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인대 완전 파열. 외측 반월상 연골판 마모율 구십팔 퍼센트. 선수 생명은 사실상 끝났습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의 선고는 차가웠다. 사형 집행장과 다름없었다. 서른 살, 미드필더로서 가장 노련하게 그라운드를 지배해야 할 전성기에 강태오의 양 무릎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쓰레기 더미가 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폭우가 쏟아지는 영동고속도로에서 제어력을 잃은 덤프트럭이 그의 소형차를 덮쳤다. 고막을 찢는 마찰음과 비명, 그리고 암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어이, 강태오! 넋 놓고 서서 뭐 해! 당장 대열에 합류 안 해?"
귀를 찌르는 메가폰 소리에 태오는 번쩍 눈을 떴다.
소독약 냄새 대신 코끝을 찌르는 매캐한 흙먼지 냄새가 훅 끼쳐왔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것은 잔디가 거의 다 죽어 나자빠진 청명고등학교 훈련장의 거친 맨땅이었다. 숨을 들이쉬자 차가운 3월의 바람이 폐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태오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하고 거친 고등학생 시절의 손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닳아 빠진 키카(KIKA) 축구화가 흙먼지 묻은 양말 끝에 덜렁거리고 있었다.
'회귀…… 한 건가?'
머릿속이 핑 돌았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것처럼 날뛰었다. 태오는 반사적으로 무릎을 굽혔다 폈다.
통증이 없었다.
언제나 뼈와 뼈가 직접 맞부딪치며 신경을 긁어대던 그 지옥 같은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관절막 내부가 기름을 친 기계처럼 부드럽게 맞물려 돌아갔다.
그 순간, 태오의 시야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눈앞에 반투명한 스크린이 마치 금융 거래 장부처럼 정교한 격자무늬를 그리며 떠올랐다.
[강골의 장부(Ledger of Steel Bones)가 개방되었습니다.] [소유주: 강태오 (유소년 등급)] [가용 신용 한도: 100.00%] [현재 누적 부하도: 0.00% / 100.00%] [- 양측 무릎 관절 피로도: 0.00%] [- 대퇴사두근 근막 긴장도: 0.00%] [- 아킬레스건 인장 부하: 0.00%]
붉은색 숫자들이 시야 한구석에서 실시간으로 명멸하고 있었다. 태오는 마른침을 삼켰다. 전생의 은퇴 직전, 무릎 부하율 98%에 달해 당장 주저앉아도 이상하지 않던 그 끔찍한 장부가 완벽히 초기화되어 있었다.
"야, 강태오! 귀 먹었어? 감독님이 부르시잖아!"
짜증 섞인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태오의 어깨를 툭 쳤다. 고개를 돌리자 땀에 젖은 청명고 트레이닝복을 입은 동료들이 보였다. 그들의 눈빛에는 은근한 비아냥과 조소가 깔려 있었다.
"저 새끼 요새 경기장만 들어오면 얼타더니 아주 정신을 놓았네." "한물간 천재 소리 듣더니 뇌까지 굳었나 보지. 박성민이 주전 꿰차고 나니까 속이 쓰려서 저러는 거야."
부원들의 수근거림이 고스란히 귓가에 꽂혔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단정하게 정돈된 아디다스 프레데터 축구화를 신은 박성민이 서 있었다. 대한축구협회 고위 임원의 조카이자, 청명고의 새로운 황태자로 떠오른 인물. 박성민은 팔짱을 낀 채 태오를 가소롭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오야,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얼른 라인 서자. 감독님 성질 돋우면 오늘 우리 다 죽어."
우직한 체구의 한준우가 태오의 팔을 잡아끌며 속삭였다. 전생에서 태오의 등 뒤를 묵묵히 지켜주다 무릎 부상으로 먼저 축구화를 벗었던 유일한 친구.
태오가 준우를 바라보는 순간, 그의 시야에 새로운 오버레이가 겹쳤다.
[대상: 한준우] [우측 십자인대 부하도: 82.4% (위험 단계 - 적색 경고)]
태오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준우의 오른쪽 무릎 주변으로 붉은색 스파크가 기분 나쁘게 튀고 있었다. 전생에서 준우가 전방십자인대 파열로 쓰러졌던 시기가 바로 이맘때였다. 최길환 감독의 무리한 혹사 전술이 빚어낸 참사였다.
