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만이 흐르던 할아버지의 목공 아틀리에. 문을 열고 한 걸음 내딛자 오래 묵은 호두나무의 마른 향과 뽀얀 먼지가 당신의 어깨 위로 포근하게 내려앉습니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을 딛고 안으로 들어서면, 유리창 너머로 스며드는 저녁노을이 노란 살구빛으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수년간 주인을 잃고 멈춰 있던 조각칼과 톱들은 여전히 그리운 할아버지의 손길을 기다리듯 다정하게 정렬되어 있습니다.
그 따스하고 정겨운 공기 사이로, 이질적인 차가운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옵니다.
당신은 조심스레 아틀리에의 구석, 어둠이 짙게 가라앉은 가구 틈새로 시선을 옮깁니다. 그곳에는 믿을 수 없는 존재가 웅크리고 있습니다. 시린 밤하늘을 조각내어 빚은 듯, 신비로운 짙푸른 빛을 아스라이 뿜어내는 가녀린 여우 한 마리입니다. 여우의 하얀 앞발은 깊게 베여 붉은 피 대신 은 빛깔의 영롱한 액체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상처가 꽤 깊은지 녀석의 자그마한 몸이 연신 파르르 떨립니다.
—아아, 얼마나 아팠을까. 이 작고 외로운 생명이 어째서 이런 곳까지 흘러 들어왔을까.—
여우는 당신의 인기척에 깜짝 놀라 은화처럼 둥근 눈망울로 세차게 경계의 빛을 보냅니다. 하지만 두려움에 젖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는 그저 애처로운 울음소리에 가깝습니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괴로워하는 여우를 바라보는 당신의 가슴이 저릿하게 조여옵니다. 한 걸음만 더 다가가도 겁을 먹고 도망치거나 상처가 덧날 것만 같아 선뜻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바로 그 순간,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던 아틀리에 서랍장에서 스르륵 온기가 배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분신처럼 아끼시며 매일 무언가를 적으시던 오래된 가죽 일기장입니다. 일기장의 빛바랜 쪽매붙임 표지가 마치 당신을 부르듯 은은하게 황금빛으로 반짝입니다.
시린 푸른빛을 흘리며 떨고 있는 불쌍한 여우와, 기적처럼 따스한 빛을 내뿜는 할아버지의 일기장. 이 기묘한 조화 속에서 당신은 서서히 마른침을 삼키며 손을 뻗을 준비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