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민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자폭 장치의 수동 복구 전선에 닿기 직전, 이중 잠금장치의 금속음이 지하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철컥.
그것은 백설민이 설계한 음향 계통의 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의자 등받이와 바닥 타일 경계선에서 솟아오른 락 실린더 세 개가 그의 상체를 뒤로 강하게 밀착시키며 고정했다.
"이건..."
백설민의 목소리에서 우아한 저음이 증발했다. 그의 눈동자가 아래로 꺾이며 자신의 등 뒤를 향했다. 은색으로 도금된 실린더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진 한강우의 왼쪽 귀에서는 검붉은 혈액이 간헐적으로 뿜어져 나와 회색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그의 안구는 완전히 위로 뒤집힌 상태였다. 대뇌 피질의 과부하로 인한 정확히 12분간의 기억 상실과 인지 셧다운이 시작된 상태였다.
백설민은 가슴에 심어진 압력 연동 기폭 유닛의 LED 표시등을 보았다. 초록색 불빛이 붉은색으로 점멸하기 시작했다. 한강우가 입력한 87도의 역공식 주파수가 무선망을 타고 기폭 장치의 수신부를 교란하고 있었다.
"강우야! 눈 떠! 이 코드를 풀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백설민의 절규가 방음벽에 부딪혀 둔탁하게 꺾였다.
지하실 입구의 철제 셔터를 거세게 두드리는 충격음이 진동으로 전해졌다. 지형섭 형사의 도끼날이 철문을 가르는 소리였다. 남은 시간은 10분이었다.
그 순간, 한강우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미세한 기계음이 발생했다. 미리 동기화해 둔 AI 복제 음성 장치였다. 유선 인터폰 스피커를 통해 한강우의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지 팀장님, 안쪽의 증거 보존 작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5분만 대기하십시오. 문을 파손할 시 현장 훼손으로 기소 사유가 됩니다.]
문 너머의 도끼질이 잠시 멈췄다. 거친 욕설과 함께 지형섭의 발소리가 뒤로 물러섰다. 복제된 음성은 정확히 한강우의 성대 주파수를 모사하여 외부의 침입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회색 에폭시 바닥에 고여 있던 혈흔의 가장자리가 갈색으로 굳어갈 무렵, 한강우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초점을 잃었던 동공이 천장의 백색 LED 조명을 받아들이며 빠르게 수축했다.
정확히 12분이 경과했다.
한강우는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왼쪽 귀에서 흐른 피가 턱선을 따라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뇌의 셧다운이 풀리며 극심한 고열과 두통이 관자놀이를 압박했다.
그의 시야 왼편에 가슴이 함몰된 민태경의 환각이 서 있었다. 환각의 형상은 손가락으로 백설민의 심장 부위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한강우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가죽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그의 손끝은 여전히 일정한 박자로 책상 위를 두드리고 있었다. 탁, 탁, 탁.
"깨어났군."
백설민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풀어라. 지형섭이 들어오면 우리 둘 다 파멸이다."
한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윤세희 검사에게 받은 민태경의 유품 수첩을 꺼내 테이블 중앙에 놓았다. 수첩 옆에는 푸른색 마그네틱 키카드가 나란히 배치되었다.
"푸른 거울 요양원 302호 사물함에서 발견된 카드다."
한강우의 목소리는 차가운 기계와 같았다.
"너는 수칙 제1조를 통해 슬리퍼를 신지 않은 환자가 천장을 보지 못하게 했다. 바닥의 냉기 자극으로 고개를 들게 해 천장의 낚싯바늘에 안구가 꿰뚫리도록 설계했지."
백설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건 이미 지나간 유희다."
"아니, 핵심은 그 구역 전체가 거울에 의해 좌우 반전된 구조였다는 점이다. 실재하지 않는 301호의 반사 공간이 바로 302호였다."
한강우는 푸른 키카드를 손끝으로 튕겼다.
"이 카드를 302호 문에 꽂지 말라는 규칙을 세운 이유는 단순하다. 가상의 공간에 물리적 열쇠를 대입하는 순간, 거울의 대칭 대역폭이 붕괴하여 너의 공간 설계적 모순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백설민은 침묵했다. 그의 시선은 한강우가 들고 있는 민태경의 수첩 뒷면으로 향했다.
"민태경의 수첩에는 네가 만든 붉은 기하학의 불완전한 대칭 도형 설계도가 그려져 있었다."
