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소월재의 전면 격자 봉인이 찬란한 해체 빛 무리로 흩어지며 마침내 양가 원로원 주주총회가 열리는 그랜드 아레나의 문턱이 노출된다.

그 찬란한 빛의 틈새로 쏟아진 것은 구원의 온기가 아니었다. 심장을 도려낼 듯한 혹한의 냉기, 그리고 사방을 가득 채운 피비린내였다.

"아윽……!"

여진의 무릎이 꺾이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고대 계약서의 봉인을 해제한 대가로, 가문이 수백 년간 쌓아 올린 업보와 저주의 무게가 그녀의 혈관 속으로 한꺼번에 역류해 들어왔다. 뺨의 자창에서 흘러내린 피가 턱을 타고 쇄골로 번졌다. 철문을 억지로 비틀어 열며 삐걱거리던 오른쪽 어깨 관절은 이미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

"여진아!"

세현이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듯 감싸 안았다. 그의 단단한 팔에서 풍기는 짙은 시트러스 향과 땀 냄새가 여진의 흐려지는 의식을 강하게 두드렸다. 하지만 세현의 손길이 닿는 순간, 두 사람의 가슴 깊은 곳에서 동시에 불길이 치솟았다. 서로를 향한 진심 어린 감정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발동한 '계약 반사'였다. 심장이 뜨거운 납물에 녹아내리는 듯한 극통에 세현의 턱관절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의 단정한 셔츠 깃 위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감금조와의 사투에서 튄 적들의 피와 그의 피가 뒤섞여 처참한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천장 돔에서 하강하는 최종 감금조의 쇠사슬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그들의 손에 들린 은빛 특수 구속구는 이대로 두 사람의 목을 죄어 영원한 지하 밀실로 끌고 갈 기세였다.

"이대로…… 끝날 것 같아?"

여진이 핏발 선 눈으로 세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고통으로 잘게 흔들리다 이내 차가운 집념으로 고정되었다. 세현은 피를 흘리면서도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 눈빛은 흔들림 없이 여진의 시선을 받아내며 깊은 신뢰를 보냈다.

"그럴 리가. 우리가 누군데."

여진은 떨리는 손으로 세현의 품을 뒤졌다.

손끝에 걸린 것은 차가운 유리 병이었다. 2화에서 세현의 침실 깊숙한 서랍에서 발견했던, 그리고 8화에서 여진이 몰래 복용하기도 했던 바로 그 '감각 과부하 완화제'였다. 그동안 이 약은 통증을 마비시키고 원로원의 감시망을 피해 서로를 혐오하는 척 가장하기 위한 기만책으로 쓰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 약의 본질은 감각의 차단이 아니야."

여진이 약병의 코르크를 이로 뽑아내며 속삭였다.

"주파수의 가공이지."

동시에 여진은 품에 안고 있던 고대 계약서 원본의 뒷면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원로원 밀실 서고의 어둠 속에서 찾아냈던 그 비밀스러운 문양. '진정한 목숨을 건 희생의 공명이 저주 자체를 파괴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적 문양이 붉은 핏빛으로 서서히 박동하고 있었다.

여진은 완화제 액체를 자신의 입술에 머금은 뒤, 망설임 없이 세현의 입술을 찾아 들었다.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액체가 두 사람의 타액과 피와 섞이며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약효가 혈관을 자극하는 순간, 두 사람의 공명 주파수가 상상할 수 없는 궤도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고통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파동을 증폭시켜 외부로 투사하는 역 주파수 공명이었다.

"크윽……!"

세현이 여진의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고, 두 사람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무형의 충격파가 허공을 갈랐다.

쾅!

그랜드 아레나의 천장에서 하강하던 감금조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들의 특수 구속구는 과부하된 마력의 폭주를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다.

그와 동시에, 소월재 내부 벽면 장식에 은밀히 숨겨져 있던 한태오의 고대마법 도청 및 생체 감시 마진들이 차례로 불꽃을 뿜으며 터져 나가기 입했다. 틱, 탁, 타닥! 소월재 전체를 지배하던 감시의 눈들이 도미노처럼 붕괴했다.

"으아아아악!"

