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콧구멍을 찌르는 건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정체불명의 시큼한 쇠비린내.
이 익숙하고도 좆같음이 가득한 감각은 도대체 뭘까.
“……아니, 진짜로?”
나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손바닥에 닿는 건 차갑다 못해 살을 에는 듯한 돌바닥이었다.
눈앞에는 다 무너져 가는 회색빛 석조 천장과, 그 틈새로 질질 흘러내리는 보랏빛 마력 찌꺼기가 보였다.
그리고 내 시야 한가운데에 둥둥 떠 있는 투명한 홀로그램 창.
[경고: 영혼 동기화율 99.9% 완료.] [플레이어 ‘에단 리드’가 세계선 D-0 지점에 안착했습니다.] [고유 특성: ‘정밀 공략 위키’가 활성화됩니다.]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터졌다.
로얄 판테온 아카데미.
수천 번을 플레이하고, 결국 세계 랭킹 1위라는 타이틀을 달았음에도 끝내 멸망을 막지 못해 폭사했던 그 악마 같은 게임.
그중에서도 가장 쓸모없고 비참한 엔딩만을 수집하던 최악의 쓰레기 캐릭터.
‘에단 리드’의 몸뚱이에 빙의한 것이다.
그것도 낙제생이라는 낙인이 찍혀 지하 슬럼가 골방으로 쫓겨난 바로 그 시점에.
“하필 회귀를 해도 이 타이밍이냐고, 양심 터진 시스템 놈들아.”
나는 헝클어진 흑발을 쓸어 넘기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머릿속에서 에단 리드가 가졌던 원래의 기억들이 해일처럼 밀려들어 왔다.
이 세계의 지배 계급이자 ‘질서 결벽증’에 미쳐 버린 최고 엘리트 교수단, ‘현인단’.
그들이 만든 초법적 규칙인 ‘낙제자 가혹 패널티 법안’에 의해, 성적 하위 90%인 낙제생들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다.
지하 슬럼가에 처박혀 유적의 마력 배터리로 갈려 나가거나, 더러운 노역을 하다 소모품처럼 죽어가는 운명.
내 성격상 그런 개죽음은 용납할 수 없다.
실패에 대한 극심한 결벽적 강박증.
그것이 전생부터 나를 세계 1위로 만들었던 원동력이자, 나를 갉아먹는 광기였다.
완벽한 통제.
모든 변수의 사전 차단.
그것만이 이 썩어 빠진 아카데미에서 내가 완벽한 해피엔딩을 쟁취하고 군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터벅, 터벅.
멀리서 골목길을 울리는 규칙적이고 무거운 군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내 귓가를 때리는 붉은색 경고 마크.
[돌발 퀘스트: 세레나의 징집대를 회피하라!] - 난이도: C - 개요: 아카데미 수석이자 베르네 교수의 사냥개인 ‘세레나 폰 하르트’가 파견한 낙제자 강제 징집대가 당신의 임시 처소를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 실패 시: 마력 추출 시설로 강제 압송 (사망률 98%)
“오자마자 튜토리얼도 없이 실전이라 이거지.”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상대가 세레나의 징집대라면, 분명 ‘마력 잔류 추적 룬’을 사용해 내 위치를 샅샅이 훑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힘으로 맞서 싸운다?
현재 내 마력 수치는 일반인보다 조금 나은 수준. 정면 돌파는 자살 행위다.
하지만 내게는 이 망겜을 수천 번 플레이하며 뇌리에 새겨진 고인물만의 무기가 있었다.
스릉.
나는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위키 오픈.”
팟!
눈앞에 수많은 텍스트가 픽셀 아트로 화려하게 깨지며 정밀한 정보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정밀 공략 위키 - 체펠린 지하 유적탑 1층 구역] ▶ 현재 위치: 슬럼가 외곽 3번 통로. ▶ 징집대 이동 경로: 북서쪽 진입로를 통해 15초 뒤 도달 예정. ▶ 기믹 분석: 우측 벽면 하단에 200년 전 방치된 ‘하수 마력 밸브’ 존재. 해당 밸브를 개방할 시 역류하는 마력 오염수가 공기 중의 마력 밀도를 400% 급증시킴. ▶ 공략법: 추적 룬의 주파수를 교란해 역으로 과부하 폭발을 일으킬 것.
“그렇지. 이 맛에 고인물 짓 하는 거지.”
나는 망설임 없이 우측 벽 구석으로 몸을 날렸다.
먼지와 이끼로 뒤덮인 낡은 청동 밸브가 보였다. 녹이 슬어 꼼짝도 하지 않는 상태였다.
평범한 마법사라면 여기서 절망했겠지만, 고인물에게 이 정도는 껌이다.
