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어시스트, FFP(신선동결혈장)랑 RBC(적혈구) 몇 팩이나 들어갔어?”

“각각 여섯 팩씩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혈압이 안 잡힙니다! BP 55에 30, 백박사님! 이대로는 마취 유지가 안 됩니다!”

한국대학병원 응급의료센터(ER) 외상소생실의 공기는 피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뒤섞여 숨이 막힐 듯 무거웠다. 바닥은 이미 쏟아진 혈액으로 붉게 물들어 발을 디딜 때마다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간호사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며 지혈용 거즈를 나르는 동안, 모니터의 경고음은 쉴 새 없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댔다.

삐이이이, 삐이이이ㅡ.

수치들이 붉은빛을 뿜어내며 요동치고 있었다.

[BP: 52/28 mmHg] [HR: 142 bpm] [SpO2: 79%]

복부 대동맥류 파열(Ruptured Abdominal Aortic Aneurysm, rAAA).

환자는 이미 복강 내에 대량의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후복막강(Retroperitoneum)이 터져 나간 대동맥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지금 당장 배를 열어 대동맥을 차단(Aortic clamping)하지 않으면, 환자는 5분 이내에 뇌사와 저혈량성 쇼크(Hypovolemic shock)로 사망할 것이 분명했다.

그 아수라장의 중심에서, 백강현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흰색 라텍스 장갑 너머로 보이는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손가락.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기괴할 정도로 굳어 있었다. 손가락 끝을 움직이려 뇌에서 명령을 내려보아도, 차갑게 식어버린 신경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3년 전, 기획조정실장 송우진의 정교한 설계로 뒤집어썼던 의료 사고의 굴레. 그리고 그날 밤의 의문의 사고로 끊어져 버린 척골신경(Ulnar nerve).

구걸하듯 얻어낸 야간 대진의(페이닥터) 자리는 그가 한국대병원으로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틈바구니였지만, 이 굳어버린 손가락으로는 메스를 잡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때, 소생실의 자동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 가슴에 선명하게 박힌 '외과 과장 유상일'이라는 자수. 그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이 환자 누구 마음대로 소생실에 붙잡아 두고 있어?”

유상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소생실의 비명 같은 기계음을 뚫고 들어왔다. 환자의 상태를 보여주는 모니터를 힐끗 본 유상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rAAA에 혈압 50대? 이미 어레스트(Arrest) 직전이잖아. 이런 환자는 수술실에 올려봤자 테이블 데스(Table death, 수술 중 사망)야. 우리 과 사망률 통계 깎아 먹을 일 있어? 당장 중환자실로 전실해. 연명치료 거부동의서(DNR) 받고 정리해라.”

“과장님, 아직 어레스트 안 왔습니다.”

강현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마치 기계가 내뱉는 음성처럼 감정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지금 즉시 리퍼(Transfer) 가도 이동 중에 사망합니다. 여기서 개복하고 대동맥을 잡아야 살릴 수 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야, 백강현.”

유상일이 강현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눈에 노골적인 경멸과 멸시가 서렸다.

“네가 야간 대진의로 여기 기어들어 왔을 때 내가 경고했지. 죽은 듯이 처박혀서 감기 환자나 처방전이나 발행하라고. 어디서 감히 외과 과장 지시에 토를 달아? 네 손가락 꼴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유상일의 시선이 강현의 굳어 있는 오른손 약지와 새끼손가락에 머물렀다. 조소 섞인 웃음이 그의 입가에 걸렸다.

“손가락 두 개가 병신이 된 놈이 메스를 잡겠다고? 환자 배를 열어서 대동맥을 찾기도 전에 네 손가락이 굳어서 환자 장기나 쑤셔 박겠지. 사람 죽여서 병원 뒤집어놓을 작정이냐? 당장 손 떼고 소생실에서 나가!”

