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아카데미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아샤트 관의 최상층 테라스. 당신은 특수 제작된 최고급 마법 가죽 소파에 누워 느긋하게 하품을 내쉽니다. 기분 좋은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고, 눈앞에는 아카데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원래대로라면 낙제생의 신분으로 먼지 날리는 훈련장을 구르며 "살려주세요, 교관님!"을 외쳐야 했을 주말이건만, 지금 당신이 누리는 풍경은 완전히 딴판입니다.

"황금 잎차로 우려낸 최고급 홍차입니다, 마스터."

올해의 수석 입학자이자 차가운 얼음의 천재로 소문난 아리엘이 세상에서 가장 경건한 태도로 찻잔을 내려놓습니다. 그녀의 시그니처 대사인 "역시, 마스터의 깊은 뜻을 제가 감히 다 헤아릴 순 없겠지만요!"가 오늘도 테라스에 맑게 울려 퍼집니다. 당신의 전속 시녀를 자처하는 그녀의 눈빛은 흡사 광신도의 그것과 닮아 있습니다.

'아니, 난 그냥 목마르니까 물 좀 달라고 했을 뿐인데... 왜 황실 진상품이 나오는 거냐고.'

당신은 마음속으로 쾌활하게 쯧쯧 혀를 찹니다.

돌아보면 참 어이없는 나날들이었습니다. 실습장에서 날뛰던 거대 마황수를 파리 쫓듯 손가락으로 튕겨 잡았을 때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귀찮아서 집으로 도망치려다 발견한 지하 마물 소환 제단에서 내쉰 한숨 한 번에 마왕이 "끄악! 이 무슨 파괴적인 마력인가!"라며 소멸할 때까지만 해도 자포자기 심정이었습니다. '조용히 쥐 죽은 듯 꿀 빨기'라는 본래의 계획은 이미 안드로메다 너머로 날아간 지 오래였으니까요.

하지만 결과는? 아주 대성공입니다!

악의 세력은 당신을 '세계를 조율하는 장막 뒤의 절대 지배자'라 부르며 지레 겁을 먹고 지하 깊숙이 잠적했습니다. 아카데미 교장과 고위 재상들은 매일 아침 당신의 '오늘의 한마디'를 듣기 위해 비서실장을 통해 기안서를 밀어 넣습니다.

"대마법사님, 이번 신입생 전형의 마력 측정 기준을 어떻게 할까요?"

저 멀리서 학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기어 들어오는 목소리로 묻습니다. 당신은 오물오물 과자를 씹으며 귀찮다는 듯 툭 내뱉습니다.

"눈치껏 해. 다 귀찮으니까."

"헉... 역시!"

학장은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칩니다.

"낙제생의 눈높이부터 천재의 영역까지, 차별 없이 상대의 기색을 읽는 '눈치 역량(실전 감각)'을 기르게 하라는 말씀이시군요! 즉시 '눈치 역량 평가'를 교과 과정에 신설하겠습니다!"

'아니야, 그런 뜻 절대 아니라고 이 인간들아.'

당신은 헛웃음을 삼키며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습니다. 뭐, 오해하면 어떻고 착각하면 어떻습니까. 덕분에 당신은 손가락 하나 안 대고 아카데미 최고의 권력과, 넘쳐나는 돈, 그리고 우주 최강의 안락함을 손에 넣었습니다. 귀찮은 자잘한 일들은 저 천재들이 알아서 척척 해결해 주고, 당신은 그저 이 완벽한 신선 신세를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카데미를 지배하는 그림자 대마법사. 그것이 낙제생의 껍데기를 쓴 당신이 이룩한, 가장 완벽하고 게으른 세계 평화의 결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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