"새끼들이 빠져가지고 운동장에서 기싸움이나 하고 있어? 전부 대열 맞춰!"
붉은 안면의 사내, 감독 최길환이 메가폰을 흔들며 다가왔다. 낡은 트레이닝복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린 그는 선수를 인간이 아닌 자신의 프로 구단 영전을 위한 제물로 보는 인간이었다.
최길환의 눈빛이 태오에게 머물렀다.
"강태오. 너 요새 페이스 떨어진 거 알고 있지? 이번 춘계대회에서 성과 못 내면 주전 자리는 성민이한테 완전히 넘어간다. 억울하면 운동장에서 증명해. 정신력이 썩어빠져서 몸이 안 움직이는 거야!"
정신력. 희생.
최길환이 입에 달고 살던 그 얄팍한 단어들이 태오의 심장을 차갑게 식혔다. 전생의 태오는 그 가스라이팅에 속아 무릎에 물이 차오르는 와중에도 진통제를 맞아가며 뛰었다. 그리고 쓸모가 없어지자마자 가차 없이 버려졌다.
태오는 속으로 냉소했다.
'이번 생은 다를 것이다.'
그들을 위해 몸을 갈아 넣는 일 따위는 없다. 오직 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이 썩어빠진 판때기를 탈출하기 위한 도구로만 학교를 이용하리라.
"오늘 전술 훈련은 하프라인 부근에서의 다이렉트 전환 빌드업이다."
최길환이 휘슬을 불며 운동장 중앙을 가리켰다.
"미드필더 라인에서 볼을 받으면, 압박이 들어오기 전에 반대편 하프 스페이스로 한 번에 길게 찔러 넣는다. 킥의 정확도가 생명이야. 성민이부터 시작한다."
박성민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볼을 잡았다. 중앙에서 가볍게 트래핑을 한 뒤, 반대편 윙어를 향해 오른발 인스텝 킥을 날렸다.
깡!
맑은 타구음과 함께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하지만 공은 윙어의 발밑이 아닌, 터치라인 밖으로 서너 걸음 비껴가며 굴러갔다. 바람의 영향을 고려하지 못한 거친 킥이었다.
최길환은 짐짓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아깝다! 성민이 킥 궤적은 좋았어. 윙어가 더 빨리 반응했어야지! 다음, 강태오 나와."
명백한 편애였다. 박성민의 실책은 윙어의 활동량 부족으로 포장되었다.
태오가 천천히 볼 앞으로 걸어 나갔다. 주변 부원들의 비웃음 섞인 시선이 느껴졌다. 요새 킥 감각이 완전히 죽었다는 소문이 돌던 태오였다. 최길환 역시 메가폰을 쥔 채 삐딱하게 태오를 바라보았다.
태오는 볼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바람의 세기는 초속 3미터의 우측 편풍. 잔디의 높이는 불규칙하고, 흙바닥의 반발력은 불균일하다.
그는 마음속으로 장부를 호출했다.
'강골의 장부 개방.'
[대환 가능한 신체 자원을 탐색합니다.] [좌측 발목 관절 부하 5.00%를 일시 대환하여 '킥 임팩트 정밀도 및 볼 스핀 제어' 버프를 활성화합니다.] [대환 실행 시 발목 피로도가 임시 상승합니다. 동의하십니까?]
'동의.'
순간 태오의 왼쪽 발목 주변에 따뜻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감각과 함께, 시야에 들어오는 그라운드의 질감과 공의 물리적 궤적이 가상 시뮬레이션처럼 선명하게 그려졌다.
태오가 가볍게 도움닫기를 시작했다.
디딤발을 공 옆 15센티미터 지점에 정확히 내려놓았다. 디딤발의 무릎 각도는 정확히 135도. 상체는 구부러지지 않고 꼿꼿하게 중심을 유지했다. 오른발의 안쪽 단단한 뼈 부위가 공의 정중앙에서 약간 하단을 정밀하게 타격했다.
팍!
둔탁하지만 묵직한 파열음이 운동장을 울렸다.
