메이저리그 마운드라고. 저딴 양아치 타자 한 명 때문에 네 어깨가 쫄아붙을 수준이야? 정신 차려. 네 공은 아무도 못 쳐.” “손끝이…… 감각이 잘 안 느껴져.” “느껴지게 만들어 줄게.”

루크가 자신의 가슴팍을 가죽 미트로 쾅쾅 쳤다. 둔탁한 파열음이 마운드 위에 울려 퍼졌다.

“기억해라. 네가 나한테 가르쳐 준 거 있잖아. 피칭 터널링, 그리고 표적 시각 동화.” “……!” “내 미트가 어디론가 움직이든 간에, 넌 그냥 릴리스 포인트만 믿고 던져. 네 공이 터널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내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스트라이크로 만들어 줄 테니까. 넌 그냥 내 미트 가운데만 보고 꽂아 넣는 거야. 알았어?”

루크의 눈빛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완벽한 신뢰. 15년 차 마이너리거로 구르며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오직 투수만을 믿고 자신을 던지는 포수의 눈빛이었다.

태윤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굳어 있던 핏줄이 탁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차가웠던 손가락 끝으로 서서히 뜨거운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시스템 경고 해제 중…… 제구력 상실율 31%로 급감] [신체 동기화율 98.7% 회복]

“그래. 가자.”

태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크는 씩 웃으며 마스크를 다시 쓰고 홈플레이트로 돌아갔다.

마운드 위에 홀로 남은 태윤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후― 하고 뿜어진 숨결과 함께 머릿속을 지배하던 공포의 잔재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타석에는 여전히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배트를 가볍게 돌리고 있는 에밀리오가 서 있었다. 태윤이 두 번 연속 폭투를 던졌으니, 이번에는 잔뜩 겁을 먹고 한가운데로 밋밋한 공을 던지거나 볼넷을 내줄 것이라 확신하는 눈빛이었다.

스윽.

태윤이 셋포지션을 취했다. 루크가 안쪽 깊숙한 곳에서 바깥쪽 흘러나가는 코스로 미트를 살짝 움직이며 사인을 보냈다. 슬러브(Slurve). 패스트볼의 터널에서 출발해 마지막 순간 사선으로 날카롭게 꺾이는 마구였다.

‘던진다.’

태윤의 디딤발이 마운드의 흙을 강하게 걷어찼다. 콰앙!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태윤의 오른팔이 채찍처럼 휘어졌다. 손가락 끝 검지와 중지가 야구공의 실밥을 사정없이 채는 감각이 선명하게 뇌세포를 자극했다.

쉬이이익!

공은 완벽한 포심 패스트볼의 궤적을 그리며 홈플레이트를 향해 돌진했다. 에밀리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직전의 폭투와는 전혀 다른, 극도로 묵직하고 빠른 궤적. 에밀리오는 이것이 몸쪽 98마일 패스트볼이라 판단하고 상체를 꼿꼿이 세운 채 배트를 멈추려 했다. 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홈플레이트 앞 7.2미터, 이른바 피칭 터널의 종착지에 다다르는 순간. 공이 마법처럼 바깥쪽 아래로 급격하게 휘어지며 떨어졌다.

‘아차!’

에밀리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지만, 이미 배트를 멈추기에는 늦었다. 공은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으로 완전히 빠져나가는 궤적이었다. 그대로 두었다면 볼이 되었을 터였다.

그 찰나의 순간, 루크 에반스의 미트가 움직였다. 루크는 이미 태윤의 공이 릴리스 포인트를 떠나는 순간부터 '표적 시각 동화' 기술을 극대화하고 있었다. 공의 미세한 회전축을 눈으로 쫓으며, 공이 꺾여 들어올 종착지를 먼저 시각적으로 동화시켰다.

쉬익, 퍽!

루크의 미트가 바깥쪽으로 사볍게 뻗어 나가며 공을 낚아챘다. 그리고 공을 잡는 물리적 반동을 이용해 손목을 미세하게 안쪽으로 비틀며 스트라이크 존 경계선 안쪽으로 미트를 부드럽게 끌고 들어왔다. 심판의 시선에서는 공이 처음부터 스트라이크 존 구석에 꽂힌 것처럼 보이는 완벽한 프레이밍이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주심의 오른팔이 허공을 갈랐다. 에밀리오가 펄쩍 뛰며 심판에게 항의하려 했지만, 주심의 단호한 눈빛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저게 스트라이크라고?”

에밀리오는 멍한 얼굴로 더그아웃을 향해 걸어갔다.

태윤은 마운드 위에서 가죽 미트를 가볍게 두드리는 루크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15년 뒤 미래의 기술인 '표적 시각 동화' 프레이밍을 이토록 완벽하게 재현해 내다니. 루크 에반스, 그는 이미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의 포수였다.

