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골이 쪼개진다.

뇌장(腦漿)이 끓어 넘치는 착각이 일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린 액체는 땀이 아니었다. 거무죽죽한 핏줄기가 뺨을 적셨다.

사위는 어두웠다. 사방에서 진동하는 것은 썩은 물비린내와 지독한 유황의 독기였다.

바닥은 축축한 진흙이었다. 차가운 이끼가 손가락 끝에 닿았다.

제갈휘(諸葛輝)는 눈을 부릅떴다. 안구의 모세혈관이 터져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이곳은 제갈세가의 외곽, 버려진 폐기 공방이다. 그리고 자신은 현대의 마도 공학도가 아니다. 가문에서 버림받은 망나니 서자, 제갈휘의 육신이다.

기억의 융합은 폭력적이었다. 뇌세포가 비명을 질렀다. 이질적인 두 영혼이 한데 엉키며 뇌골 내부의 압력이 급격히 상승했다.

그 순간, 눈앞의 광경이 기이하게 변모했다.

붉은 시야 너머로 탁한 쇳덩이들이 보였다. 수년 동안 방치되어 붉은 녹이 슬어버린 거대한 수력 전 기재(水力傳機材)였다. 계곡의 물줄기를 끌어와 공방의 주조 가마를 돌리던 고대의 동력 장치다.

그 거대한 고철 덩어리가 해체되기 시작했다.

아니, 해체가 아니었다. 사물의 본질이 낱낱이 분해되어 눈동자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만물성리분개(萬物性理分解).'

물질의 물리적 결함과 원소 성질을 꿰뚫어 보는 이능(異能)이었다.

수차의 주축(主軸)에 표기되는 붉은색 수치들.

[주철제 구동 기어: 마모율 87%] [물림 각도 오류: 오차 4도 12분] [내부 응력 편중: 편차 12.4%]

기계공학적 내구 한계가 숫자가 되어 뇌리에 박혔다.

두뇌의 연산 장치가 미친 듯이 회전했다. 내공이 전무한 육체는 이 초월적인 연산 속도를 감당하지 못했다. 뇌장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열이 두개골을 채웠다.

치이익.

실제 귀 뒤편에서 가죽이 타는 듯한 소리가 들린 듯했다. 극심한 과부하의 대가였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나갔다.

어떤 풍경이었다.

작고 낡은 방. 보증금 몇 백에 월세 수십 짜리 좁은 자취방의 곰팡이 냄새가 흐려졌다.

그리고 어머니. 군대에 가기 전, 거친 손으로 목에 걸어주었던 조악한 은목걸이의 차가운 감촉이 지워졌다. 그 목걸이를 만지며 느꼈던 형언할 수 없는 애틋함과 미안함의 감정이 통째로 도려내어졌다.

그것은 현대의 인문학적 기억이자,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유대감의 파편이었다.

뇌는 연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가장 무용한 감정적 기억부터 영구히 소멸시키고 있었다.

제갈휘는 입술을 깨물었다. 입안에서 비린 피가 터졌다.

손실을 인지했다. 그러나 슬픔은 없었다. 슬퍼할 기억의 뿌리가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오직 차가운 손익 계산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지워진 기억의 가치는 영(零)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 기계를 돌려 생존하는 것이다.'

그는 냉소적으로 판단했다. 인간의 감정 따위는 마도 공학의 효율적인 도면 한 장보다 가치가 없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이 약육강식의 무림에서, 자신을 지켜줄 것은 오직 완벽한 시스템뿐이다.

제갈휘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녹슨 쇠망치를 쥐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지만, 근력은 형편없었다.

그는 주변을 훑었다. 발끝에 채이는 폐물 쇠못 하나가 보였다.

그는 쇠못을 집어 들었다. 만물성리분개의 안목이 쇠못의 인장 강도와 수차 축의 균열 지점을 정확히 가리켰다.

기어의 맞물림은 두 원의 가상적 접촉인 피치 원(Pitch Circle)의 일치에서 비롯된다. 톱니의 물림 각도가 단 1분이라도 어긋나면 회전력은 축을 비틀고 에너지는 마찰열로 소실된다. 고대의 장인들은 이를 감각으로 맞추려다 실패했고, 결국 기계는 잠겼다.

