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파괴된 도어 너머에 고대 금빛 성궤가 출현하지만, 검출판에는 '경고: 레오폴드의 원격 동시 자멸 장치 가동 중 (소멸 시간: 60초)' 메시지가 선연하게 점멸한다.

붉은빛이 지하 석실의 음습한 벽면을 피처럼 물들였다.

"60초……? 자멸 장치라고?"

플로렌시아가 성검을 쥔 손을 바르르 떨었다. 조금 전 그녀의 체내를 좀먹던 성검의 저주를 에드릭이 방열 마탄으로 강제 방출해 준 덕분에 호흡은 한결 편안해 보였지만, 눈동자에는 지울 수 없는 경악이 서려 있었다.

"에드릭! 어서 피해라! 이 정도 규모의 자멸 장치라면 이 구역 전체가 흔적도 없이 소멸할 거다!"

"시끄러워. 가만히 있어."

에드릭은 제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시선은 성궤 전면에 떠오른 붉은색 카운트다운 숫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59. 58. 57.

초읽기는 가차 없이 내려가고 있었다. 동시에 석실 천장과 벽면의 틈새에서 짙은 보랏빛의 기화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허파를 녹여 버릴 듯한 극독의 마력이었다. 바닥의 석판들이 기화 마력에 닿자마자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 경고 !!!] [주변 대기 중 고농도 마력 독성 침전 중.] [플레이어의 현재 전신 마력 독성 수치: 24%] [경고: 마력 독성 수치가 30%를 초과할 경우 생명력 붕괴 프로토콜이 가동됩니다.]

전신의 세포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타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마 Bypass 도관'이 실시간으로 마력을 우회시키며 독성을 정화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유입되는 독기의 양이 정화 속도를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드릭의 입꼬리는 비틀려 올라갔다.

"겨우 이 정도인가, 레오폴드."

천재 대마도사이자 아카데미의 흑막. 그가 설계한 함정은 확실히 치명적이었다. 보스를 클리어했다고 믿고 안심한 침입자들을 단 60초 만에 기화 마력으로 녹여 흔적도 없이 증발시키는 완벽한 청소 시스템.

보통의 마도사라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거나, 결계를 치고 버티다 마력이 고갈되어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드릭은 고인물이었다. 이 게임의 모든 시스템 메커니즘을 뼛속까지 꿰뚫고 있는 유저였다.

"플로렌시아."

"어, 어?"

"움직이지 말고 검끝을 바닥에 고정해."

에드릭이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의 망막 위로 푸른색의 이진법 코드와 로그 데이터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고유 권능: '메커니즘 디버깅(Mechanism Debugging)' 활성화] [연결 대상: 레오폴드의 원격 자멸 시퀀스 통제 노드]

웅웅웅!

공기가 진동했다. 하지만 레오폴드가 구축한 보안 벽은 단단했다. 외부에서의 직접적인 해킹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독립된 폐쇄 회로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이 보안을 뚫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에드릭은 전혀 다른 통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볼카 자카르.'

그 광전사 녀석이 에드릭을 감시하고 추적하기 위해 상시 가동해 두었던 비열한 술식. '마법 마력 흔적 추적(Mana Flow Tracking)'의 실시간 전송 주파수 감지 데이터가 에드릭의 머릿속 메모리 영역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지난 혈투에서 그 주파수를 완전히 차단하지 않고, 일부러 자신의 마 bypass 도관 한구석에 우회 경로로 남겨 두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사냥개 녀석의 침투 경로를 역으로 이용한다."

볼카의 추적 주파수는 아카데미의 메인 네트워크 망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곧, 레오폴드가 관리하는 자멸 장치의 외부 통신 포트와도 교차점을 가진다는 뜻이었다.

에드릭이 손가락을 튕겼다.

파지직!

볼카의 잔존 추적 주파수를 합선 매개체로 삼아, 레오폴드의 자멸 장치 내부 데이터 경로로 에드릭의 디버깅 권능이 강제로 침투했다. 다자간 마력 경로 합선 및 데이터 우회(리다이렉트) 제어가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갔다.

[시스템 로그 시각화 완료.] [자멸 장치 제어 타이머 주소 검출: 0x7FFA08BC] [기본 시스템 틱 레이트(System Tick Rate): 60Hz]

"틱 레이트를 변조한다."

시간을 멈출 수는 없다. 그것은 인과율의 붕괴를 야기하니까. 하지만 시스템이 인식하는 '1초'의 길이를 늘리는 것은 가능하다.

에드릭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마력의 실이 자멸 제어판의 클록 발생기(Clock Generator)를 휘감았다.

[디버깅 명령 인가: 시스템 틱 레이트 가소성(Time Tick Plasticity) 적용] [틱 레이트 강제 변환: 60Hz -> 0.6Hz (100배 지연)]

스우우웅.

기괴한 파열음과 함께, 붉은색 검출판에 흐르던 숫자의 움직임이 비정상적으로 느려졌다.

52…….

…….

…….

한참의 정적이 흐른 뒤에야 숫자가 겨우 하나 줄어들었다.

51.