[육체 관리 장부 실시간 기록] - 어깨 관절 와순 마모도: 0.04% - 회전근개 피로도: 0.02% - 젖산 수치: 1.2% (극히 정상) - 현재 구속: 99.4mph (시속 160km)

이것이 바로 철저한 자기 관리의 성과였다. 과거 싱글A 시절, 제임스 밀러 감독은 태윤이 경기 직후 극저온 치료기(Cryotherapy)에 몸을 담그고 미세 전류 패치를 붙이며 냉온욕을 왕복할 때마다 씹는담배를 뱉으며 비웃었었다. “요즘 애새끼들은 온실 속 화초처럼 야구를 해. 던져서 단단하게 만들어야 진짜 어깨지!” 밀러 감독의 그 무식한 철학을 맹신하며 매일같이 120구씩 전력투구를 했던 동기 마커스 스톤은 어떻게 되었던가. 결국 내측 측부 인대(UCL)가 허무하게 파열되어 토미 존 수술대에 올랐고, 지금은 마운드가 아닌 병원 침대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반면, 철저하게 마모도를 관리하며 리페어 프로토콜을 완수한 태윤의 어깨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신선하고 강력했다.

6회초, 다저스의 4번 타자이자 리그 최고의 슬러거인 켐프가 타석에 들어섰다. 태윤은 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네가 아무리 메이저리그 홈런왕이라 해도, 내 터널 안에서는 배팅볼 타자일 뿐이다.’

스윽, 쾅!

태윤의 손끝을 떠난 공이 엄청난 파열음을 내며 공기를 찢었다. 슈우우욱!

공은 타자 몸쪽으로 가깝게 붙어오다 홈플레이트 직전에서 아래로 뚝 떨어졌다. 싱커(Sinker)였다. 회전 효율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공기 저항을 조절한 태윤의 싱커는 단순한 변화구가 아니었다. 101마일(시속 162.5km)의 속도로 날아오다 가라앉는 무시무시한 마구였다.

깡!

켐프가 급하게 배트를 내밀었지만, 공은 배트의 밑부분을 때렸다. 힘없이 굴러가는 땅볼. 3루수가 가볍게 잡아 1루로 송구하며 아웃카운트를 올렸다.

“삼진!” “삼진 아웃!”

7회도, 8회도 다저스의 타선은 태윤의 지능적인 피칭 터널링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패스트볼과 체인지업의 이지선다인 줄 알고 대처하려 하면 날카로운 슬러브가 바깥쪽을 찔렀고, 슬러브를 의식하면 101마일의 불같은 싱커가 몸쪽을 파고들었다. 타자들의 머릿속은 이미 복잡하게 뒤엉켜 배트를 휘두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퍽! 퍽!

루크의 미트 소리가 다저스타디움에 청량하게 울려 퍼질 때마다, 전광판의 아웃카운트 불빛이 차례로 켜졌다.

단 78구. 8이닝 무실점. 피안타 단 2개, 탈삼진 9개. 데뷔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그야말로 다저스 타선을 완벽하게 지배한 피칭이었다.

8회말 수비를 마치고 태윤이 더그아웃으로 들어서자, 원정 전용 자이언츠 덕아웃은 축제 분위기로 변했다. 동료 야수들이 태윤의 등을 두드리며 환호했고, 단장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프런트 직원들은 상기된 얼굴로 서로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제임스 밀러 감독의 안색만큼은 흑빛으로 굳어 있었다. 그는 태윤이 자신의 ‘어깨 강화론’을 무참히 깨부수고, 에이전트 아더 워드를 통해 ‘90구 제한 및 부상 방지 옵션’을 계약서에 박아 넣은 것에 대해 극도의 열등감과 분노를 품고 있었다. 신인 투수가 감독인 자신보다 영리하게 몸을 관리하고 프런트의 비호를 받는 상황이 미치도록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밀러 감독은 입안에 든 씹는담배를 바닥에 퉤 뱉어냈다. 그의 구두 끝이 태윤이 앉아 있는 벤치 앞으로 다가왔다.

“강.”

껄끄러운 목소리가 태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태윤은 땀을 닦던 수건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감독을 바라보았다.

“예, 감독님.”

“9회도 네가 올라간다. 완투해라.”

그 한마디에 더그아웃의 활기찬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태윤의 현재 투구 수는 78구. 9회를 마무리하려면 최소 12구 이상이 필요했다. 만약 타자가 출루라도 한다면 투구 수는 순식간에 90구를 넘어설 터였다. 이는 계약서에 명시된 ‘투구 수 90구 강제 제한’ 옵션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지시이자, 태윤의 어깨 마모도를 임계치 너머로 밀어 넣으려는 악의적인 혹사 지시였다.

태윤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루크 역시 밀러 감독을 향해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밀러 감독은 태윤의 싸늘한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오히려 턱을 치켜들며 비열하게 웃었다.

“왜? 메이저리그 최초의 완봉승 에이스라는 타이틀이 탐나지 않나 보지? 아니면…… 아직도 그 잘나빠진 어깨 마모도 타령을 하며 사내자식이 엄살을 부릴 셈이냐?”

자신의 구시대적 권위를 증명하고, 태윤의 기세를 완벽하게 꺾어놓기 위한 마지막 도발이었다.

태윤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끝이 글러브를 꽉 움켜쥐었다. 대치하는 두 사람 사이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순간, 더그아웃 벽에 걸린 수화기에서 날카로운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단장실의 직통 전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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