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어깨 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는 허무할 정도로 작았다. 물에 젖은 나뭇가지가 뭉개지며 부러지는 듯한 기분 나쁜 파열음. 뒤이어 왼쪽 가슴께부터 목덜미까지 타오르는 듯한 극심한 작열감이 뇌하수체를 사정없이 두들겼다.
“아윽……!”
강태윤은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거친 숨이 허파를 찢을 듯이 들락날락했다. 본능적으로 오른손을 뻗어 왼쪽 어깨를 움켜쥐었다. 손끝에 닿아야 할 축축한 피나, 지난 15년간 마이너리그의 시린 겨울을 버티게 했던 끈적한 소염진퉁제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사방이 고요했다.
코를 찌르는 것은 미국 마이너리그 싱글 A 구장의 눅눅한 라커룸 냄새가 아니었다. 낡은 벽지에서 풍기는 미세한 풀 냄새, 그리고 창문 틈새로 불어오는 덥고 습한 밤공기.
태윤은 번쩍 눈을 떴다.
시야가 푸르스름한 어둠에 적응하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들어왔다. 삐걱거리는 저가 싱글 침대, 한쪽 모서리가 주저앉은 책상, 그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국산 브랜드의 낡은 글러브. 벽에 걸린 달력의 숫자가 유난히 크게 도드라졌다.
[2012년 6월]
태윤은 떨리는 손으로 책상 위의 전자기기를 붙잡았다. 화면이 켜지며 투박한 UI가 빛을 발했다.
2012년 6월 3일 일요일.
“말도 안 돼.”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앳되지만 분명히 힘이 실려 있는 목소리. 30대 중반의 닳고 닳은 노장 투수의 걸걸한 음색이 아니었다. 거울 속의 얼굴은 턱선이 날렵하고 눈빛이 살아 있는 열여덟 살의 강태윤이었다.
메이저리그의 끝자락이라도 잡아보겠다고 버스만 하루에 10시간씩 타며 차가운 빵으로 끼니를 때우던 15년의 세월. 어깨 관절 와순이 완전히 조각나 마운드 위에서 그대로 주저앉았던 그 마지막 은퇴 경기. 그 모든 비극적인 기억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회귀였다.
그것도 메이저리그 드래프트를 단 하루 앞둔, 인생의 가장 거대한 분기점의 전날 밤으로.
싸늘한 전율이 척수를 타고 흘러내릴 때였다. 갑자기 눈앞의 허공이 쩍 갈라지며 푸른색 불꽃 같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파지직!
망막을 직접 자극하는 듯한 기계적인 전자음과 함께, 정교하게 짜인 반투명한 홀로그램 텍스트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 [육체 관리 장부(Physical Management Ledger)] - 대상자: 강태윤 (18세) - 현재 신체 상태: 이상 없음 - 누적 투구 수: 0 / 90 (일일 권장 한계치) ────────────────── * 세부 관절 및 근육 피로도 - 우측 회전근개(Rotator Cuff): 0.00% - 관절 와순(Labrum): 0.00% - 내측 측부 인대(UCL): 0.00% - 유산소 대사 젖산 수치: 0.8 mmol/L ────────────────── * 피칭 메커니즘 분석 - 회전 효율성(Spin Efficiency): 98.7% (최적화 대기) - 터널링 일치도(Tunneling Deviation): 0.00mm ──────────────────
글자가 눈동자의 움직임을 따라 유연하게 반응했다. 태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15년 뒤의 미래, 메이저리그 베테랑 투수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돌던 최첨단 바이오메카닉스 이론과 데이터 분석법이 눈앞에 시각화되어 가동되고 있었다. 단순한 수치가 아니었다. 손가락 끝의 미세한 신경 세포 하나, 어깨를 들어 올릴 때 쓰이는 극하근과 소원근의 수축 정도가 소수점 둘레까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내 몸이…… 완전히 깨끗하다고?”
태윤은 천천히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지난 생의 마지막 순간, 그의 어깨는 말 그대로 걸레짝이었다. 뼈와 뼈가 부딪쳐 서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공을 하나 던질 때마다 관절 속에서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감독의 투혼 요구에 밀려 진통제를 삼키며 마운드에 올랐던 대가는 참혹한 은퇴뿐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뇌리를 스치자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훅, 하고 가슴을 짓누르는 공포. 심장이 분당 140회 이상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손 끝이 차갑게 식어 가며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과거 지독했던 혹사 트라우마와 어깨가 파열되던 순간의 감각이 뇌를 지배하려 드는 회기성 공황 발작이었다.
“하아, 흑……!”