스태프들의 시선이 일제히 강현에게 쏠렸다. 소심하고 겁 많은 전공의 임민준은 구석에서 입술을 깨물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유상일의 말은 잔인했지만, 의학적으로는 현실이었다. 손가락이 마비된 외과의가 복부 대동맥류 파열이라는 초응급 수술을 집도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강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터지기 일보 직전인 환자의 복부와 붉게 물들어가는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살려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의무감이 아니었다. 3년 전, 자신을 나락으로 보냈던 자들이 득세하는 이 병원에서, 그들이 포기한 환자를 살려내는 것만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 환자가 죽으면, 그의 외과의로서의 삶도 완전히 끝나는 것이다.

강현은 천천히 자신의 몸을 덮고 있던 낡은 야간 대진의용 가운을 벗어 던졌다.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진 가운 위로 유상일의 가쁜 숨소리가 얹혔다.

“너 지금 내 지시 불이행으로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고 싶어? 당장 안 비켜?”

유상일이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 실려 소생실 벽을 때렸다.

그 순간이었다.

강현의 뇌리를 강타하는 극심한 이명과 함께 시야가 번쩍였다.

웅ㅡ!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고주파 소음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관자놀이가 터질 것 같은 압박감이 밀려오며 안구가 충혈되기 시작했다. 뇌압이 급격히 상승하는 고통에 강현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의 망막 위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파란색 빛으로 이루어진 기이한 홀로그램 창이 환자의 신체 위로 떠 오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주식 시장의 실시간 호가창처럼 끊임없이 숫자를 바꾸며 요동치고 있었다.

[환자 생체 정보 동기화 중...] [진단: 복부 대동맥류 파열 (Ruptured Abdominal Aortic Aneurysm)] [실시간 생존율: 4.2%] [수술 난이도: SS (극상)] [예상 사망 시간: 04분 12초]

‘...이게 뭐지?’

강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환자의 복부 위로 붉은색 수술 가이드라인과 함께 출혈이 발생한 대동맥의 정확한 위치가 3D 그래픽으로 가시화되어 있었다. 파열된 부위는 대동맥 분지부 직하방 약 2cm 지점. 후복막의 혈종이 간신히 추가 파열을 막고 있으나, 그 두께는 불과 1.2mm에 불과했다. 작은 자극 하나에도 완전히 무너져 내릴 시한폭탄이었다.

[시스템 메시지: 생명 구조 시스템(Life Rescue System)이 각성되었습니다.] [경고: 집도 중 처치 실패 시, 등가교환 법칙에 의해 집도인의 오른손 마비 수치가 영구 누적됩니다. (현재 마비 수치: 40%)] [마비 수치 100% 도달 시, 외과의로서의 생명은 영구히 종말합니다.]

차가운 시스템의 경고음이 머릿속을 울렸다. 정답을 알려주는 치트키가 아니었다. 이것은 자신의 남은 외과의로서의 수명을 칩으로 걸고 벌이는 잔혹한 도박판이었다. 실패하면 손가락은 영원히 굳어버린다.

그러나 시스템은 이내 다른 창을 띄웠다.

[선택적 계약 수립 가능] [제안: 수술 성공 시 획득할 '구조 포인트'를 가치로 담보 설정.] [대가: 오른손 약지 및 새끼손가락의 5분간 임시 복구.] [연산 부하율: 85% (뇌 신경 과부하 경고)]

뇌가 타들어 가는 것 같은 한기가 척수를 타고 흘렀다. 5분. 단 5분 동안 오른손을 완전히 움직일 수 있게 해준다는 달콤한 제안. 하지만 실패할 경우 가해질 영구 마비의 공포.

강현은 주저하지 않았다. 메스를 잡지 못하는 외과의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수락한다.’

그가 속으로 선언한 순간, 오른손 끝에서부터 뜨거운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굳어 있던 척골신경이 강제로 재연결되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으드득, 뼈가 맞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차갑게 죽어 있던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손가락 끝에 감각이 돌아왔다.

손가락이 굽혀졌다. 그리고 펴졌다.

