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초록색 수술복 위로 걸쳐진 하얀 의사 가운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금요일 저녁 8시. 강진태는 초점 없는 눈으로 손가락끝을 문질렀다. 손끝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메스를 쥐며 생긴 흉터 같은 훈장이었다.

"강 선생, 오늘 퇴근하는 길인가?"

지나가던 흉부외과 과장 대행 권세윤이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매끈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과 잘 다려진 와이셔츠가 그의 오만한 성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진태는 대답 대신 가볍게 목례만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권세윤의 눈빛에 스치는 노골적인 불쾌감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굳이 비위를 맞춰줄 생각은 없었다.

그의 목적지는 지하 1층, 중환자 전담 응급외과였다.

웅웅거리는 에어컨 실외기 소리와 소독약 냄새가 뒤섞인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으려는 순간, 주머니 속의 콜폰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응급실 방향에서 다급한 구두굽 소리와 비명이 벽을 타고 넘어왔다.

"비켜! 다 비켜! 흉부외과 당직 누구야! 당장 소생실로 뛰어와!"

보안요원들이 응급실 입구의 통제선을 거칠게 밀어내고 있었고, 피칠갑이 된 스트retcher카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그 뒤를 따르는 것은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과 명인대학교 병원의 기획조정실장 윤태형이었다. 평소라면 21층 VIP 병동 '아르카디아'에서 거드름을 피우고 있을 인물이 이 퀴퀴한 지하 응급실까지 내려온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누워 있는 자가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진태는 본능적으로 스트레처카로 다가갔다. 환자는 60대 후반의 남성. 안색은 이미 아스팔트 회색빛으로 변해 있었고, 호흡은 불규칙한 천명음만을 뱉어내고 있었다.

"상황은?"

진태가 환자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대며 차갑게 물었다. 맥박이 만져지지 않았다. 미약하게 요동치는 경동맥의 떨림은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한성그룹 임건우 회장님이십니다!" 윤태형 실장이 진태의 멱살을 잡을 듯이 다가와 소리쳤다. "식사 도중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셨어. 외부 병원에서 이송 중에 이미 어레스트(심정지)가 두 번이나 왔다고! 무조건 살려내! 못 살리면 너희들 목줄은 오늘부로 끝이야!"

"의사 멱살 잡고 흔들 시간에 손 치우시죠. 살릴 확률만 줄어드니까."

진태가 윤태형의 손을 거칠게 쳐내며 환자의 셔츠를 찢어발겼다. 청진기를 댈 시간조차 아까웠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흉골 하부의 느낌, 그리고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목 정맥.

"대동맥 궁(Arch) 파열에 의한 심장 탐포나데(Cardiac tamponade). 심낭에 피가 가득 차서 심장을 누르고 있어. 이대로 두면 3분 안에 심정지로 끝납니다."

"뭐, 뭐라고? 그럼 당장 수술실로 올려!"

"올라가는 도중에 죽습니다. 여기서 열어야 합니다."

진태의 단호한 선언에 응급실 전체가 얼어붙었다. 준비되지 않은 응급실 바닥에서 가슴을 열겠다는 소리는 의사 면허를 단두대에 올리겠다는 선언과 같았다.

"미쳤어? 강진태!"

언제 나타났는지 마취과 전문의 한채아가 진태의 팔을 낚아챘다. 평소의 걸걸한 입담은 간데없고,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극도의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이 환자가 누군지 몰라? 한성그룹 회장이야. 이사회에서 눈에 불을 켜고 너 하나 담글 구실만 찾고 있는데, 이 더러운 응급실 바닥에서 대동맥 수술을 하겠다고? 성공 확률? 제로야, 제로! 네가 신이라도 돼?"

"한 선생."

진태가 채아의 손을 천천히, 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떼어냈다. 그의 눈동자는 동요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의사가 환자 신분증 보고 칼 잡습니까? 내 눈에는 그냥 죽어가는 인간 하나가 보일 뿐이야."

"강진태, 제발 고집 좀 부리지 마! 저 인간 죽으면 윤태형 실장이나 권세윤 과장이 너한테 독박 씌울 거 뻔하잖아! 왜 사지로 기어 들어가려고 그래!"

"비키세요."

진태는 한채아를 밀쳐내고 거침없이 외쳤다.

"메스, 그리고 Sternum saw(흉골 절개용 톱) 가져와! 수술 준비해!"

"미친놈…… 진짜 미친놈이야, 너는."