태윤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금방이라도 뼈가 어긋날 것 같은 착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그때, 시야의 한가운데서 푸른 불빛이 강하게 명멸했다.
[경고: 일시적 과호흡으로 인한 심박수 상승. 젖산 수치 일시적 상승(1.5 mmol/L).] [우측 관절 와순 마모도: 0.00%. 물리적 부상 징후 없음.]
차가운 숫자가 눈앞에 박혔다.
0.00%.
상처 하나 없는 완벽한 신체. 미래의 닳고 닳은 기술과 경험을 담아낼 수 있는, 단 한 군데도 마모되지 않은 깨끗한 그릇이 여기에 있었다.
태윤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이성이 서서히 뇌를 장악하며 요동치던 심박수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손끝의 떨림이 멈추고, 경직되었던 근육들이 부드럽게 이완되는 것이 실시간 수치로 보였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태윤은 벽에 걸린 청색 글러브를 손에 끼웠다.
가죽의 빳빳하고 팽팽한 감각이 손등을 감싸 안았다. 팔을 가볍게 회전시켜 보았다.
스윽. 스윽.
어깨 관절이 어떠한 제약도 없이, 완벽하게 매끄러운 궤적을 그리며 돌아갔다. 걸리는 느낌도, 둔탁한 소리도 없었다. 100%의 청춘 육체가 선사하는 압도적인 해방감이 온몸의 세포를 깨웠다.
“이번에는 다르게 던진다.”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더 이상 투혼이라는 미명 하에 몸을 갈아 넣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계산된 투구 수, 완벽하게 통제된 마모도, 그리고 상대 타자의 안구 인식 한계를 깨부수는 과학적인 피칭 터널링.
그것이 이 가혹한 야구판에서 살아남아 메이저리그의 정점에 서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플로리다주 포트마이어스의 어느 야구장.
태양이 내리쬐는 그라운드의 열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뜨거웠다. 붉은 흙먼지가 바람을 타고 날렸고, 가죽 글러브에 공이 박히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퍽! 콰앙!
“오케이! 나이스 볼!”
포수의 미트질 소리가 경기장에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메이저리그 30개 구단의 스카우트들이 관중석에 빽빽하게 들어찬 채, 저마다 레이더 건을 치켜들고 있었다. 드래프트를 코앞에 두고 열린 마지막 합동 쇼케이스 현장이었다.
“다음 투수, 데이비드 크로프트!”
진행요원의 외침과 함께 한 거구의 선수가 마운드로 걸어 올라갔다. 금발을 휘날리며 마운드에 선 데이비드 크로프트는 벌써부터 자신감에 가득 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고교 무대를 평정하고 100마일의 강속구를 던진다는 초고교급 유망주였다.
태윤은 외야 펜스 옆에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크로프트를 응시했다.
동시에 그의 시야에 붉은색 경고등이 깜빡였다.
[대상: 데이비드 크로프트] - 우측 내측 측부 인대(UCL) 마모도: 42.15% (경고) - 우측 회전근개 피로도: 61.80% (주의) * 분석: 무리한 어깨 회전 및 팔꿈치 꺾임 현상 관찰됨. 100마일 이상의 투구 지속 시 2년 이내 파열 가능성 높음.
크로프트는 자신의 몸이 부서져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스카우트들의 시선을 즐기며 전력으로 공을 뿌려댔다.
쉬이익! 쾅!
“98마일! 대단하군!”
관중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크로프트는 포효하며 가슴을 두드렸다. 영웅주의에 취한 전형적인 강속구 투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태윤의 눈에는 그 투구가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자멸적인지 고스란히 보였다. 회전 효율성은 고작 82% 수준. 공기 저항을 이겨내지 못하고 홈플레이트 부근에서 밋밋하게 밀려 들어가는 공이었다. 오직 타고난 근육의 힘으로 억지로 짜내서 던지는 투구였다.
“저러니 오래 못 가지.”
태윤은 낮게 중얼거렸다. 실제로 크로프트는 마이너리그를 폭격하다가 메이저리그 데뷔 직전 팔꿈치 인대가 끊어져 사라진 비운의 유망주였다. 구시대적 야구 이론이 낳은 또 하나의 희생양인 셈이다.
“헤이, 거기 한국인.”
등 뒤에서 차갑고 가시 돋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윤이 고개를 돌리자, 깔끔한 정장 차림에 세련된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이번 쇼케이스를 주관하는 구단 연합의 스타 스카우트이자, 현지 유학파 출신의 데이터 분석관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롭 윌슨이었다.
윌슨은 태윤의 초라한 연습용 유니폼과 국산 글러브를 훑어보며 코웃음을 쳤다.
