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당신, 백청우의 발끝이 마침내 화산(華山)의 험준한 봉우리에 닿는다.

과거 매화 향기 가득하여 천하 도가의 정수를 보여주던 곳이건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는 온데간데없다. 사방을 채운 것은 매캐한 연기와 썩어가는 피비린내뿐이다. 무너진 일주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검게 그을린 전각의 잔해와 깨진 기와 조각들이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에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는다.

스승의 유골이 안치되었을 태을봉 기슭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당신을 맞이한 것은 차디찬 돌무덤마저 파헤쳐져 흙바닥에 나뒹구는 참극이다. 사부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는 두 동강이 나 잡초 사이에 버려져 있다.

"흐흐, 화산파 늙은이들의 뼈다귀는 씹는 맛도 없겠군." "이보게, 저 아래 객잔에서 공수해 온 술이나 더 가져오시게나. 화산 놈들을 멸하고 나니 날마다 잔치로군!"

상스러운 웃음소리가 고요한 산길을 더럽힌다. 가슴팍에 검은 독사 문양을 새긴 사파의 삼류 무뢰배들이 스승의 묘역 위에서 방자하게 술판을 벌이고 있다. 안하무인(眼下無人)의 태도로 성지를 유린하는 도적들의 모습에 당신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간다.

기연을 얻기 위해 천하를 떠돌던 고독한 세월, 오직 이 문파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뼈를 깎는 고행을 견뎌왔건만. 마침내 돌아온 고향은 이토록 흔적도 없이 허물어져 있었다.

*스스릉―*

허리께에서 기이한 공명이 울린다. 화산의 진산지보이자 사부의 유품인 매화검(梅花劍)이 주인의 분노를 감지한 듯 떨리는 소리다. 당신의 손가락이 검 자루를 움켜쥔다.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강한 힘이 실린다.

지척에서 무뢰배 하나가 가래침을 뱉으며 쪼개진 묘비를 발로 툭툭 찬다.

바람결이 문득 바뀐다. 당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주위의 낙엽을 일제히 쓸어버린다. 당장이라도 저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무리들의 목을 베어 그 피로 묘역을 씻어내고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 강호 어딘가에 살아남아 전전긍긍하고 있을 사제들의 행방이 머릿속을 스친다. 만약 여기서 섣불리 소란을 피웠다가 사제들의 숨통마저 끊어지게 된다면 사부의 영혼 앞에 무슨 낯을 들겠는가.

정체를 드러내어 무뢰배들을 참살할 것인가, 아니면 은밀히 움직여 생존자부터 찾을 것인가.

당신의 손끝에서 검기가 푸르게 벼려진다. 선택의 순간이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