나는 품바지 주머니에서 굴러다니던 녹슨 단검을 꺼내 밸브의 세 번째 결속 나사 홈에 정확히 찔러 넣었다.
지렛대의 원리와 위키가 알려준 정확한 약점 타격.
콰드득!
끼이이이익—!
가늘고 신경질적인 소음과 함께 밸브가 시계 방향으로 돌아갔다.
동시에 밸브 틈새로 시커믓고 끈적한 보랏빛 액체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슬럼가 하수도에 고여 있던 고농도의 마력 오염수였다.
공기 중으로 지독한 악취와 함께 마력 노이즈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퍼져 나갔다.
바로 그때였다.
쾅!
골방의 낡은 나무문이 난폭하게 부서지며, 가슴에 푸른 사자 문장을 새긴 갑옷을 입은 법사 병사 세 명이 들이닥쳤다.
세레나의 직속 징집대였다.
“에단 리드! 낙제자 입영 영장을 거부하고 도주하려 한 죄, 즉시 구속한…….”
선두에 선 징집대장이 외치며 품에서 붉게 빛나는 추적용 마도구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의 대사는 끝을 맺지 못했다.
징집대장의 손에 들린 마도구가 사방에 가득 찬 고농도 마력 오염수와 접촉하는 순간.
삐이이이이이—!
귀를 찢는 듯한 이명이 골방 안을 가득 채웠다.
“어, 어?! 마도구가 왜 이래?! 마력 역류다! 모두 피해—!”
“늦었어, 이 멍청이들아.”
나는 차가운 냉소를 지으며 이미 골방 구석의 환기구 틈새로 몸을 반쯤 밀어 넣은 상태였다.
퍼어어어엉—!
눈부신 청색광과 함께 추적 마도구가 수류탄처럼 폭발했다.
징집대원들은 자신들이 준비한 마법의 반동을 고스란히 처맞고 뒤로 나자빠졌다.
사방으로 비명이 터져 나오고, 그들이 두르고 있던 세련된 마법 장벽들이 마력 노이즈에 쓸려 유리창 깨지듯 박살 났다.
[돌발 퀘스트 성공!] - 무력 사용 없이 기믹 활용으로 적을 무력화했습니다. - 보상: 마력 오염 변이치 0.5% 감소. - 현재 마력 오염 변이치: 12.5%
“휴, 턱걸이였네.”
나는 환기구를 기어 나와 지하 유적탑 1층 통로로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바닥을 구르며 낙법을 취한 뒤,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단 한 방의 마법도 쓰지 않고, 오직 환경 기믹만으로 아카데미의 정예 징집대를 바보로 만들었다.
이 통쾌한 감각은 몇 번을 느껴도 질리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실패는 곧 파멸이니까.
내 불신증과 강박증은 이미 다음 단계를 설계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밑천을 벌어야겠는데.”
이 빌어먹을 ‘정밀 공략 위키’는 사기적인 권능을 주는 대신, 사용할 때마다 내 영혼을 잠식하는 ‘마력 오염 변이치’를 쌓이게 만든다.
이 수치가 100%가 되면 나는 이 세계의 억지력에 의해 ‘최종 보스 몬스터’로 지정되어 전 대륙의 타깃이 된다.
이걸 막으려면 금화가 필요하다.
그것도 엄청난 양의 제국 금화가.
시스템은 오직 차갑고 무거운 골드만을 등가교환의 제물로 받아들이니까.
나는 어두컴컴한 지하 유적 1층의 통로를 따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벽면에는 고대인들이 새겨놓은 기괴한 마법 문양들이 스스로 빛을 발하며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한참을 걷던 내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유적 1층의 한구석, 반쯤 붕괴되어 무너진 돌무더기 사이에 기묘한 제단 하나가 방치되어 있었다.
그 제단의 상단에는 붉은색으로 명멸하는 고대 문자 유물 블록이 박혀 있었다.
나는 흠칫 놀라며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이건…….”
내 눈앞에 다시 한번 위키의 정밀 분석 텍스트가 떠올랐다.
[시스템 감지: ‘오블리비언 블록’ 확인.] - 분류: 인과 왜곡의 잔재 (고대 리셋 오류) - 상태: 미활성화 및 붕괴 상태. - 설명: 고대 신들이 차원을 조율할 때 발생한 데이터 정합성 오류 블록입니다. 특정 조건 만족 시 시스템의 등가교환 법칙을 일시적으로 왜곡할 수 있습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이건 게임 개발자조차 수정하지 못하고 방치해 두었던, 말 그대로 ‘시스템의 구멍’이었다.
이 문자 블록의 기믹을 제대로 활용한다면, 나중에 위키를 개변할 때 들어가는 등가교환 비용을 문자 그대로 반 토막 낼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단검 끝으로 제단 벽면의 특정 궤적을 따라 선을 그었다.
스으으으윽.