그랜드 아레나 단상 아래, 귀에 도청 수신기 리시버를 꽂고 있던 한태오가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여진이 역류시킨 초고주파의 공명 에너지가 도청 장치를 매개로 그의 뇌 신경을 직접 타격한 것이었다. 한태오의 양쪽 귀에서 붉은 선혈이 분출되어 뺨을 적셨다.

"아버지!"

옆에 서 있던 강선우가 질겁하며 한태오를 부축하려 했으나, 몰아치는 압도적인 위압감에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사위가 고요해졌다. 아수라장이 된 통합 주주총회장의 거대한 철문이 양옆으로 느리게 열렸다.

자욱한 연기와 먼지 속에서, 구두굽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일정하게 두드렸다.

탁. 탁. 탁.

붉은 피가 군데군데 묻은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풀어헤친 강세현이 서 있었다. 그의 한쪽 뺨에는 거친 전투의 흔적인 핏자국이 묻어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밤하늘의 늑대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먼지 한 터럭 묻지 않은 찬란한 가죽 수트를 걸친 한여진이 오만한 걸음걸이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어깨의 통증을 완벽한 포커페이스 밑으로 감춘 채, 그녀는 마치 왕좌로 향하는 여왕처럼 우아했다.

그들의 뒤편으로, 백령과 태성의 최정예 부서원들로 구성된 비서 군단이 일렬로 늘어서며 아레나의 사방을 장악했다. 그 선두에는 한여진의 그림자이자 절대적 조력자인 윤지은 비서가 차가운 눈빛으로 서류 가방을 든 채 서 있었다.

원로원의 늙은 주주들과 이사진들은 이 믿기지 않는 광경에 숨을 죽였다.

"살아…… 돌아왔다고? 어떻게 저기서?"

"감금조는? 봉인은 어떻게 된 거야!"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신음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강선우는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몸을 떨며 여진과 세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경악으로 넓어졌다가, 이내 아래로 내리깔리며 비겁한 회피를 시도했다. 그러나 여진의 서늘한 시선은 정확히 강선우의 미간을 꿰뚫었다.

여진은 단상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주위의 모든 공기가 그녀의 움직임 하나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회의를 시작하죠."

여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아레나의 마이크 시스템을 타지 않고도 공간 전체를 묵직하게 울렸다.

한태오는 귀에서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이가 갈리는 소리를 내며 여진을 노려보았다.

"네년이…… 감히 가문의 법도를 어기고 이런 짓을 벌이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사랑이라는 금기를 품은 순간, 너희의 심장은 파멸하고 가문의 행운은 소멸한다! 이미 태성과 백령의 주가는 바닥을 치고 있을 것이다!"

한태오의 광기 어린 외침에 원로들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믿는 유일한 진리, '혐오할수록 번영하고 사랑할수록 파멸한다'는 고대의 규칙이 그들의 마지막 무기였다.

그때였다. 세현이 여진의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세현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여진을 담았다. 그 안에는 가벼운 장난기도,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계산도 없었다. 오직 그녀만을 향한 집요하고도 깊은 열망만이 가득했다. 여진은 그의 눈빛 속에서 자신의 흔들림 없는 결의를 거울처럼 마주했다.

여진이 세현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원로회 전원과 한태오, 강선우가 지켜보는 한가운데에서, 세현의 깃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여진의 붉은 입술이 세현의 잘날카로운 턱선 위, 뺨에 부드럽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내가 말했잖아, 강세현."

여진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는 바람처럼 세현에게, 그리고 아레나 전체에 퍼졌다.

"당신을 사랑해. 이 저주받은 심장이 터져 나간다 해도."

"나도 마찬가지야, 한여진."

세현이 마주 대답하며 그녀의 손가락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 순간, 아레나의 대형 홀로그램 전광판에 붉은색 경고 신호가 깜빡이기 시작했다. 가문의 금기를 어긴 '사랑'의 선언. 계약 반사가 일어나 두 사람의 심장을 파괴하고 가문을 몰락시켜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나타난 결과는 전혀 달랐다.

웅-!

전광판의 수치들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이너스로 곤두박질쳐야 할 태성과 백령의 주가 지수, 신용 담보 채권 가치들이 상한가를 뚫고 청장부지로 치솟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주가가 왜 폭등하는 거지? 채권 회수율이 100%를 넘어섰어!"

