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상담실 '아페이론'의 벽면은 온통 무채색이었다. 습기 없는 공기가 여과 장치를 거쳐 일정하게 뿜어져 나왔다. 인공적인 백색광 아래 놓인 철제 테이블 위에는 먼지 한 톨 앉아 있지 않았다. 방음벽 너머 지상의 소음은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었다. 정적을 깨는 것은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수분 공급 장치의 미세한 작동음뿐이었다.
한강우는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맞은편 의자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가 앉아 있었다. 맞춤복 특유의 매끄러운 재질이 사내의 각진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사내의 손끝은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손톱 밑에 때나 각질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사내가 품 안에서 하얀 봉투를 꺼냈다. 봉투는 정중앙에 놓였다.
"수임료다."
사내의 목소리는 낮고 평이했다.
한강우는 봉투의 두께를 눈으로 가늠했다. 손가락을 뻗어 봉투 안을 확인했다. 조흥은행의 직인이 찍힌 5억 원짜리 자기앞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수표의 일련번호는 깨끗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무슨 감정을 원하지."
한강우가 물었다. 그의 시선은 수표에서 사내의 안면 근육으로 이동했다.
"살인 사건이다."
사내는 미소를 짓지 않았다. 그러나 입꼬리 주변의 미세한 근육이 위쪽으로 아주 미세하게 당겨져 있었다.
"경찰보다 먼저 움직여야 한다. 조건은 그것 하나다."
"사건의 위치는."
"푸른 거울 요양원."
사내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한강우의 오른손 검지가 테이블을 툭, 툭, 두드렸다. 일정한 간격이었다. 0.5초마다 한 번씩 울리는 타격음이 무균실 같은 공간에 퍼졌다.
한강우의 시선이 사내의 눈동자에 고정되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홍채였다. 빛을 흡수하기만 하고 반사하지 않는 특이한 안구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 깊은 어둠 속에서 순간적으로 어떤 형상이 겹쳐 보였다. 3년 전, 피비린내 나는 빗속에서 목숨을 잃은 동료 민태경의 마지막 얼굴이었다.
민태경의 깨진 두개골 사이로 흘러내리던 붉은 유동체와 그 곁에 서 있던 검은 실루엣의 실루엣이 사내의 어깨선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압력이 치밀어 올랐다. 한강우는 이빨을 악물었다. 어금니가 맞물리며 삐걱거리는 소리가 귓전에서 맴돌았다. 손끝의 박자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통제했다. 분노는 논리를 흐리는 불순물에 불과했다. 복수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게임판 안으로 걸어 들어가 그 규칙을 완벽하게 해체해야만 했다.
"그곳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지."
한강우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규칙."
사내가 짧게 답했다.
"설계자가 남겨둔 행동 수칙이 존재한다. 그것이 지닌 논리적 완결성을 증명해라. 혹은, 파괴하거나."
"수임료는 과분하군."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다. 실패하면 그 뇌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질 테니까."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장의 주름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복장 그대로였다. 그는 가죽 장갑을 끼며 문가로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은 사내가 고개를 반쯤 돌렸다.
"기한은 24시간이다. 이미 시계는 돌기 시작했다."
철문이 무겁게 닫혔다. 자석식 잠금장치가 철컥거리며 맞물리는 소리가 아페이론을 가득 채웠다.
한강우는 테이블 위에 남겨진 수표를 집어 들었다. 수표 뒷면에는 붉은색 잉크로 정교하게 그려진 기하학적 문양이 인쇄되어 있었다. 삼각형 세 개가 겹쳐져 만들어진 불완전한 대칭 도형이었다. 붉은 기하학의 표식이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외투를 걸쳤다.
***
밤 11시 45분. 경기도 외곽에 위치한 푸른 거울 요양원은 짙은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다.
요양원의 외벽은 오래된 페인트가 벗겨져 얼룩덜룩했다. 정문 입구에는 경찰의 황색 통제선이 무질서하게 쳐져 있었다. 그러나 경비 초소는 비어 있었고, 교대 근무를 서야 할 순경들은 순찰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초겨울의 칼바람이 불어 닥치자 그들은 히터를 켜고 창문을 완전히 닫아걸었다.
한강우는 통제선 아래로 몸을 숙였다. 그림자처럼 어둠에 동화된 채 요양원의 깨진 창문 틈새로 침투했다. 내부의 공기는 차갑고 눅눅했다. 소독약 냄새와 썩어가는 유기물의 악취가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바닥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지만, 특정 구역만큼은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그는 손전등을 꺼내 불빛을 바닥으로 쏘았다. 백색 광선이 어둠을 가르며 복도를 비추었다. 벽면 곳곳에 거울이 걸려 있었다. 일반적인 요양원 시설에서는 보기 드문 배치였다. 환자들의 자해를 방지하기 위해 거울은 보통 제거되거나 아크릴로 대체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거울들은 모두 두꺼운 유리로 제작된 실물 거울이었다.
복도를 따라 걷던 한강우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 벽면에 조잡하게 인쇄된 A4 용지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아크릴 판으로 덮인 종이 위에는 검은색 고딕체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푸른 거울 요양원 행동 수칙 1조] - 슬리퍼를 신지 않은 환자는 천장을 보지 마시오.
기괴한 문장이었다.