“강태윤이라고 했나? 네 리포트를 봤는데, 구속은 겨우 80마일 후반대에 기교파 투수더군. 요즘 빅리그에서 그런 나약한 공은 배팅볼 취급밖에 안 받아. 차라리 대학에 진학해서 어깨나 더 강하게 만들어 오지 그래? 억지로 던지다 부러지지 말고.”
스카우트의 시선에는 노골적인 무시와 편견이 깔려 있었다. 100마일의 강속구와 투혼만을 숭상하는 이 구시대의 현장에서, 태윤의 정교한 메커니즘은 그저 '힘없는 아시아 투수의 잔재주' 정도로 치부되고 있었다.
태윤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글러브를 가볍게 툭툭 치며 윌슨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차갑고 고요한 눈빛에 윌슨은 순간 묘한 압박감을 느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내 공이 배팅볼이 될지, 아니면 타자들의 방망이를 쪼개버릴 마구가 될지는…….”
태윤이 마운드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등 뒤로 푸른빛의 장부가 조용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지금 직접 보여드리지죠.”
마운드 흙을 밟는 감각이 발끝을 통해 척추로 짜릿하게 올라왔다.
질척이고 파여 있던 마이너리그의 마운드와는 달랐다. 단단하게 다져진 점토질의 흙이 디딤발을 완벽하게 지탱해 주었다. 어깨 마모도 0.00%의 신체가 선사하는 가벼움은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태윤은 로진백을 집어 들어 가볍게 털었다. 하얀 가루가 한낮의 햇살 속에서 부서져 내렸다.
타석에는 대학 리그에서 소문난 강타자, 제이슨 밀러가 배트를 가볍게 돌리며 들어서고 있었다. 거구의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상당했지만, 태윤의 눈에는 그저 엉성한 나뭇가지 인형처럼 보였다. 15년 동안 메이저리그급 괴물들의 배트 스피드를 지켜봐 온 태윤이었다.
“던져 봐, 꼬맹이. 가볍게 쳐줄 테니까.”
밀러가 배트로 홈플레이트를 툭툭 치며 씩 웃었다. 스카우트들의 시선이 일제히 태윤에게 쏠렸다. 레이더 건을 쥔 롭 윌슨의 손가락이 지루하다는 듯 템포를 맞추며 까딱거렸다.
태윤은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스우우흡. 후우.
[우측 회전근개 피로도: 0.12%] [내측 측부 인대(UCL) 마모도: 0.00%] [시스템 동기화 완료: 회전 효율성 최적화 모드 가동]
눈앞의 장부가 푸른 빛을 내뿜으며 타겟팅 라인을 그렸다. 포수의 미트 한가운데로 이어지는 가상의 파이프라인. 피칭 터널이 시야를 가로질러 선명하게 안착했다.
태윤이 왼발을 높게 들어 올렸다.
회귀 전 15년 동안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완성했던 비대칭 스트라이드 메커니즘이 자연스럽게 육체에 녹아들었다. 골반의 회전축이 지면과 완벽한 수평을 이루며 힘을 응축했다. 상체가 앞으로 쏠리지 않도록 엉덩이 근육이 단단하게 버텼다.
스냅이 풀리는 순간, 손가락 끝의 감각이 극대화되었다. 중지와 검지가 실밥(Seam)을 강하게 긁어내리는 느낌이 뇌신경을 타고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실밥을 채는 순간의 회전 효율성 100%.
쉬이이익!
공이 손끝을 떠나는 순간, 대기가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파열음이 마운드를 갈랐다.
포수 미트까지의 거리는 18.44미터. 공은 정확히 터널의 중심을 뚫고 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타자 제이슨 밀러의 눈동자가 공의 궤적을 쫓았지만, 그의 뇌가 구속을 인지하기도 전에 공은 이미 홈플레이트 앞 7.2미터 터널 분기점을 통과하고 있었다.
직구 타이밍. 밀러의 배트가 거칠게 돌아갔다.
하지만 그 순간, 완벽한 직선으로 날아가던 공이 마법처럼 궤적을 바꿨다. 홈플레이트 직전에서 우타자의 몸쪽 낮은 코스로 날카롭게 휘어 감기며 가라앉았다. 종(縱) 무브먼트와 횡(橫) 무브먼트가 동시에 결합한 미래형 투심 패스트볼이었다.
콰아앙!
“스투라이크!”
포수의 미트가 사정없이 찢어질 듯한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려났다. 밀러의 배트는 공이 이미 지나간 허공을 쓸쓸히 갈랐다.
순간, 야구장 전체에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밀러는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텅 빈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어……?”
