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 서 있는 것조차 기적에 가까운 몰골이었다.
온몸의 혈관이 터져 붉은 마킹처럼 피를 흘리는 사내.
구속 수사를 받고 있어야 마땅할 아드리안 베르네 교수가 전력 핵의 중심부에서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끝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마력이 고대 유적의 심장과 기괴하게 얽혀 들어갔다.
"결국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구나, 에단 리드."
베르네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여 긁히듯 울렸다.
그가 허공에 손가락을 튕기자, 전력 핵 주위로 불길한 붉은색 마법 문자들이 나비처럼 날아올랐다.
그것은 자폭 주문이었다.
그것도 단순한 폭발이 아닌, 인과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금단의 주문.
"미친 영감탱이가 곱게 감옥이나 갈 것이지, 왜 자폭 버튼을 누르고 난리야!"
펠릭스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미카엘라 역시 검을 뽑아 들었으나, 눈앞의 거대한 마력 폭풍에 본능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 미친 공리주의자 놈은 자신이 구축한 질서가 무너지자 아카데미 전체를 길동무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요란한 경고음이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경고! '아드리안 베르네'가 금단의 인과 자폭 주문을 송신 중입니다!]
[유적 전체의 인과 왜곡도가 임계점을 돌파합니다!]
[소유주의 '마력 오염 변이치'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현재 62%]
"에단! 저 영감탱이 마력이 이상해! 지하 3층이 아니라 이 공간 자체가 통째로 압착되고 있다고!"
미카엘라가 바람을 가르는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가볍게 침을 뱉으며 눈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상태창을 노려보았다.
이 판국에 도망치거나 겁을 먹는 건 고인물의 수치다.
실패에 대한 내 결벽증적인 강박이 뇌를 차갑게 식혔다.
"펠릭스, 돈 준비해라."
"뭐? 이 마당에 무슨 돈 타령이야?!"
"아카데미 지배권을 완전히 공짜로 먹으려고 했냐? 원래 인수합병에는 인수 비용이 드는 법이지."
나는 정밀 공략 위키 상태창의 개변 루트를 빠르게 활성화했다.
베르네의 인과 자폭을 억제하고 이 공간의 제어권을 완전히 찬탈하기 위한 소요 비용이 화면에 떴다.
[인과 개변 소요 비용: 제국 금화 600골드]
600골드라니.
평민 수백 가구가 평생을 먹고살 수 있는 돈을 단번에 태우라는 뜻이다.
아무리 펠릭스의 금고를 털었다지만, 이 정도의 거금을 한 번에 소모하는 건 뼈아픈 타격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이 금융 침탈을 합리적으로 깎아낼 '할인 쿠폰'이 차고 넘쳤다.
첫 번째 카드는 이미 1화에서 스캔해 두었던 체펠린 지하 유적탑 1층의 잔해다.
"위키 상태창, 개변 경로 변경. 1층 제단에 새겨진 고대 문자 리셋 오류를 현 좌표에 동조시킨다."
[시스템 명령 수신 완료.]
['오블리비언 블록(Oblivion Block)'의 구조적 결함을 감지합니다.]
[인과율 연산 오류 발생! 등가교환 요구 수치가 50% 감면됩니다.]
[최종 요구 비용: 제국 금화 300골드]
"나이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고대인들이 남긴 시스템 설계 미스를 이렇게 알뜰하게 우려먹을 수 있다니, 역시 아는 것이 힘이다.
하지만 300골드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나는 품에서 펠릭스가 가문 서고에서 훔쳐 온 두꺼운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펠릭스. 네가 가져온 그 '베르네 교수의 금융 누락 보고서' 말인데."
"그, 그게 왜? 지금 그 영수증 쪼가리가 무슨 소용이라고!"
"이게 단순한 영수증이 아니니까 그렇지."
나는 서류를 전력 핵의 마력 흐름 속으로 던져 넣었다.
동시에 위키 상태창에 고발 보고서의 세금 탈루 정합성 오류 정보를 그대로 주입했다.
"시스템 승인 신청. 현인단이 구축한 '질서의 배전 탑'의 자금 출처 정합성을 재검증한다."