제갈휘는 찌그러진 축의 중심을 물리적으로 복원하여 마찰 계수를 극소화하는 지점을 찾았다.

바로 저기다.

오른쪽 전동 기어의 세 번째 톱니 아래, 0.3밀리미터의 미세한 틈새.

그는 폐물 쇠못을 그 틈새에 비스듬히 찔러 넣었다.

그리고 쇠망치를 높이 쳐들었다.

* * *

"이 무슨 해괴한 소리란 말이냐?"

수풀을 헤치며 나타난 자들은 제갈세가의 삼류 호위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야간 순찰을 돌던 중, 오랫동안 버려진 폐기 공방에서 흘러나오는 쇳소리를 듣고 다가온 참이었다.

무사들의 선두에 선 자는 장도(長刀)를 허리에 찬 장 한(張漢)이었다. 그는 세가의 서자들을 사냥개 보듯 경멸하는 자였다.

"망나니 공자님이 아니십니까? 이 야삼경에 여기서 무덤을 파고 계셨소?"

장한이 이죽거리며 다가왔다. 그의 뒤를 따르는 세 명의 무사들도 킥킥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제갈휘는 처참했다. 옷은 진흙과 녹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얼굴에는 핏줄기가 말라붙어 있었다. 손에는 해괴한 쇠망치와 못 따위를 들고 거대한 수차 앞에 서 있는 꼴이라니.

"미치려면 곱게 미칠 일이지, 기어이 실성을 하셨군. 그 수력 기재가 어떤 물건인지는 아십니까? 촉중에서 명성이 자자한 야철 장인 셋이 붙어도 고치지 못한 폐물입니다. 가문에서 저걸 고쳐보겠다고 날린 은자만 해도 수백 냥이오."

장한의 말은 사실이었다.

제갈세가의 수력 전 기재는 가문의 재정을 갉아먹는 골칫덩이였다. 물을 끌어올려 공방의 벨트와 풀리를 돌려야 할 주축이 완전히 잠겨버려, 사천당문에서 비싼 값에 암기와 기관 부품을 사다 써야 하는 처지였다.

제갈휘는 그들의 조롱을 듣지 못했다. 아니, 들었으나 뇌 내의 필터가 무가치한 정보로 분류하여 폐기했다.

그의 눈에는 오직 수차 축의 진동 주파수와 쇠못의 궤적만이 보였다.

"시끄럽다."

건조한 어조였다. 감정이 거세된 기계적인 목소리에 장한은 흠칫했다. 늘 서자로서 비굴하게 눈치를 보던 망나니의 태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자식이 어디서 감히……!"

장한이 노성을 지르며 도를 잡으려던 찰나.

캉!

제갈휘의 쇠망치가 힘차게 내리쳐졌다.

가벼운 타격음이 아니었다. 쇳소리가 공방 내부의 높은 천장을 때리며 날카롭게 공명했다.

쇠못은 정확히 구동 기어의 틈새로 파고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못질이 아니었다. 어긋나 있던 기어의 물리적 중심축을 강제로 0.3밀리미터 이동시키는 쐐기였다.

순간, 고요함이 찾아왔다.

장한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미친놈이 쇠못 하나 박는다고 그 거대한 철기(鐵器)가……."

크르르릉.

대지가 미세하게 떨렸다.

아니, 공방 바닥의 돌판이 흔들리고 있었다.

장한의 말이 뚝 끊겼다. 무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거대한 수차의 축으로 향했다.

수년 동안 굳어 있던 주철제 톱니바퀴가 신음하듯 삐걱였다. 붉은 녹 가루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어긋나 있던 기어의 피치 원이 일치하는 순간, 계곡에서 흘러내려 와 수판(水板)에 가득 차 있던 수압의 위치 에너지가 일제히 회전 운동 에너지로 전환되었다.

쿠구구구구!

거대한 굉음과 함께 수차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히 도는 수준이 아니었다. 엄청난 가속도가 붙으며 수차와 연결된 전동 축들이 광포하게 맞물려 돌아갔다. 공방의 천장에 매달린 가죽 벨트들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비명을 질렀다.