"이, 이게 무슨……?"

플로렌시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시간이, 아카데미의 절대적인 마도 법칙이 지배하는 자멸 프로토콜의 초읽기가 거의 멈춘 것처럼 늘어져 있었다.

"백 배다."

에드릭이 차갑게 읊조렸다.

"원래라면 50초 뒤에 터졌겠지.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5000초가 생겼다. 약 1시간 20분이지."

"말도 안 돼……. 시간의 흐름을 왜곡했다고? 대마도사 레오폴드의 사설 마법식을 이렇게 간단히?"

"간단하지 않아. 머리가 깨질 것 같으니까 조용히 해."

실제로 에드릭의 관자놀이에는 굵은 핏대가 솟아올랐고, 코끝에서 붉은 피가 한 방울 뚝 떨어졌다. 싱크로율이 극심하게 소모되며 마력 독성이 신경계를 갉아먹는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에드릭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피를 슥 닦아냈다.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사이다를 들이켜기 위해선, 이 정도 통증은 기회비용에 불과했다.

"지금 레오폴드의 원격 모니터에는 우리가 이미 증발했거나, 혹은 시스템 오류로 화면이 멈춘 것처럼 보일 거다. 먹통이 된 모니터를 보며 열불이 나 있겠지."

에드릭은 성궤 앞으로 걸어갔다. 성궤 안에는 화려하게 빛나는 금빛 보석 상자가 놓여 있었다. 누가 봐도 던전 클리어의 최종 보상처럼 보이는 외형이었다.

"에드릭, 보상을 챙겨서 어서 빠져나가자!"

플로렌시아가 재촉했다. 하지만 에드릭은 비웃음을 흘렸다.

"그 상자에 손을 대는 순간 진짜 트랩이 발동해. 이건 눈속임용 가짜다."

"가짜라고?!"

"진짜는 언제나 더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법이지."

에드릭은 금빛 보석 상자를 거칠게 옆으로 밀쳐 버렸다. 그리고 상자가 놓여 있던 성궤 바닥의 벽판을 응시했다. 일반적인 눈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극히 미세한 마력의 이음새가 디버깅 시야에 포착되었다.

[고대 성궤 내부 다층 레이어 감지.] [숨겨진 격납 공간의 보안 해제 프로토콜 우회 중…….]

빠득!

에드릭이 벽판 안쪽의 비밀 고리에 손가락을 걸고 강하게 잡아당겼다. 석판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뒤집히더니, 그 아래 숨겨져 있던 진짜 전설 등급의 수확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톱니바퀴들이 복잡하게 맞물려 스스로 회전하고 있는, 기묘한 형태의 마도 기계 장치였다. 장치 중심부에서는 영롱한 청색 마력이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맥동하고 있었다.

"이건……."

플로렌시아가 넋을 잃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장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수한 인과율의 파동이 석실 전체의 기화 마력을 억누를 정도로 강력했다.

[전설 등급 아티팩트 확보!] [아이템 명: 레오폴드의 도둑맞은 크로노 기어 (Chrono Gear)] [효과: 장착 시 주변 시공간의 마력 흐름을 실시간으로 감지하고, 특정 구역의 마력 틱 레이트를 영구적으로 미세 조정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함.]

"레오폴드가 아카데미 중추를 장악하기 위해 고대 유적에서 훔쳐 숨겨두었던 핵심 부품이지."

에드릭이 크로노 기어를 들어 올려 자신의 서브 공간에 집어넣었다. 성공이었다. 레오폴드가 가장 아끼고 숨겨두었던 전설급 자산을, 그의 눈앞에서 아주 유유자적하게 강탈해 낸 것이다.

그 순간, 플로렌시아의 가슴팍에 새겨진 성검의 문양이 붉게 반응하며 강한 경고음을 내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앗……!"

플로렌시아가 가슴을 움켜쥐며 신음했다. 성검의 문양 주변으로 황금 왕관회 소유의 마력 환류 버그(Mana Backflow Defect)가 조기 작동하려는 조짐이 에드릭의 디버깅 시야에 포착되었다.

[데이터 분석: 황금 왕관회 정예 기사단이 두른 마력 면역 막과 동조하는 환류 경로 감지.] [메모: 해당 버그 데이터를 분석 완료. 추후 플로렌시아의 무기를 플레이어의 신체 마력 우회로와 직접 결합할 경우, 왕관회 정예 기사단의 면역 막을 완벽히 관통파쇄하는 극 카운터 무기로 변환 가능.]

"아직은 때가 아니다."

에드릭이 손을 뻗어 플로렌시아의 성검 손잡이를 꽉 잡았다. 그의 손길이 닿자마자, 날뛰려던 마력 환류 버그가 억눌리며 잠잠해졌다.

"내 뒤에 바짝 붙어."

"에드릭……."

"레이라! 들리나?"

에드릭이 통신기 역할을 하는 마도 아티팩트를 켰다.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레이라의 덜덜 떠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에, 에드릭 님?! 살아 계신 건가요? 방금 지하 구역의 마력 파동이 완전히 폭주해서 소멸 수치가 임계점을 넘었다고 나왔는데……!