지이이이잉!
붉게 타오르던 전력 핵의 표면이 갑자기 파랗게 얼어붙으며 정지했다.
[특수 판정: 공적 자산 횡령 및 세금 탈루 오류 확인.]
['아드리안 베르네'의 전력 핵 소유 인가 권한이 부정 자산으로 분류됩니다.]
[베르네 교수의 제어 권한이 85% 강제 박탈됩니다!]
"뭐, 뭐라고?!"
베르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구축한 철옹성 같은 법적, 마법적 질서가 한 장의 세무 조사 보고서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펠릭스, 지금이다. 300골드 투척해."
"으아아아! 내 금화들! 내 자식 같은 돈들이!!!"
펠릭스가 눈물을 흘리며 공간 저장 아티팩트를 개방했다.
허공에서 황금빛 금화 수만 개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금화들이 전력 핵의 푸른 불꽃에 닿는 순간, 순수한 마력의 정수로 치환되며 유적 전체를 정화하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베르네가 송신하던 인과 자폭 주문의 붉은 실타래들이 가차 없이 끊어져 나갔다.
"커헉...!"
권한을 박탈당한 충격으로 베르네가 피를 토하며 뒤로 쓰러졌다.
이로써 지하 3층의 지배권은 완벽하게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
하지만 아직 한 마리의 해충이 더 남아 있었다.
"이... 벌레 같은 놈들이어어어어!"
귀를 찢는 비명과 함께, 전력 핵의 우측 통로에서 한 여자가 뛰쳐나왔다.
수석 영애이자 베르네의 충직한 사냥개, 세레나 폰 하르트였다.
그녀는 이미 머리카락이 산발이 된 채, 평소의 고결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미치광이의 몰골이었다.
재능이 곧 신분이라며 밑바닥 낙제생들을 쓰레기 취급하던 그녀가, 지금은 가장 비참한 패배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내가 너 같은 하천한 쓰레기에게 무릎을 꿇을 것 같으냐!"
세레나가 품에서 짙은 보라색의 비약을 꺼내 단숨에 들이켰다.
'테라포밍 엘릭서'.
사용자의 마력 회로를 강제로 확장하는 대가로 영혼을 갉아먹는 최악의 금지된 비약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다 죽여 버리겠어! 전부 다!"
세레나가 미친 듯이 손을 휘두르자, 허공에서 수백 개의 얼음 송곳과 화염 구체가 생성되어 사방으로 난사되기 시작했다.
콰콰콰쾅!
"에단, 위험해!"
미카엘라가 내 앞을 막아서며 대검으로 마법의 파편들을 쳐냈다.
하지만 폭주한 상급 마법사의 무차별 난사는 미카엘라 혼자서 전부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가볍게 실소를 터뜨렸다.
"발악치고는 꽤나 화려하네. 하지만 말했잖아, 세레나. 넌 네 오만함 때문에 망할 거라고."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서 반짝이는 푸른 보석을 응시했다.
치천사의 눈물.
그녀가 세상을 지배하는 가문의 영애로서 가졌던 가장 강력한 수호 아티팩트.
하지만 이미 8화에서 내가 스캔해 둔 그 보석의 내부 정보는 내 머릿속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었다.
"위키 상태창, '치천사의 눈물' 상세 설계도 오픈."
[대상 아티팩트: 치천사의 눈물]
[약점 정보: 내부 0.03도의 미세한 각도 균열 존재. 공명 주파수 440Hz 대 442Hz의 불일치.]
"그 완벽주의자 집안에서 만든 물건치고는 꽤나 허술하단 말이지."
나는 허리춤에서 마력 권총을 뽑아 들었다.
조준할 필요도 없었다.
위키가 제공하는 붉은색 궤적이 이미 세레나의 목걸이를 정확히 관통하고 있었으니까.
"미카엘라, 3초 뒤에 검기를 오른쪽으로 꺾어."
"알았어!"
미카엘라의 묵직한 대검이 허공을 가르며 세레나의 방어막 일부분을 강제로 비틀어 열었다.