원로원 주주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약 원본 뒷면의 문양, '목숨을 건 희생의 공명'이 완벽하게 활성화된 결과였다. 가문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원로원이 심어둔 '사랑하면 파멸한다'는 규칙은 애초에 기만책에 불과했다. 진정한 희생을 각오한 두 후계자의 의지가 합치되어 동반 각성하는 순간, 가문을 옥죄던 저주의 사슬은 파괴되고, 그들이 누리던 모든 상업적 행운과 지배 지분은 원로원을 거치지 않고 오직 두 사람에게로 직접 수속되는 법 법칙이 발동한 것이다.

"당신들이 짜놓은 불공정 계략판은 여기서 끝입니다."

여진이 냉소 어린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윤지은 비서가 신속하게 움직였다. 비서 군단이 아레나의 모든 테이블 위에 두꺼운 서류 뭉치를 일제히 들이밀었다. 강선우와 한태오의 앞에도 서류가 거칠게 던져졌다.

[태성-백령 통합 독점 승계권 찬탈 및 지분 전량 회수 증명서]

"이게…… 이게 무엇이냐!"

강선우가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들추다 비명을 질렀다.

"원로회가 가졌던 모든 의결권과 신용 담보가 이미 우리 두 사람의 명의로 양도 완료되었습니다."

세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공명 계약의 절대적 행운 지수가 당신들의 탐욕을 거름 삼아 우리 자산으로 자동 전환되었거든. 이제 이 아레나에서 당신들이 가진 지분은 단 0.1%도 존재하지 않아."

"이 도둑놈들 같으니라고!"

한 원로가 뒷목을 잡고 쓰러졌지만, 비서 군단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포위할 뿐이었다.

여진과 세현의 완벽한 정서 파괴와 파멸을 확신하며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던 강선우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권력과 미래가 단 몇 초 만에 종이 조각처럼 구겨져 버린 현실을 믿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해댔다.

여진은 쓰러져 피를 흘리는 한태오를 내려다보았다.

"아버지. 절 가문의 도구로만 쓰시려 했던 대가입니다. 이제 백령도, 태성도, 그리고 이 추악한 계약의 사슬도 전부 우리가 지배합니다."

완벽한 승리였다. 원로원의 지배 지분은 영구 소멸했고, 두 사람은 마침내 자유와 권력을 동시에 손에 쥐었다. 아레나를 가득 채운 침묵 속에 여진의 오만한 미소가 승리를 선언하듯 빛났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한태오가 붉게 충혈된 눈을 치켜뜨며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가에서 흘러내린 피가 이빨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내가…… 이대로 물러설 것 같으냐, 여진아."

한태오의 떨리는 손이 그의 품 안으로 기어들어 가더니, 이내 손바닥만 한 검은색 금속 장치를 꺼내 들었다. 장치의 중앙에는 붉은색 액정이 깜빡이고 있었고, 그 액정 안의 숫자는 놀랍게도 여진의 실시간 심박수와 완벽하게 동기화되어 있었다.

"그 고대 계약을 해제한 대가로 네 몸에 쌓인 저주의 무게…… 그것은 단순한 통증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태오가 장치의 붉은 다이얼을 천천히 돌렸다.

두욱.

순간, 여진의 왼쪽 가슴이 칼로 난도질당하는 듯한 격통이 밀려왔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여진아!"

세현이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았지만, 한태오는 광기 서린 고함으로 그들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움직이지 마라, 강세현! 이 장치는 여진이의 심장 고통 반사 지표에 직접 연동되어 있다. 내가 이 버튼을 누르거나, 네놈이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와 여진이의 심박수를 자극하는 순간…… 네년의 심장 속에 심어둔 소형 제어 폭탄이 즉시 기폭될 것이다!"

작은 금속 장치 위로 섬뜩한 붉은 레이저 빛이 여진의 심장을 정확히 겨냥하며 깜빡이기 시작했다.

완벽한 해방의 문턱에서, 한태오가 던진 마지막 잔인한 덫이 두 사람의 목조를 다시금 죄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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