내 손끝을 타고 기묘한 파동이 전해졌다.
[인과율 루트 선행 기록 완료.] - ‘오블리비언 블록’의 위치와 공명 주파수가 플레이어의 상태창에 저장되었습니다. - 향후 고대 유물 개변 시 페널티 경감 효과를 적용받을 수 있습니다.
“좋아, 훌륭한 보험이 생겼군.”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제단의 위치를 머릿속에 완벽히 각인시켰다.
철저한 준비만이 나를 승리로 이끈다. 나는 어떤 작은 변수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때, 저 멀리 어둠 너머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지하 슬럼가의 또 다른 구역.
낙제생들이 모여서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하는 임시 아지트 같은 광장이었다.
내가 통로를 빠져나오자, 꾀죄죄한 옷을 입고 구걸을 하거나 쓰레기 더미를 뒤지던 낙제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그들의 눈빛에는 절망과 독기, 그리고 나를 향한 노골적인 비웃음이 가득했다.
“어이, 저기 봐라. 아카데미의 위대한 ‘리드 가문’의 수치께서 오셨네?”
한 덩치 하는 낙제생 녀석이 침을 뱉으며 걸어 나왔다.
그의 이름은 루카스. 아카데미에서 쫓겨나기 전부터 나를 보면 으르렁거리던 삼류 양아치였다.
“에단, 너 방금 징집대 놈들이 니 골방 들이닥치는 거 못 봤냐? 운 좋게 쥐새끼처럼 도망친 모양인데, 어차피 다음 분기에는 네놈 장기까지 마력 배터리로 팔려 갈 거다.”
“맞아, 주제도 모르고 아카데미 지상에 미련을 못 버리더니 꼴좋다!”
주변의 다른 낙제생들도 낄낄거리며 동조했다.
자신들이 바닥으로 떨어졌으니, 나 역시 똑같이 바닥에서 굴러 비참하게 죽기를 바라는 추악한 동조 심리.
그들은 내게서 공포나 절망의 빛을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 차가운 안광에, 비웃던 낙제생들의 목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잦아들었다.
“루카스.”
내가 나직하게 이름을 부르자, 녀석이 흠칫 놀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뭘 봐? 꼽냐?”
“착각하지 마라.”
나는 루카스의 코앞까지 다가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내 목소리에는 어떠한 분노도, 흥분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저 냉혹한 사실만을 전달하는 절대적인 확신이 담겨 있었다.
“너희는 이곳이 무덤이라 생각해서 기어 다니는 모양인데.”
나는 슬럼가 사방을 둘러보며 가볍게 턱짓을 했다.
“나한테 이곳은 내 완벽한 영지를 세우기 위한 첫 번째 기초 공사 현장일 뿐이야.”
“하! 미친 소릴…….”
“그리고 조만간.”
나는 루카스의 어깨를 툭툭 치며 지나쳤다.
“너희는 내 밑에서 빵 부스러기라도 얻어먹기 위해 기어야 하는 날이 올 거다. 그 귀찮은 징집대 놈들의 목줄을 쥐고 흔드는 게 누구인지, 똑똑히 보게 될 테니까.”
그 오만하고도 거침없는 선언에 광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낙제생들은 멍하니 나를 바라볼 뿐,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 서린 것은 이제 비웃음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압도감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슬럼가 구석에 있는 내 진짜 은신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지배 구도의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펠릭스를 만나 자금을 확보하고, 세레나의 콧대를 꺾어버릴 차례였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내 설계대로만 흘러가 준다면, 이 게임이 악마라 불리지도 않았을 터.
쿠구구구구—!
갑자기 발밑의 대지가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뭐지? 지진인가?”
동시에 은신처로 향하는 골목길의 낡은 철문들이 기괴한 마찰음을 내며 비틀렸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붉은색 광폭화 안광이 수십 개, 아니 수백 개가 동시에 켜지는 것이 보였다.
크르르르르…….
지독한 침 흘리는 소리와 함께, 지하 유적 깊은 곳에서만 서식해야 할 폭주한 마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카데미가 유적 통제를 위해 풀어놓은, 그리고 낙제생들을 사냥하기 위해 훈련된 위험한 ‘유적 사역견’ 떼였다.
쿵! 쾅!
골방의 문과 벽이 무참하게 부서져 나갔다.
사방을 포위한 사역견들의 시뻘건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향해 고정되었다.
가장 거대한 사역견 한 마리가 침을 질질 흘리며, 내 발목을 물어뜯기 위해 번개처럼 도약했다.
이빨끝에 서린 맹독의 기운이 살갗을 아리게 찔러왔다.
“쯧, 벌써부터 억지력이 작동하는 건가?”
나는 단검을 고쳐 쥐며, 위키의 푸른 창을 다시 한번 허공에 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