콰아아아아!

폐기된 수로의 차단막이 부서지며, 맑고 차가운 급수가 공방의 중앙 수조를 향해 사정없이 뿜어져 나왔다. 자욱한 수안개와 물보라가 공방 내부를 가득 채웠다.

"이, 이게 무슨……!"

장한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거대한 기계 장치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궤적을 그리며 회전하고 있었다.

수백 냥을 들여도 고치지 못해 썩어가던 가문의 신기(神器)가, 단 한 번의 망치질과 고철 쇠못 하나로 완전히 부활한 것이다.

무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들이 아는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은 무공의 영역이 아니었다. 신비로운 주술이나 기관 비전의 영역이었다.

"말도 안 돼……."

장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수차 앞에 정좌하듯 서 있는 제갈휘를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물보라를 맞으면서도, 제갈휘의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극도로 냉정하고, 소름 끼치도록 이성적인 눈빛이었다.

제갈휘는 제 손에 쥔 망치를 내려다보았다.

'회전 효율 94%. 축의 마찰 분포 균등. 임시 가동은 성공적이다.'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이 동력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마도 공학 영지를 구축해야 한다. 가문의 굴레에서 벗어나,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독립적인 기술 요새를 만드는 것이 그의 유일한 갈망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공방의 찌그러진 철문이 거칠게 부서지며 떨어져 나갔다.

쿵!

묵직한 진각(震脚) 소리와 함께, 검은 의복을 입은 무인들이 어둠 속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제갈세가 원로원의 상징인 불타는 톱니바퀴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원로원 집법 집사단(執法執事團)이었다.

그들의 중심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서늘한 안광을 뿜어내는 중년의 무인, 원로원의 핵심 집사 중 한 명인 제갈형(諸葛馨)이었다.

그는 회전하는 수차와 급수를 바라보더니, 이내 제갈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눈에는 탐욕과 살기가 교차하고 있었다.

"서자 제갈휘."

제갈형의 목소리가 젖은 공기를 가르며 차갑게 울렸다.

"가문의 허가 없이 폐기된 기재를 무단으로 가동하고, 원로원의 극비 전례 비전술을 도적질하여 제멋대로 손을 댔다. 이는 가규를 위반한 대죄이자, 가문의 자산을 찬탈하려 한 모반이다."

스릉.

집법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서늘한 쇠 냄새가 공방 안의 물비린내를 압도했다.

"무기를 버리고 포박을 받으라. 거역할 시, 그 자리에서 즉참(卽斬)에 처할 것이다."

수십 자루의 검끝이 제갈휘의 가슴과 목을 겨누었다.

사방이 차단된 폐기 공방, 거대한 수차의 굉음 속에서 사형장으로 끌려가기 직전의 일촉즉발의 대치였다.

세찬 수안개 너머로 검날들이 푸른 광채를 뿜었다.

제갈휘의 눈동자가 느리게 움직였다. 공포는 없었다. 뇌리에는 오직 차가운 수치들만이 명멸했다.

'원로원 집법 무사 여덟 명.' '평균 내공 이십 년 공력.' '정면 대결 시 생존 확률 영(零) 퍼센트.'

그는 망치를 든 손을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시선은 제갈형의 허리춤에 닿았다.

지익.

눈앞에 붉은 균열선이 그어졌다.

[가식(加飾)된 철제 보검: 탄소 함유량 과다] [상부 삼 인치 지점: 미세 균열 존재] [충격 가해 시 파괴 가능성 92%]

만물성리분개의 이능이 적들의 무기마저 해체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서 또 하나의 기억이 지워졌다. 대학 시절 자주 듣던 어떤 노랫가락의 선율이었다. 가슴을 울리던 가사의 한 구절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상관없었다. 생존에 음악 따위는 필요치 않다.

"도적질이라 하셨습니까."

제갈휘의 목소리가 수차 소음을 뚫고 울렸다. 그는 슬그머니 왼발을 뒤로 뺐다. 발끝이 닿은 곳은 급수관의 주 제어 밸브였다.

"이 기재는 가문에서 삼 년 전 공식적으로 폐기 처분한 물건입니다." "닥쳐라! 가문의 기재는 서자가 탐할 수 없다!"