관중석 여기저기서 당혹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스카우트들이 일제히 자신이 쥔 레이더 건의 액정을 확인했다. 눈을 의심하듯 액정을 문지르고 다시 확인하는 이들도 있었다.
롭 윌슨의 손가락 움직임이 딱 멈췄다. 그의 선글라스 너머로 커진 눈동자가 고스란히 비쳤다.
[95.4 mph (153.5 km/h)] [회전수(RPM): 2,580] [회전 효율성: 99.4%]
“95마일……? 게다가 이 회전수는 대체 뭐야?”
한 스카우트가 비명을 지르듯 중얼거렸다.
단순히 빠른 공이 아니었다. 메이저리그 정상급 투수 수준의 무브먼트와 회전 효율성이 결합한 괴물 같은 공이었다. 기교파 투수라는 리포트의 기록을 비웃듯, 태윤은 첫 공 하나로 쇼케이스장의 공기를 완전히 얼려버렸다.
크로프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가 땀을 닦던 수건을 쥔 손에 핏줄이 붉게 솟아올랐다.
태윤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포수로부터 공을 돌려받았다. 손가락 끝으로 실밥을 만지는 감각이 더없이 매끄러웠다.
[우측 회전근개 피로도: 1.25%] [시스템 분석: 타자의 시각 잔상이 바깥쪽 직구 궤적에 고정됨. 터널링 포메이션 변경 권장.]
장부의 조언은 정확했다. 방금 던진 투심의 궤적이 타자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을 터였다.
태윤이 다시 셋포지션에 들어갔다.
타석의 밀러는 침을 꿀꺽 삼키며 배트를 바짝 치켜세웠다. 그의 발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완전히 기가 죽은 상태였다.
태윤의 팔이 채찍처럼 휘어졌다.
타구음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다시 한 번 마운드를 감쌌다. 공은 이전 투구와 완전히 동일한 궤적, 동일한 회전축을 그리며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밀러는 본능적으로 몸쪽 투심을 예상하고 몸을 뒤로 젖히며 배트를 내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동일한 터널을 타던 공이 홈플레이트 직전에서 거짓말처럼 멈춰 서는 듯하더니, 바깥쪽 높은 코스로 빠르게 솟구쳐 올랐다. 타자의 안구 인식 한계를 완벽하게 교란하는 터널링 하이 패스트볼이었다.
파각!
빗맞은 타구가 힘없이 3루側 관중석 그물망을 때렸다. 밀러의 상체가 완전히 무너지며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말도 안 돼…… 같은 공이 아니었어?”
밀러가 흙먼지 묻은 무릎을 털며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경악을 넘어선 공포가 서려 있었다. 분명히 똑같은 궤적으로 들어왔는데, 마지막 순간에 공이 전혀 다른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듯한 궤적의 마술이었다.
스카우트들의 펜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침묵을 지키던 관중석이 벌집을 쑤신 듯 요란해졌다.
“피칭 터널링(Pitch Tunneling)이야! 저 나이에 저걸 완벽하게 구사한다고?” “직구와 변화구의 릴리스 포인트가 완전히 똑같아. 타자 입장에서는 구종 구분이 아예 불가능해!”
롭 윌슨은 멍하니 레이더 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선글라스를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나약한 공”, “배팅볼”이라는 비아냥이 스스로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가 되어 돌아왔다.
태윤은 마운드 위에서 윌슨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말은 필요 없었다. 압도적인 실력과 수치야말로 이 야구판에서 가장 확실한 대답이었다.
태윤이 마지막 세 번째 공을 던지기 위해 와인드업 자세를 잡았다. 관중석의 모든 카메라와 레이더 건이 일제히 그를 향해 조준되었다. 이제 단 한 구만 더 본다면, 이 쇼케이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완전히 결정될 터였다.
그때였다.
쿵.
가슴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무거운 충격음이 울렸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미세하게 흔들리며, 어깨 속에서 쇠사슬이 비틀리는 듯한 환각이 뇌리를 스쳤다. 과거 15년 동안 그를 괴롭혔던, 어깨가 조각나던 은퇴 경기의 그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귀를 찔렀다.
‘뭐지……?’
태윤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손가락 끝의 감각이 일시적으로 마비되는 듯 둔탁해졌다.
[경고: 트라우마 동기화율 일시적 상승.] [심박수 급증: 155 bpm] [육체 관리 장부 에러 발생 — 수치 분석 지연]
눈앞의 푸른 장부가 붉은색 노이즈를 일으키며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직 한 구가 남았다. 하지만 손끝에 쥐어진 공의 무게가 갑자기 납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태윤의 이마에서 차가운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