채아는 머리를 감싸 쥐며 욕설을 뱉었지만, 이내 매서운 눈빛으로 돌변해 마취기 인공호흡기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입으로는 욕을 하면서도 손은 이미 진태의 템포에 맞추고 있었다. 진태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다.

진태는 포타블 초음파 기기를 환자의 가슴에 대었다. 모니터에 비친 심장은 검은 피의 바다에 갇혀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수축력을 완전히 상실한 심장근육이 애처롭게 떨렸다.

'살려야 한다.'

그의 머릿속에 오직 그 한 문장만이 맴돌았다. 환자의 고통이 가슴을 찌르는 듯한 환각이 전해졌다. 진태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쿵, 쿠쿵, 쿵. 가슴 깊은 곳에서 시작된 기묘한 통증이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이 지독한 부정맥은 언제나 그를 괴롭히던 고질병이었다.

그때였다.

삐----!

모니터의 심전도 곡선이 일직선으로 누웠다. 완전한 정지. 아시스톨(Asystole)이었다.

"어레스트! 에피네프린 1엠플 인젝션! CPR 시작해!"

진태가 환자의 가슴 위로 올라타 체중을 실어 압박하기 시작했다. 뚝, 뚝 하며 환자의 갈비뼈가 가라앉는 느낌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하나, 둘, 셋, 넷……."

땀방울이 진태의 턱끝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심장은 반응하지 않았다. 1분, 2분. 시간은 가차 없이 흘러갔다. 뇌 괴사가 시작되는 마의 4분이 다가오고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번져갔다.

'이대로 죽는 건가. 내 손 위에서 또 한 명이 낙오되는 건가.'

극도의 스트레스와 피로가 겹치며 진태의 시야가 흐려졌다. 시야가 두 개, 세 개로 겹쳐 보이는 복시 현상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가슴 통증이 극에 달해 호흡이 턱 막히는 순간, 응급실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삐---- 하는 경고음도, 한채아의 비명 섞인 외침도, 윤태형의 악에 받친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멈췄다.

허공에 떠다니던 먼지 한 톨마저 정지한 기이한 침묵 속에서, 차가운 냉기가 진태의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수술실 바닥에서부터 칠흑 같은 어둠이 피어오르더니 이내 거대한 형상을 이루었다.

그것은 그림자였고, 동시에 심연이었다. 얼굴이 없는 존재가 진태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 존재가 손을 뻗자, 허공에 오래된 가죽 장부 한 권이 스르륵 펼쳐졌다.

[강진태. 네놈의 심장도 한계를 맞이하고 있구나.]

목소리는 귀가 아닌 뇌세포 하나하나를 직접 울리는 듯한 기괴한 진동이었다.

[눈앞의 인간은 이미 내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의 남은 수명은 0. 하지만 네놈은 그를 이승으로 끌고 돌아가고 싶어 하는군.]

"……누구냐."

진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아팠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여전히 차갑고 날카로웠다.

[나는 죽음의 서기이자, 생명을 거두는 자. 나와 계약해라. 이 장부를 받아들인다면, 네놈에게 죽어가는 육체의 모든 비밀과 가장 안전한 길을 보여주마. 환자의 잔여 수명과 장기별 괴사율, 그리고 메스가 나아갈 최선의 경로까지 전부.]

그림자가 가리킨 장부 위로 붉은색 글씨들이 어지럽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계약의 대가는 네놈의 생명이다. 장부를 펼칠 때마다 네 심장은 부서질 듯 요동칠 것이며, 시야는 찌그러질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신의 형상이 진태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얼어붙을 듯한 한기가 진태의 뺨을 스쳤다.

[수술이 실패하여 환자가 목숨을 잃는다면, 그가 잃어버린 수명만큼 네놈의 실제 수명이 즉시 차감되어 내게 귀속될 것이다. 기꺼이 네 목숨을 저울에 올리겠느냐?]

진태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냉소적인, 하지만 광기에 찬 미소였다.

"내 목숨 따위, 환자를 살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져가라."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권력자들의 방해를 뚫고, 이 더러운 정치를 비웃으며 오직 환자를 살려내겠다는 그의 구도자적인 집착이 사신의 제안마저 집어삼켰다.

"계약한다. 그 잘난 장부인지 뭔지, 당장 내놔."

[어리석고 오만한 필멸자여. 계약은 성립되었다.]

그림자가 연기처럼 흩어지며 진태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쿵!

심장이 터질 듯한 강한 충격과 함께 정지했던 세계가 폭발하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태야! 강진태! 정신 차려!"

