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세트장 조명 아래, 눈이 시릴 정도로 붉은 가짜 피가 모조 라텍스 장기 위에 흥건하다. 당신, 윤세아의 시선이 카메라 렌즈 바로 너머, 메인 모니터를 주시하는 연출자 오필승 감독의 날카로운 눈매에 닿는다.

이곳은 방송국 일산 제작센터, 가상 의학 드라마 <골든 아워>의 수술실 세트다. 공기 중에는 먼지와 탄화 소작기에서 나는 특유의 플라스틱 탄내가 뒤섞여 있다. 실제 수술실의 무균 상태와는 거리가 멀지만, 공기의 압박감만큼은 대학병원 3층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대역, 손 모델 들어와!"

FD의 날카로운 고함과 동시에 당신은 수술 포가 덮인 테이블 앞으로 걸어 나간다. 당신이 맡은 대역은 주연 배우의 '손'이다. 탑배우의 화려한 얼굴 뒤에서, 실제 메스를 쥐고 정교한 실핏줄을 꿰매야 하는 진짜 서전의 액션. 태산대학병원 고위층의 유령 수술 및 불법 임상시험 리베이트 장부를 확보하기 위해, 드라마 제작 지원을 맡은 그들의 안마당으로 잠입한 지 사흘째다.

오늘 찍을 장면은 급성 대동맥 박리(Aortic Dissection Type A) 환자의 상행 대동맥 인조혈관 치환술.

"거기 대역 씨, 대충 바늘만 쥐고 폼 잡으면 돼요. 카메라는 타잉(Tying)하는 손가락만 타이트하게 딸 겁니다. 어차피 시청자들은 디테일 몰라요."

구석에서 팔짱을 낀 채 하품을 하던 의학 자문이자 태산대병원 흉부외과 펠로우, 강현민이 냉소적인 목소리로 뱉어낸다. 그는 당신이 3년 전 태산대에서 집도했던 수술들을 어깨 너머로 훔쳐보던 아랫연배다. 물론 지금 당신은 깊게 눌러쓴 수술 모자와 마스크, 보안경으로 얼굴을 완벽히 가린 무명의 대역 액터일 뿐이다.

"이 시나리오, 오류가 있습니다."

당신의 나직한 목소리가 마스크를 뚫고 흘러나오자 현장의 소음이 일시에 멈춘다. 오 감독이 눈썹을 찌푸린다.

"오류라니? 대본에 문제 있어요?"

"대동맥 궁(Aortic Arch)에서 브랜치(분지)되는 무명동맥과 좌총경동맥을 확보하지 않은 채 커팅을 들어갔습니다. 이대로 메스를 대면 뇌로 가는 혈류가 차단되어 테이블 데스(Table Death)입니다.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프록시멀(근위부) 클램프의 위치가 완전히 잘못 지정되어 있습니다. 지침기를 쥔 손의 동선도 꼬일 수밖에 없고요."

강현민의 얼굴이 단숨에 붉으락푸르락해진다. 그는 촬영 현장에 대충 도장만 찍고 자문료를 챙기려던 참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대역 주제에 감히 대본 분석을 해? 내가 태산대 흉부외과 펠로우야! 감히 어디서 야매로 배운 지식을 갖고 훈수야?"

"야매인지 아닌지는 보면 아시겠죠. Castroviejo needle holder(미세 지침기)를 쥔 강 선생 손가락 떨림각을 보니, 평소에 어시스트 들어갈 때 소절개 문합(Micro-anastomosis) 연습은커녕 매듭 하나 제대로 못 메었을 텐데요."

상대의 치부를 정확히 꿰뚫는 당신의 칼날 같은 지적에 강현민이 숨을 들이켠다.

"너, 너 정체가 뭐야?"

"슛 들어갑니다! 모두 크랭크 인!"

오 감독의 독촉에 현장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지브 크레인이 머리 위로 하강하고, 초고해상도 RED 카메라는 당신의 열 손가락을 정면으로 포착한다.

습기가 차오르는 수술 장갑 내부. 세아, 당신의 손끝에 미세한 진동이 느껴진다. 심장이 갈비뼈를 터뜨릴 듯 쿵쾅거린다. 마스크 너머로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숨소리가 새어 나오지만, 눈동자만큼은 사냥을 앞둔 맹수처럼 차갑게 가라앉는다.

진짜 수술도 아닌 한낱 세트장의 가짜 피와 라텍스 조각. 하지만 이 손놀림 하나에 당신이 이곳에 잠입한 목적, 그리고 저 가짜 박사 학위를 달고 있는 카르텔들의 명줄이 걸려 있다.

"레디…… 고!"

붉은 녹화 표시등이 켜지는 순간, 당신의 오른손이 카스트로비에호 지침기를 낚아챈다. 7-0 프로린(Prolene) 실이 조명빛을 받아 푸르게 번뜩인다. 이 연출을 완벽하게 성공시켜 현장의 의학 카르텔을 그 자리에서 굴복시킬 것인가, 아니면 이 소란을 틈타 장부를 쥐고 있는 병원 이사진들의 뒤를 캐러 갈 것인가.

당신의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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