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순식간에 납빛으로 내려앉더니, 숲 전체가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듯 요란하게 출렁이기 시작합니다. 차가운 빗방울이 사정없이 뺨을 때리는 혹독한 폭풍우 속에서, 당신의 발치로 아주 작고 가녀린 움직임이 전해집니다. 대피할 곳을 찾지 못해 흙바람을 뒤집어쓴 아기 여우 세 마리가 서로의 꼬리를 맞대고 사시나무 떨듯 몸을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 머리맡에는 젖은 깃털을 가늘게 파르르 떨며 한쪽 날개를 힘없이 늘어뜨린 청홍색 작은 새 한 마리가 지친 눈으로 당신을 올려다봅니다.
세차게 휘몰아치는 바람은 지독하리만치 차갑지만, 당신의 등 뒤로 몰려든 생명들의 숨결은 애처로울 정도로 뜨겁고 연약합니다. —이 여린 것들을 이 차갑고 습한 어둠 속에 결코 홀로 버려둘 수는 없어.— 당신은 젖은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녀석들을 부드럽게 감싸 안습니다. 당신의 품이 선사하는 아늑한 온기에 아기 여우들은 이마를 옷자락에 비벼대며 안도의 신음을 흘립니다. 하지만 이 매서운 서리바람을 맨몸으로 버텨내며 아틀리에까지 아이들을 안전하게 수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당장 녀석들을 얼어붙는 빗줄기로부터 격리하고 따뜻하게 보호해 줄 마법의 방편이 시급합니다.
당신의 손끝이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주머니 속 조각칼에 닿는 순간, 차갑게 식어 가던 손가락 끝에서부터 뭉근한 아지랑이 같은 온기가 피어오릅니다. 조각칼에 새겨진 마법의 문양이 밤하늘의 작은 등대처럼 은은한 호박색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주변의 아름드리나무들이 마치 당신을 격려하듯 부드러운 편백나무 향을 사방으로 풍기며 폭풍우의 비린 냄새를 걷어냅니다.
숨 가쁘게 울부짖는 바람 소리 너머로 숲의 영혼들이 당신의 마음에 부드러운 파동을 보냅니다. 이 혹독한 대자연의 위협으로부터 아이들을 무사히 구출해 내려면, 나무에 잠든 아늑하고 단단한 힘을 깨워내야만 합니다. 당신은 폭풍우가 몰고 오는 거센 바람을 역이용해 허공으로 떠오를 가마의 바퀴를 조각해 낼 것인지, 아니면 대지의 굳건한 기운을 빌려와 이 자리에 거센 풍파를 모두 막아줄 안락한 임시 거처를 즉석에서 세어 올릴 것인지 깊은 고민에 빠져듭니다.
새끼 여우 한 마리가 젖은 앞발로 당신의 손가락을 간절하게 꼭 쥐어 옵니다. 당신은 조각칼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거세게 몰아치는 빗줄기 너머로 결연한 시선을 던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