한채아가 진태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진태는 크게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순간, 그의 시야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환자의 흉부 위로 입체적인 3D 그래픽 같은 붉은색 선들이 정밀하게 매핑되어 있었다. 피부를 투과하여 대동맥의 파열 지점이 정확히 어디인지, 어느 경로로 메스를 그어야 주변 신경과 혈관을 다치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지 붉은색 가이드라인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환자의 머리맡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붉은색 숫자.

[환자 임건우 수명: 0년 0일 0시간 (사망 진행 중)] [장기 괴사율: 심장 42%, 뇌 15%, 신장 28%] [가장 안전한 수술 경로 탐색 완료] [현재 수술 성공률: 70%]

시야 우측 하단에 선명하게 떠오른 성공률 '70%'.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사망 선고를 내려야 한다고 포기한 환자였다. 하지만 진태의 눈앞에는 70%라는 거대한 가능성의 길이 열려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희열이 솟구쳤다.

"인공심폐기(CPB) 준비할 시간 없어. 대퇴 동정맥 캐뉼라(Femoral cannulation) 생략하고 바로 오픈한다."

진태의 목소리에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확신과 지배력이 실려 있었다.

"강진태, 너 진짜 미쳤어? 서전 혼자서 어시스트도 없이 응급실에서 Sternotomy를 하겠다고?"

한채아가 경악하며 소리쳤지만, 진태의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어시스트는 한 선생이 하세요. 마취 유지하고, 석션(흡인기) 준비해."

"내가 왜 네 미친 짓에 동조해야 하는데!"

"살리고 싶잖아, 당신도."

진태의 벼려진 눈빛이 채아의 시선을 꿰뚫었다. 채아는 입술을 깨물며 침을 꿀컥 삼켰다. 그녀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베타딘(소독약) 부어!"

진태가 외쳤다. 간호사가 허둥지둥 환자의 가슴 위로 갈색 소독약을 쏟아부었다. 진태는 소독 장갑을 낀 채 메스를 움켜쥐었다.

시야에 매핑된 붉은색 가이드라인이 그에게 메스를 움직여야 할 최적의 궤적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 선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비록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고 시야가 가끔 겹쳐 보였지만, 손끝의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살아 있었다.

주변의 소음이 완전히 소거되었다. 오직 환자의 부풀어 오른 가슴과 붉은 가이드라인만이 진태의 세계 점유율 100%를 차지했다.

모두가 침묵 속에서 숨을 죽였다. 윤태형 실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뒤로 물러섰고, 응급실의 간호사들은 이 믿기지 않는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단독 집도로, 완벽한 준비도 없이 대기업 회장의 가슴을 열어젖히려는 일촉즉발의 순간.

진태는 메스를 쥐고 붉은 선의 시작점에 칼날을 가져다 대었다.

'살린다. 내가 살려낸다.'

스윽.

메스가 환자의 가슴 정중앙을 가르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붉은 가이드라인을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절개였다. 피가 솟구치기 전에 석션 팁이 정확히 길을 닦아냈다.

"톱(Saw) 줘."

진태가 손을 내밀었다. 흉골을 가르고 들어가 심장을 직접 압박하는 탐포나데를 해결하는 순간, 환자는 다시 숨을 쉴 것이다. 성공률 70%라는 숫자는 완벽한 확신이었다.

그가 흉골 절개용 톱을 쥐고 심장 막바지 경계선에 칼날을 들이밀며 깊숙이 진입하려는 바로 그 순간.

- 삐이이이익!

머릿속을 찢어발기는 듯한 날카로운 경고음이 이명과 함께 터져 나왔다.

동시에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던 아름다운 붉은색 가이드라인이 미친 듯이 뒤틀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환자의 심장 부근에서 검붉은 빛의 균열이 가기 시작하더니, 계량 장부의 텍스트가 핏빛으로 붉게 물들며 깜빡였다.

[경고: 예측 불가한 중증 대동맥 박리(Type A Dissection) 범위 급격히 확장.] [심낭 내 극심한 유착 발견. 절개 시 대동맥 전층 파열 위험성 극대화.]

우측 하단의 숫자가 미친 듯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70%…… 50%…… 30%……

그리고 마침내 멈춰 선 숫자는 진태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현재 수술 성공률: 10%]

"……!"

진태의 메스끝이 공중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식은땀이 속눈썹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메스를 대는 순간, 환자는 즉사하고 그의 남은 수명 수십 년은 고스란히 사신에게 회수당할 터였다.

"강진태? 왜 멈춰? 빨리 열어야 해! 바이탈 떨어져!"

한채아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지만, 진태의 눈동자는 갈 곳을 잃고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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