공은 지면에서 불과 1.5미터 높이로 낮고 빠르게 깔려 날아갔다.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한 슬라이스 회전이 걸려 있었다. 수비수 두 명의 사이, 정확히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정도의 마이크로 스페이스를 통과하는 궤적이었다.
"어……?"
수비수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공은 30미터 너머에서 안쪽으로 잘라 들어가던 윙어의 발밑에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강하게 날아가던 공은 바운드가 되는 순간, 강한 역회전으로 인해 지면에 딱 멈춰 섰다.
윙어는 달리는 속도를 늦출 필요도 없이 가볍게 공을 소유했다. 완벽한 칼날 패스였다.
운동장 전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에 휩싸였다.
비웃음을 준비하던 부원들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최길환 감독 역시 메가폰을 쥔 손을 멈춘 채 멍하니 공의 궤적을 바라보았다. 바람의 저항을 계산하고 구질을 의도적으로 제어하지 않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그야말로 프로 수준의 롱패스였다.
태오는 가볍게 발목을 돌렸다.
[좌측 발목 관절 부하도: 5.00% (안전)] [장부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피로도는 미미했다. 완벽한 폼과 장부의 대환 시스템이 결합하자, 신체에 무리를 주지 않고도 신의 영역이라 불리는 패스를 구사할 수 있었다.
태오는 침묵하는 운동장을 둘러보며 조용히 실소했다. 그들의 수준 낮은 축구에 장단을 맞춰줄 생각은 없었다.
"야."
그때, 일그러진 얼굴로 태오의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가 있었다.
박성민이었다. 그의 이마에는 핏대가 서 있었고, 눈동자는 열등감과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감독의 편애 속에서 청명고의 중심이라 자부하던 그의 자존심이 방금 전 태오의 패스 한 방에 갈기갈기 찢긴 모양이었다.
성민이 태오의 멱살을 잡을 듯이 거칠게 다가서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어쩌다 뽀록으로 하나 걸린 거 가지고 눈빛 깔지 마라. 몸뚱이 무거워서 뛰지도 못하는 퇴물 새끼가 요행 하나 바라고 폼 잡기는. 다음 훈련 때 내 앞에서 그 발목 분질러지기 싫으면 찌그러져 있어."
악의가 가득 담긴 도발이었다.
하지만 태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민의 다리를 흘끗 내려다보며,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운동장 한복판, 두 천재의 기싸움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맞서기 시작했다.
"비켜라."
태오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분노조차 섞이지 않은, 그저 눈앞의 귀찮은 장애물을 치우려는 듯한 무감각한 어조였다.
"디딤발 무릎 각도도 제어 못 하면서 누굴 가르치려 드는 건지 모르겠군. 킥을 찰 때 골반이 완전히 열려 있으니까 볼이 아웃사이드로 밀리는 거다. 내 발목 걱정하기 전에 네 디딤발 안정성이나 신경 쓰지 그래."
"이 새끼가……!"
박성민의 얼굴이 단숨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엘리트 코스만 밟아온 그에게 이런 직설적이고 뼈를 때리는 기술적 지적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당장이라도 주먹이 날아올 듯 성민의 어깨가 험악하게 들썩였다.
삑-!
귀가 먹먹할 정도로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운동장을 찢었다. 최길환 감독이 메가폰을 흔들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거기서 뭐 해! 훈련 중에 사담 나누라고 운동장 열어준 줄 알아?"
최길환의 눈은 매섭게 태오를 향해 있었다. 방금 전 태오가 보여준 완벽한 롱패스는 그의 계산에 없던 돌발 변수였다. 자신이 밀어주는 황태자 박성민의 입지가 흔들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강태오. 방금 패스는 운이 좋았을 뿐이다. 축구는 롱패스 한 번으로 끝나는 스포츠가 아니야. 현대 축구의 핵심은 좁은 공간에서의 압박과 빠른 공수 전환이다."
최길환은 메가폰 끝으로 운동장 한구석의 20미터 규격 그리드(Grid) 라인을 가리켰다.
"하프코트 3대3 압박 훈련으로 전환한다. 터치 제한은 투 터치 이하. 수비 조는 볼을 탈취하는 즉시 역습으로 전환하고, 공격 조는 볼을 잃어버린 즉시 전방 압박(Gegenpressing)을 가한다. 태오, 너는 비주전 조로 들어가."