한강우는 수칙을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으로 단어 하나하나를 해체했다. 슬리퍼와 환자, 그리고 천장이라는 명사들의 인과관계를 추적했다.
그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계단 초입에는 환자용으로 추정되는 플라스틱 슬리퍼 한 켤레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슬리퍼의 바닥면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혈흔의 건조 상태로 보아 대략 6시간 전에 발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슬리퍼를 신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수칙에 따르면, 지금 상태에서 천장을 보는 것은 금지된 행위였다.
"경찰 놈들은 이걸 보고도 단순 추락사로 결론지었겠지."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강우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시야 한구석에 형체가 흐릿한 사내가 나타났다. 군청색 형사 점퍼를 입은 민태경이었다. 그의 이마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곳에서 검붉은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려 뺨을 적시고 있었다.
"강우야, 저 수칙은 함정이다. 저들이 널 낚으려고 파놓은 구덩이라고."
민태경의 환각이 그의 어깨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한강우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환영은 여전히 그곳에 존재했다. 뇌 세포가 파괴되면서 발생하는 전형적인 부작용이었다. 인지적 모의실험을 가동하기도 전에 이미 환각의 강도가 강해지고 있었다.
그는 왼손 손가락으로 손등을 강하게 내리쳤다. 통증이 신경을 타고 뇌로 전달되자 민태경의 형상이 조금씩 흐려졌다.
"입 다물어, 민태경. 넌 3년 전에 죽었어."
한강우는 속삭였다.
그는 계단 옆에 놓인 슬리퍼를 가만히 관찰했다. 슬리퍼의 크기는 270밀리미터였다. 성인 남성의 평균 크기다. 그러나 요양원의 주요 입원 환자들은 70대 이상의 노인들이었다. 노인들의 평균 발 크기나 걸음걸이를 고려할 때, 이 슬리퍼는 환자의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누군가 인위적으로 배치한 소품이었다.
한강우는 슬리퍼를 신지 않은 상태로 계단을 한 칸 올랐다. 손전등의 불빛을 천장으로 향하게 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인간의 본능은 금지된 것을 확인하려 들기 마련이다. 살인마는 바로 그 본능을 이용해 피해자를 사지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그는 주머니에서 소형 거울을 꺼냈다. 직접 천장을 바라보는 대신, 거울의 반사각을 이용해 천장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시도였다.
거울 안으로 천장의 형상이 들어왔다.
천장에는 수십 개의 못이 박혀 있었다. 못의 끝부분은 날카롭게 갈려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천장 전체가 얇은 철사로 거물망처럼 얽혀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낚싯바늘들이 매달려 있었다. 만약 누군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면, 미세한 공기의 흐름이나 움직임에 의해 낚싯바늘이 안구를 관통하도록 설계된 정교한 덫이었다.
슬리퍼를 신지 않은 환자는 바닥의 차가운 감촉 때문에 발끝에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발끝을 보며 걸어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세가 숙여지고, 계단을 오르는 순간 중심을 잡기 위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게 된다.
반면 슬리퍼를 신은 자는 발바닥의 자극이 없으므로 시선이 자유롭다.
"동작 수칙의 모순을 이용한 살인 설계군."
한강우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피해자는 슬리퍼를 빼앗긴 채 이 계단을 오르도록 강요받았을 것이다. 차가운 타일 바닥의 냉기가 발바닥을 자극하자, 피해자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그리고 천장에 매달린 낚싯바늘이 그의 눈을 꿰뚫었다.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지는 순간, 계단 아래로 추락해 경추가 골절되었을 것이다.
완벽한 기하학적 살인이었다. 외상 행동의 유도 장치가 이토록 정교하게 짜여 있었다.
한강우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기묘한 흥분이 끓어올랐다. 피해자의 고통이나 잔혹한 죽음 따위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를 매료시킨 것은 오직 하나, 살인마가 설계한 이 완벽한 논리 구조의 톱니바퀴들이었다.
이 톱니바퀴를 내 손으로 직접 깨부수어야 한다.
그것이 한강우가 생존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모의실험을 시작한다."
한강우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의 제어 장치를 하나씩 해제하기 시작했다. 자아를 지우고, 현장에 남겨진 살인마의 인격과 동기화를 시도하는 고도의 인지 시뮬레이션이었다.
뇌 신경망이 비정상적으로 과열되기 시작했다.
귓가에서 고주파의 이명이 날카롭게 울렸다. 삐이이이ㅡ 하는 소리가 두개골을 뚫고 들어와 뇌수막을 자극했다. 관자놀이 부근의 혈관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눈을 뜨자, 세상의 색상이 반전되어 보였다.
백색의 복도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했고, 어둠은 붉은색의 선들로 재구성되었다. 공간 전체가 입체적인 수치와 좌표로 변환되어 머릿속에 직접 주입되었다.
온몸의 세포가 끓어오르는 듯한 극심한 열감이 전신을 덮쳤다.
"강우야, 그만둬! 뇌가 녹아내릴 거야!"
민태경의 환각이 비명을 지르며 그의 덜미를 잡아챘다.
그러나 한강우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미 살인마의 시점으로 계단 위에 서 있었다. 살인마의 호흡, 살인마의 심장 박동, 그리고 피해자를 내려다보던 그 잔혹한 이성 수치가 한강우의 신경계와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며 결합했다.
뇌 세포가 타들어 가는 고온의 고통 속에서, 한강우는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