한강우는 수첩의 찢어진 단면을 백설민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너는 완벽한 대칭을 추구하는 병적인 강박을 가졌지만, 네 가슴의 기폭 장치와 무선 수신부의 위치는 인간의 해부학적 구조상 완벽한 대칭을 이룰 수 없다. 민태경은 죽기 직전 14분 22초 동안 그 비대칭의 틈새를 계산해 역공식을 완성했다."
"그 수식은 무의미하다. 기폭 장치의 마스터 코드는 내 심박수와 연동되어 있다."
"과연 그럴까."
한강우는 주머니에서 검붉은 피가 엉겨 붙은 붉은 기하학 주화를 꺼내 들었다. 6화에서 백설민이 대가로 주고 간 물건이었다.
"이 주화의 표면을 분석했다. 묻어 있는 혈액은 요양원 피해자의 것이 아니다. 타인의 사체에서 추출한 혈액을 인위적으로 조작해 응고시킨 허위 물증이다."
백설민의 눈동자가 좌우로 거칠게 흔들렸다.
"그게 이 상황과 무슨 상관이지?"
"상관이 있다. 아주 합법적인 상관관계가."
한강우는 아페이론의 백색 벽면에 부착되어 있던 계약서 보관함을 열었다. 그가 꺼낸 것은 백설민이 최초의 거래 당시 직접 서명했던 '아페이론 비밀유지 계약서' 원본이었다.
"계약서 제7조 바항을 읊어주지."
한강우의 손가락이 계약서의 특정 인쇄 문구를 짚었다.
"'의뢰인이 허위의 물증을 제출하여 감정을 기만할 시, 감정인은 의뢰인의 신체적 표식을 즉시 임시 보존 처리할 수 있다.'"
백설민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단순한 민사적 면책 조항에 불과하다. 법적 구속력도 없는 문구로 뭘 하겠다는 건가?"
"아페이론의 공간 안에서 법의 기준을 정하는 것은 나다."
한강우가 책상 아래의 붉은색 레버를 당겼다.
우웅 하는 중저음의 모터 소리가 테이블 내부에서 흘러나왔다. 백설민이 올려놓았던 두 손목의 양옆으로, 철제 상판의 일부가 좌우로 갈라졌다.
"무슨..."
백설민이 손을 떼려 했으나, 등 뒤의 락 실린더가 그의 어깨를 강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갈라진 상판 틈새로 두꺼운 합금 재질의 반원형 클램프가 솟아올랐다. 클램프는 백설민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며 아래쪽의 특수 합금 실린더 내부로 거칠게 끌어내렸다.
철컥! 쾅!
백설민의 양 손목이 테이블 상판 밑바닥의 실린더 안으로 완전히 매립되었다. 그의 손가락 끝만이 겨우 테이블 표면에 닿을 정도로 깊게 고정되었다.
"이것 놓아라! 강우야!"
백설민이 비명을 지르며 상체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특수 합금으로 제작된 고정 장치는 1톤의 인장 강도를 견디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의 마른 손목 뼈가 금속 벽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낼 뿐이었다.
한강우는 테이블 너머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의 입꼬리가 비정상적인 각도로 말려 올라갔다. 비열하고도 완전히 건조한 미소였다.
"넌 처음부터 네가 서명한 규칙에 묶여 소모될 가축이었을 뿐이다."
"미친 새끼..."
백설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의 호흡이 가빠지며 가슴의 센서가 붉은빛을 더 빠르게 내뿜었다.
"내 심박수가 임계치를 넘으면 이 건물의 지하실 전체가 날아간다. 너도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해!"
"그 임계치 전송 경로를 차단하는 것이 민태경의 역공식이다."
한강우는 주머니에서 투명한 약물이 담긴 하이포더믹 주사기를 꺼냈다. 주사기 바늘 끝에 맺힌 투명한 액체가 백색 조명 아래서 차갑게 빛났다.
그는 주사기를 백설민의 왼쪽 가슴막, 수신기 센서가 매립된 피부 바로 위로 가져갔다.
"이 주사기는 네 신경 전달 물질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차단제다. 센서 표면에 주입하는 순간, 네 심박수의 전기 신호는 컨트롤러로 전달되지 않고 다른 주파수 궤도로 침로가 틀어지게 된다."
"하지 마... 그것만큼은 안 된다!"
백설민이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그의 손목 피부가 합금 실린더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쓸려 붉은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문 너머에서 다시 한번 육중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지형섭의 도끼가 마침내 철제 셔터의 힌지를 파괴하는 소리였다. 금속 찌그러지는 비명이 복도를 메웠다.