제갈형이 검을 치켜들었다.

제갈휘는 냉소했다.

"대명률(大明律) 호율(戶律) 제삼조를 아십니까." "뭐라?" "버려진 황무지와 폐기된 사유물은 선점한 자가 관청에 신고하여 삼 년간 보수할 시, 그 소유권을 합법적으로 인정받는다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법관의 그것처럼 건조했다.

"가문 가규 제십사조 역시 동일합니다. 폐기된 외곽 공방의 소유권은 자력으로 보수 가동한 자에게 일차적 소유권이 귀속됩니다."

제갈형의 눈썹이 꿈틀했다. 법 조문을 들이밀 줄은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궤변이구나! 이곳은 가문의 영지다!" "영지이나, 이곳은 백골지야(白骨地野)입니다."

제갈휘가 밸브를 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대명 세법상, 백골지야는 세금이 면제되는 유배지이자 폐지입니다. 가문이 이곳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즉시, 지난 삼 년간의 미납 세세를 황실에 납부해야 할 것입니다."

세금. 그 단어에 제갈형의 안색이 굳어졌다.

현재 제갈세가는 가혹한 전세(田稅)로 인해 재정이 파탄 나기 직전이었다. 만약 이 버려진 땅의 소유권을 공식화했다가 황실 세무 관료들의 표적이 된다면 가문은 파멸이다.

"잔머리를 굴리는구나, 서자 놈이."

제갈형의 눈에 독기가 올랐다. 그는 율법의 허점을 찔린 수치심을 살의로 덮으려 했다.

"법은 멀고, 검은 가깝다. 여기서 너를 죽이고 사고사로 위장하면 그만이다." "과연 그렇겠습니까."

제갈휘가 밸브를 완전히 밟아 내렸다.

쿠르릉!

중앙 수조로 향하던 물길이 좁은 노즐관으로 강제 우회되었다.

수압의 급격한 수축과 노즐의 단면적 축소는 베르누이 정리(Bernoulli's theorem)에 의해 유체의 속도를 초음속에 가깝게 끌어올린다. 좁은 관을 통과하는 고압의 수류는 강철조차 절단할 수 있는 물리적 파괴력을 지닌다.

슈우우우욱!

좁은 구리 관 끝에서 뿜어져 나온 고압의 수류가 공기를 찢는 파열음을 냈다. 칼날보다 날카로운 물줄기가 제갈형의 발밑돌을 스쳤다. 단단한 청석 바닥이 두부처럼 깨끗하게 잘려 나갔다.

"이, 이것은……!"

무사들이 경악하며 걸음을 멈췄다. 단 한 걸음만 더 내딛었다면 발목이 잘려 나갔을 터였다.

"한 걸음만 더 움직이십시오."

제갈휘가 제어 레버를 꽉 쥐었다.

"이 파이프의 압력 한계치는 이미 한계를 넘었습니다. 레버를 놓는 순간, 고압의 끓는 물과 수증기가 이 공방 전체를 덮칠 것입니다."

그것은 동귀어진의 선언이었다.

제갈형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눈앞의 서자는 미치광이가 아니었다. 철저히 손익을 계산하고, 목숨을 담보로 판을 흔드는 괴물이었다.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차가운 수안개 속에서, 팽팽하게 당겨진 가죽 벨트가 비명을 질렀다.

그때였다.

쩌적!

수차의 주축과 연결된 주철제 가마의 하부에서 기괴한 균열음이 들렸다. 토법(土法)으로 급조한 압력 용기였다. 불순물이 섞인 한철은 급격한 열팽창을 견디지 못했다.

[압력 보일러 내부 응력: 140% 초과] [폭발 잔여 시간: 10초]

제갈휘의 눈앞에 붉은 경고등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수차를 멈추면 원로원의 검에 죽는다. 수차를 멈추지 않으면 압력 가마가 폭발해 모두가 폭사한다.

제갈형의 눈에 다시금 잔혹한 빛이 감돌았다. 그 역시 가마의 이상 진동을 감지한 것이다.

"기계가 무너지는구나. 네놈의 얕은 재주도 여기까지다!"

제갈형이 검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죽음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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