노골적인 편애였다. 박성민을 비롯한 주전급 선수들은 잔디가 그나마 살아 있는 안쪽 구역에 배치되었고, 태오와 한준우를 포함한 비주전 조는 흙먼지만 가득한 맨땅 구역으로 밀려났다.
맨땅에서의 급격한 방향 전환은 무릎과 발목 관절에 가해지는 지면 반발력을 극대화한다. 마찰력이 불규칙해 까딱하다간 인대가 늘어나기 십상인 가혹한 환경이었다.
"준우야, 무리하지 마."
태오가 낮게 속삭였다.
"어? 어…… 알았어."
한준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오른쪽 무릎을 가볍게 두드렸다. 하지만 태오의 시야에는 준우의 무릎 주변에 명멸하는 불길한 적색 경고등이 선명했다.
[대상: 한준우] [우측 십자인대 부하도: 84.2% (위험 단계)]
수치가 그새 더 올랐다. 최길환의 무식한 혹사 전술이 이미 준우의 인대를 끊어지기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간 것이 분명했다.
삑-!
훈련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자마자 좁은 그리드 안에서 거친 몸싸움이 시작되었다.
볼을 잡은 박성민이 비주전 조의 압박을 가볍게 벗겨내며 비아냥거렸다.
"야, 뺏어봐! 빌빌대지 말고!"
성민의 짧은 힐패스를 받은 윙어가 준우의 측면 공간으로 치고 들어갔다. 최길환 감독의 고함이 터졌다.
"한준우! 적극적으로 압박 안 해? 발 뻗어!"
그 소리에 준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감독의 눈 밖에 나면 대학 진학도, 프로 행도 끝이라는 압박감이 그의 육체를 지배했다. 준우는 거친 흙바닥을 디디며 무리하게 몸을 틀었다.
비접촉 상태에서의 급격한 감속과 회전.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가장 전형적인 생체역학적 메커니즘이었다.
[경고!] [대상 한준우의 우측 십자인대 부하도 급증: 89.9%] [임계점 도달 3초 전. 관절 기능 붕괴 위험 감지.]
"준우야, 멈춰!"
태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전생의 기억이 오버랩되었다. 피치 위에 쓰러져 양손으로 무릎을 감싸 쥔 채 절규하던 준우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독선과 강박에 갇혀 동료를 믿지 못했던 전생이었지만, 이 비극만큼은 다시 볼 수 없었다.
[시스템 제안] ['강골의 장부'의 특별 대환 매커니즘 '채권 채무 인수(Debt Transfer)'가 감지되었습니다.] [타인의 부상 리스크를 소유주의 자산(신용 한도)으로 강제 대환할 수 있습니다.] [대환 시 소유주의 좌측 무릎 관절 부하도가 즉시 35.00% 상승하며, 과부하로 인한 강박 신경증 리스크가 발생합니다. 실행하시겠습니까?]
머릿속이 터질 듯한 경고음으로 가득 찼다.
겨우 고쳐놓은 무릎이었다. 다시 그 지옥 같은 통증과 리스크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저 멀리, 준우의 디딤발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뒤틀리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준우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기 직전이었다.
태오는 이빨이 깨질 정도로 턱을 악물었다.
'……실행해!'
주문이 떨어짐과 동시에, 태오의 왼쪽 무릎에 불로 지지는 듯한 지독한 통증이 벼락처럼 내리쳤다.
"으윽……!"
신음이 목구멍을 찢고 나오려는 찰나, 시야를 가득 채운 경고 창이 붉은 핏빛으로 번뜩였다.
[대환 성공. 대상 한준우의 부하를 강제 인수합니다.] [소유주 강태오의 좌측 무릎 부하도: 35.00%] [부작용: 1단계 강박 신경증(Obsessive Compulsive Neurosis)이 활성화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준우의 몸이 허공에서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쿵!
"준우야!"
태오가 절뚝이는 다리로 준우를 향해 달렸다. 과연 준우의 다리는 무사한가. 그리고 자신의 몸을 갉아먹기 시작한 이 '장부의 대가'를 태오는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