완벽한 움직임이었다. 비록 5분이라는 시한부 침묵의 기적이었지만, 지금의 강현에게는 세상을 지배할 힘과 같았다.

“임민준 선생.”

강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어시스트를 불렀다.

“예, 예? 백 박사님?”

“베타딘(소독약) 준비해. 포셉(Forcep)이랑 메스 10번.”

“너 미쳤어?!”

유상일이 강현의 앞막이를 막아서며 소리쳤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대진의 따위가 어디서 집도 선언을 해! 이 환자 테이블 데스 나면 네가 책임질 거야? 네 의사 면허 날아가는 건 물론이고 형사 처벌까지 받게 만들어 줄 테니까 당장 손 떼!”

유상일은 철저하게 자신의 커리어와 병원의 평판만을 계산하고 있었다. 환자의 생명 따위는 그의 안중에 없었다. 법적인 가이드라인과 행정적 권한을 내세워 강현을 짓누르려는 정교한 압박이었다.

강현은 유상일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는 심연처럼 깊고 차가웠다.

“과장님.”

“뭐?”

“복부 대동맥류 파열 환자의 골든타임은 후복막 파열 후 최대 10분입니다. 이 환자는 이미 내원 전 6분이 경과했습니다. 지금 전실을 결정하고 동의서를 받는 시간은 최소 15분입니다. 즉, 과장님의 전실 지시는 의학적으로 환자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강현의 목소리에는 단 한 줌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기에, 오히려 소생실 전체를 압도하는 무게감이 있었다.

“한국대병원 외과 전공의 수련 규정 제14조, 응급 상황 발생 시 상급 종합병원의 전문의는 환자의 생명 보존을 위해 즉각적인 외과적 처치를 시행할 의무가 있다. 또한, 의료법 제15조에 의거, 의사는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 요청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과장님이 지금 하시는 행동은 의학적 판단이 아니라, 행정 권한을 남용한 진료 거부 및 방조입니다.”

“이, 이 주주구장창 말만 번지르르한 놈이...!”

유상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감정적 대응 대신 철저히 법률과 통계, 의학적 팩트만을 조목조목 짚어내는 강현의 반박에 말문이 막힌 것이다.

“이 수술의 생존율은 극히 낮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살인이 될 수 있습니다.”

강현은 시선을 돌려 간호사를 보았다.

“메스.”

그의 단호하고 차가운 목소리에, 수술 간호사는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 메스를 강현의 오른손에 쥐여주었다.

착.

메스의 차가운 금속 감각이 그의 손바닥에 완벽하게 밀착되었다. 다섯 손가락 모두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신경이 살아 숨 쉬는 기적이 그의 손끝에서 맥동했다.

[남은 복구 시간: 04분 15초]

망막 위의 타이머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1초가 아쉬운 사투였다.

강현은 메스를 쥐고 환자의 복부 위, 시스템이 제시한 정확한 절개 라인에 메스 끝을 대었다. 피부를 가르고 들어가 대동맥을 확보하는 데 부여된 시간은 단 3분이었다.

그가 메스에 힘을 주어 환자의 복부를 절개하려는 찰나였다.

덥석.

거칠고 무거운 손이 강현의 오른손목을 거세게 잡아챘다.

“그만둬!”

유상일이었다. 그의 눈은 광기와 분노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의 손아귀 힘에 강현의 메스 끝이 허공에서 멈췄다.

“어디서 감히 내 지시를 무시하고 불법 시술을 하려 들어? 네 놈은 오늘부로 끝이야. 집도 권한도 없는 대진의 놈이 무단으로 환자 배를 열었다? 무면허 의료 행위 및 업무상 과실치상으로 내 반드시 네 놈 옷을 벗기고 철창신세를 지게 만들어 주마!”

유상일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소생실 가득 울려 퍼졌다. 환자의 바이탈 모니터는 더욱 빠른 속도로 죽음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삐이이이ㅡ 삐이이이ㅡ.

[BP: 48/22 mmHg] [남은 복구 시간: 03분 50초]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강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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