그 틈새는 찰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고인물에게는 태평양만큼 넓은 틈이었다.
타앙-!
경쾌한 총성과 함께 주입된 내 마력 탄환이 세레나의 목걸이에 정확히 명중했다.
정확히 주파수 441Hz의 진동을 담은 마력이 아티팩트의 미세한 균열을 파고들었다.
팅-!
맑고 투명한 소리가 지하 3층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파멸의 서곡이었다.
"어...?"
세레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목걸이에 서려 있던 치천사의 가호가 순식간에 역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비약으로 억지로 끌어올린 폭발적인 마력이, 출구를 잃고 아티팩트의 균열을 통해 역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콰아아앙!
"아아아아악!"
세레나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보석에서 뿜어져 나온 파란 마력 불꽃이 그녀의 우측 팔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마력 회로가 정방향이 아닌 역방향으로 꼬이면서, 그녀의 우측 팔 뼈와 근육이 실시간으로 뒤틀리고 까맣게 변해갔다.
"내, 내 팔이! 내 마력이!!!"
세레나가 바닥에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영구 동요 마비.
마법사로서의 생명이 절반은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치명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멸시하고 '벌레'라 부르며 무시하던 내 구두 발끝까지 기어 왔다.
질질 흐르는 피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살려... 살려줘... 에단... 제발..."
"왜 그래? 수석 영애님."
나는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재능이 곧 신분이라며. 그럼 지금의 넌 내 발밑에 기어 다니는 쓰레기 이하의 무언가인가?"
"아, 아으으..."
세레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절망감에 휩싸여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완벽한 추락이었다.
아카데미 수석이라는 오만한 타이틀은 이제 이 지하 유적의 흙먼지 속에 영원히 묻혔다.
"끝났군."
미카엘라가 검을 거두며 혀를 내둘렀다.
펠릭스는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와! 진짜 대박이다! 에단 너는 진짜 악마보다 더한 놈이야! 아주 마음에 들어!"
하지만 나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내 불신증과 강박증은 아직 상황이 완전히 종료되지 않았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스스스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베르네 교수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눈은 이미 초점을 잃고 핏빛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크하하... 크하하하하!"
그가 미친 듯이 웃어댔다.
"에단 리드... 네놈이 이겼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질서가 붕괴하면, 이 아카데미의 낙제생들부터 굶어 죽을 뿐이다!"
"헛소리는 거기까지 해라, 영감탱이."
"아니, 이건 헛소리가 아니다. 전체의 안녕을 위해선 소수의 희생이 필연적인 법! 내가 죽더라도 이 유적의 폭주는 멈추지 않는다!"
베르네가 자신의 심장을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그의 심장 박동에 맞춰, 지하 3층 바닥 전체에 거대한 검은색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력 핵의 자폭 스위치와 그의 영혼을 완전히 결속시키는 최종 소멸 마법진이었다.
그리고 내 상태창에 최악의 붉은색 경고가 점멸하기 시작했다.
[!돌발 상황!]
[적대 대상 '아드리안 베르네'가 자신의 마력 오염 변이도를 소유주에게 강제 이전하는 유착 주문을 발동합니다!]
[변이치 유착율 상승 중...!]
[현재 마력 오염 변이치: 78%... 85%... 91%...]
"이 미친 영감이 물귀신 작전을 쓰네?!"
내 눈동자가 점차 검붉은 마기에 물들기 시작했다.
변이치가 100%에 도달하는 순간, 나는 이 세계의 시스템에 의해 '보스 몬스터'로 판정되어 즉사급 처단을 받게 된다.
"에단! 얼굴색이 이상해! 너 몸에서 검은 연기가 나고 있어!"
미카엘라가 다급하게 내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길조차 거대한 마력의 장벽에 막혀 튕겨 나갔다.
베르네는 피를 토하며 나를 보고 비웃고 있었다.
"같이 가자, 에단 리드! 네놈이 그토록 원하던 파멸의 심연으로!"
[마력 오염 변이치: 96%]
[97%]
[98%]
눈앞의 시야가 붉게 깜빡이며, 내 영혼을 집어삼키려는 세계의 억지력이 작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