한강우는 흔들림 없는 손길로 주사기 바늘을 백설민의 가슴 피부 깊숙이 찔러 넣었다. 피스톤이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밀려 들어갔다.
백설민의 동공이 최대로 확장되며 그의 상체가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가 신뢰했던 완벽한 기하학의 세계가, 자신이 서명한 한 장의 계약서 조항에 의해 완전히 해체되는 순간이었다.
주사기 바늘이 뽑혔다. 백설민의 왼쪽 가슴에서 노란색 체액과 혈흔이 섞여 흘러내렸다. 기폭 장치의 LED 액정이 빠르게 깜빡였다. 초록색에서 적색으로, 다시 청색으로 변했다. 수신부의 주파수 대역이 완전히 이탈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럴 순 없어..."
백설민의 고개가 아래로 꺾였다. 그의 두 눈에 가득 차 있던 오만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손목을 묶은 합금 실린더가 그의 미세한 떨림을 고스란히 테이블로 전달했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진동음이 지하실 바닥을 타고 한강우의 발끝으로 전해졌다.
한강우는 주사기를 바닥으로 던졌다. 플라스틱 원통이 에폭시 바닥을 굴러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의 왼쪽 귀에서 시작된 출혈은 이미 멈췄으나, 이명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뇌세포의 급격한 연소로 인한 고열이 전신을 지배했다.
"시간이 없다."
한강우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의 시선이 아페이론의 출구 바로 옆에 위치한 중앙 제어 콘솔로 향했다.
지형섭의 도끼날이 철문을 완전히 뚫고 들어왔다. 벌어진 틈새 사이로 먼지와 쇠비듬이 흩날렸다. 외부의 빛이 어두운 지하 통로를 통해 아페이론 내부로 가늘게 투사되었다. 남은 시간은 3분 내외였다.
제어 콘솔의 화면에는 빨간색 경고 문구가 점멸하고 있었다. 수동 해제 코드를 입력하지 않고 외부 압력으로 문이 열릴 경우, 방 전체에 2만 볼트의 고전압 전류가 흐르도록 설계된 상태였다. 그것은 백설민이 설치한 이중 함정이었다.
한강우는 주머니에서 푸른색 마그네틱 키카드를 꺼냈다. 요양원 302호에서 회수한 물건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카드의 닳아진 모서리를 더듬었다.
"이 방 역시 거울 대칭이다."
한강우는 콘솔의 우측 하단을 관찰했다. 콘솔의 내부 회로 기판은 좌측 배선과 우측 배선이 기하학적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일반적인 카드 슬롯은 좌측에 존재했으나, 우측의 가짜 슬롯 너머에 숨겨진 단자가 존재함을 직감했다.
카드를 우측 슬롯에 밀어 넣었다.
철컥하는 기계음과 함께 콘솔의 화면이 암전되었다. 이어서 백색의 대기 화면이 새로 고침 되었다. 푸른 키카드가 대칭 왜곡을 역방향으로 정렬하며 고전압 트랩의 회로를 물리적으로 차단했다.
한강우는 수첩에 적힌 민태경의 마지막 역공식을 콘솔 키패드에 입력했다. 그의 손가락이 건조한 플라스틱 건반을 차례로 눌렀다.
8, 7, 3, 1, 9.
마지막 숫자를 누르는 순간, 지하실의 조명이 일시에 꺼졌다. 비상용 적색 조명이 회색 벽면을 붉게 물들였다.
"강우야!"
백설민이 어둠 속에서 울부짖었다.
"나를 두고 가면, 너 역시 붉은 기하학의 표적이 된다! 그들은 멈추지 않을 거야!"
한강우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서 있던 민태경의 환각이 서서히 흩어지며 어둠 속으로 녹아내렸다. 환각이 완전히 사라진 자리에는 차가운 철제 비상 탈출구가 열려 있었다.
그때, 정면의 철제 셔터가 굉음과 함께 뜯겨 나갔다.
"움직이지 마!"
지형섭의 고함이 붉은 조명 속을 관통했다. 그의 손에 쥔 권총이 한강우의 가슴을 조준했다. 지형섭의 뒤편으로 윤세희 검사의 차가운 눈빛이 실루엣을 드러냈다.
그러나 한강우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비상 탈출구 안쪽으로 몸을 던졌다.
문이 닫히기 직전, 한강우의 시야에 백설민의 의자 뒤편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세한 황색 가스가 포착되었다. 그것은 백설민 본인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붉은 기하학이 설계한 진짜 마지막 처벌 규칙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