"살아 있어. 지금부터 탈출한다. 네가 가진 오토마타 방호 장막의 주파수를 송신해."

- 네, 네?! 하지만 제 방호 장막은 이 정도 규모의 폭발을 막을 수 없어요! 제 연금술 장치들은 전부 도태 등급이라 기화 마력에 닿자마자 녹아내릴―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 주파수 동조해."

에드릭의 단호한 명령에 레이라는 울먹이면서도 빠르게 장치의 동조 신호를 보냈다.

[레이라의 오토마타 방호 주파수 수신 완료.] [플로렌시아의 성검 잔존 정제 마력 확인.] [두 마력 경로의 강제 합성 및 디버깅 저항 배리어(Debug Resistance Barrier) 구축.]

위이이이잉!

플로렌시아의 투명하고 푸른 성검 마력과 레이라의 정교한 기계적 방호 주파수가 에드릭의 디버깅 권능을 통해 하나의 완벽한 다중 구형 배리어로 합성되었다. 서로 다른 스펙트럼의 마력이 기하학적으로 맞물리며, 그 어떤 기화 마력도 뚫을 수 없는 절대적인 상성 방어막이 완성된 것이다.

"가자."

에드릭이 앞장서 걸었다. 콰아아앙!

그들의 뒤편에서 틱 레이트가 왜곡된 채 느리게 붕괴하던 석실이 마침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화염과 기화 마력의 해일이 그들의 뒤를 덮쳤다. 하지만 에드릭이 구축한 합성 배리어는 단 한 치의 균열도 허용하지 않았다.

치지직! 치직!

붉고 보라색인 마력 파편들이 배리어 표면에 부딪혀 불꽃을 일으키며 소멸했다. 그 파멸적인 장막의 파편 사이를, 에드릭은 옆방에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유유히 걸어서 통과했다.

마침내 석실의 이중 철문을 지나, 안전한 대기실 구역으로 발을 디뎠다.

스우우우…….

배리어가 걷히고, 대기실의 시원한 공기가 허파로 들어왔다. 레이라가 구석에서 무릎을 안고 부르르 떨다가, 멀쩡한 모습으로 걸어 나오는 두 사람을 보고 비명을 지르듯 일어났다.

"히익?! 정말로 살아 돌아오신 건가요?! 그 파괴적인 마력 폭풍 속에서 어떻게……!"

"말했잖아. 난 죽지 않는다고."

에드릭이 서브 공간에서 '레오폴드의 도둑맞은 크로노 기어'를 꺼내 레이라의 앞 탁자에 툭 던져놓았다.

"이걸 분석해라. 네 오토마타 제어 기술과 결합하면 엄청난 유물이 나올 거다."

"이, 이건 고대 크로노 기어?! 대마도사님이 평생을 찾아 헤매던 그 전설의……! 이걸 정말로 가져오신 건가요?!"

레이라의 눈이 광기 어린 집착으로 번뜩이기 시작했다. 겁쟁이 같던 모습은 간데없고, 마도 기계의 이면 작동 원리를 파고들 때 나오는 특유의 집착이 그녀의 눈동자를 채웠다.

플로렌시아는 에드릭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이전의 오만함이나 의구심 대신, 완전한 주종 관계에서 비롯된 절대적인 경외심으로 채워져 있었다.

"에드릭, 네 뜻대로 내 검을 쓰겠다. 네가 가는 길이 설령 아카데미의 파멸이라 할지라도."

"착각하지 마. 널 살려둔 건 쓸모가 있어서니까."

에드릭이 차갑게 선을 그었지만, 플로렌시아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때였다.

위우우우우웅-! 위우우우우웅-!

갑자기 아카데미 대기실 벽면에 설치돼 있던 지상 통제 패널에서 붉은 경고등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귀가 찢어질 듯한 비상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아카데미 전체를 흔드는 거대한 마력 방송이 공전을 울렸다.

[!!! 시스템 비상 계엄 선포 !!!] [경고: 지하 3구역 고대 보물 창고에서 '404 보안 보물 누실 및 무단 점유자'가 검출되었습니다.] [감지된 탈취품: 레오폴드의 크로노 기어] [대마도사 레오폴드 크리스판의 직속 명령을 하달합니다.]

지상 통제 패널의 화면에 레오폴드의 일그러진 얼굴이 그림자처럼 떠올랐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 내 눈을 속이고 감히 내 위대한 승천의 제물을 훔쳐 간 쥐새끼가 누구냐……!

- 아카데미 전역의 경비대 및 황금 왕관회 소속 기사단에게 공표한다.

- 지금 이 순간부로 아카데미 전체에 '무제한 살해 허가 계엄 계고령'을 선포한다. 침입자와 그 동조자들을 발견 즉시 사살하라. 그들의 사지를 찢어 발겨서라도 내 크로노 기어를 회수해라!

철커덕! 철커덕!

대기실 너머 복도에서 수백 명의 철갑 기사들이 몰려오는 무거운 발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전체가 에드릭을 죽이기 위한 거대한 도살장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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