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화산의 주봉, 연화봉의 바람은 차갑고도 맑다.

그 고고한 봉우리 정상에서, 당신은 손에 쥔 매화검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검신에 맺혀 있던 사도(邪道)들의 검붉은 피는 이미 동터 오는 새벽빛에 말끔히 씻겨 내려간 뒤다. 천하를 오염시키던 사도련의 무리도, 무림의 대의를 팔아 사익을 탐하던 정파의 위선자들도 모두 마땅한 파멸을 맞이했다. 마침내 사필귀정(事必歸正)이며,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준엄한 법도가 강호에 바로 선 것이다.

"사제들아."

당신의 나직한 부름에, 등 뒤에 시립해 있던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인다.

"예, 장문대형!"

화도가 일제히 열리듯, 그들의 대답에는 태산도 움직일 듯한 기상과 당신을 향한 무한한 경의가 깃들어 있다. 멸문의 위기 앞에서 피눈물을 흘리던 어린 사제들은 이제 천하에 일세를 풍미할 고수들로 성장했다. 당신이 완성한 매화검진은 무림맹의 그 어떤 절예보다도 탁월하며, 화산의 검명은 이제 천하 무림인들이 경외심 없이는 입에 담지도 못할 거대한 신화가 되었다.

당신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봉우리 한편에 투박하게 세워진 석묘 앞으로 다가간다. 과거 사파의 침공 속에서 문파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방패가 되어 산화했던 스승, 매화검존의 영전이다.

당신은 품에서 맑은 청주 한 병을 꺼내어 무덤가에 잔잔히 흘려보낸다. 흙속으로 스며드는 술향이 매화의 독특한 향기와 섞여 사방으로 부드럽게 퍼져 나간다.

"사부님."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쳐 오름을 느낀다. 기연을 찾아 천하를 떠돌며 뼈를 깎는 수련을 거듭했던 고독한 밤들, 사도들의 칼날 아래 쓰러져 간 동문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친다. 그러나 그 모든 풍파와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끝에, 당신은 마침내 약조를 지켰다.

"화산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높은 기상으로 천하의 으뜸에 섰나이다."

그 순간, 거세게 불어온 산바람이 화산파의 영토 전체를 뒤흔든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붉은 매화나무 가지들이 일제히 요동치며, 수천수만의 매화꽃잎이 하늘을 가득 메운다. 붉은 꽃비가 허공에서 춤을 추며 당신의 어깨와 검날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는다. 마치 하늘에 계신 스승이 당신의 승전보에 기꺼이 답하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는 듯하다.

눈앞에 펼쳐진 운해(雲海) 속으로, 화산파의 장엄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천하제일문(天下第一門). 이제 그 누구도 화산의 이름을 가벼이 여기지 못할 것이요, 화산의 검이 정하는 서열이 곧 무림의 질서가 되리라.

검을 거두고 우뚝 선 당신의 눈동자에, 천하를 품을 만큼 거대하고도 찬란한 무림의 새로운 여명이 깃들고 있었다. 화산의 전설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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