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차가운 유리 가장자리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잔을 타고 올라오는 푸르스름한 액체는 단순한 물리적 액체가 아니었다. 고막 안쪽을 찌릿하게 긁어대는 초고주파의 공명이 혀끝을 대기도 전에 신경망을 따라 가늘게 퍼져 나갔다. 웅웅거리는 미세한 진동. 머릿속 우뇌의 한구석이 불에 달군 바늘로 찌르듯 욱신거렸다. 마인드 아키텍처의 최종 포맷 약물. 이것이 내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내 지하실의 원고도, 은혜의 모순된 수칙들도, 그리고 내가 나로서 존재했던 마지막 파편마저도 완전히 지워져 백지가 되리라.

"여보... 이제 이 마지막 약을 먹고... 우리 새로 세상을 쓰자마자요..."

은혜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턱끝을 받쳐 올리는 힘은 기이할 정도로 억척스러웠다. 내 몸의 근육들은 이미 그녀가 주입한 인지 제어 수칙들에 길들여져 있었다. 거역하려 할 때마다 척수에서부터 차오르는 마비감과 구토감이 사지를 묶어버리는 탓이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투명한 눈물이 맺혀 흐르고 있었지만, 그 입꼬리만큼은 자로 잰 듯이 완벽한 호를 그리며 멈춰 있었다. 슬픔과 구원이 기괴하게 뒤섞인 얼굴. 얼굴 바로 앞에서 풍겨오는 장미 향수 냄새 밑바닥에서, 시큼하고 지독한 살점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섞여 들었다.

탄내. 3년 전 그 불길 속에서 나를 안고 기어 나오던 그녀의 왼쪽 어깨에서 나던 바로 그 냄새였다.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돼요. 도진 씨의 시스템도 오늘 밤이 마지막이니까... 이제 다 끝날 거예요..."

은혜의 목소리가 귓전을 부드럽게 간질였다. 마치 덫에 걸린 짐승을 달래는 사육사의 나직한 흥얼거림 같았다. 유리잔이 더 깊숙이 밀려 들어와 이가 맞닿아 딱딱 소리를 냈다. 푸른 액체의 표면이 흔들리며 내 눈동자를 반사했다.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차가운 계산기가 빠르게 작동하고 있었다. 이 완벽한 가상 낙원의 지배자이자 설계자. 하지만 그녀 역시 자신이 만든 규칙의 노예에 불과했다. 그녀는 내가 '완전히 순응하는 피해자'로 남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 갈망이 바로 그녀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은혜야."

내가 아주 나직하게, 부서지는 모래알 같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남편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고 믿는 순간에 터져 나온, 가상 낙원 이전의 진짜 이름. 은혜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틈을 타, 나는 서서히 상체를 뒤로 눕히며 유리잔을 입술에서 떼어냈다.

"당신... 어깨가... 아직도 그렇게 타들어 가고 있는데..."

"여보...?"

"이 약을 먹으면... 그 불길 속에서 나를 구해주던 당신의 마지막 모습마저... 내 머릿속에서 영원히 지워지겠지."

은혜의 완벽했던 미소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잎새가 떨리듯 그녀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3년 전의 화재. 그녀가 그토록 숨기려 했던, 그리고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내 기억을 왜곡하면서까지 덮어두려 했던 실제의 상처. 내 입에서 흘러나온 구체적인 과거의 단어들이 그녀의 이성적인 방어벽을 사정없이 흔들고 있었다.

"무슨...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어서 마셔요. 마셔야 당신이 살 수 있어요..."

그녀는 다급하게 유리잔을 내 입가로 다시 밀어붙였다. 하지만 그 다급함이 오히려 기회를 만들었다. 시선이 내 입술과 어깨의 흉터 기억 사이에서 방황하는 찰나, 나는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잔을 받아 마시는 시늉을 했다.

꿀꺽, 목울대를 크게 움직였다.

입안 가득 차갑고 비릿한 금속 맛의 액체가 고였다. 혀 세포 하나하나가 마비되는 듯한 극렬한 통증이 즉각적으로 밀려들었다. 삼키면 끝장이다. 나는 액체를 삼키지 않고 혀 뒤쪽 구강저에 억지로 가두었다. 고통으로 눈물이 핑 돌았지만, 정신을 집중했다.

내 시선은 이미 서재 탁자 밑을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은혜가 집안의 공기 정화와 미관을 위해 배치해 둔 대형 수경재배 화분이 있었다. 화분 아래쪽에는 수조의 물을 여과하고 주기적으로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벽면 외부로 직접 통하는 플라스틱 재질의 자동 밸브 배기통이 연결되어 있었다. 포레스트 힐 402호의 모든 배관 구조를 머릿속으로 역추적해 둔 덕분이었다. 이 배기통은 이중 방음벽을 관통해 저택 외부의 배수관으로 곧장 흘러내려 가도록 설계된 유일한 물리적 통로였다.

나는 기침을 크게 터뜨리는 척하며 상체를 앞으로 꺾었다.

"콜록! 쿨럭!"

오른손으로 가슴을 쥐어짜며 탁자 아래로 깊숙이 몸을 숙였다. 은혜의 가냘픈 손이 내 등 뒤를 다급하게 두드렸다.

"여보! 괜찮아요? 천천히... 천천히 삼켜요..."

그녀의 시선이 내 등 뒤에 머무는 짧은 몇 초의 순간.

나는 입안에 고여 있던 푸른 액체를 탁자 밑 수경재배 화분 배기통의 열린 밸브 구멍을 향해 정확하게 토해냈다. 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입술을 배기통 입구에 밀착시킨 채 고스란히 쏟아부었다. 잔 속에 남아 있던 나머지 액체 역시, 기침을 하며 허우적거리는 손짓으로 탁자 밑 화분 수조관 틈새로 슬그머니 흘려보냈다.

쪼르륵, 하며 액체가 어두운 플라스틱 관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배기통 내부의 금속 필터와 마취 약물의 고주파 성분이 마찰하며 찌르르하는 미세한 정전기 음이 발생했지만, 내 거친 기침 소리에 묻혀 은혜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완벽한 유기였다. 기만의 도구였던 독배는 그렇게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흘러 내려갔다.

나는 빈 유리잔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쨍그랑! 얇은 유리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튀었다. 잔해들이 달빛을 받아 날카롭게 빛났다.

"아..."

은혜가 깨진 잔을 바라보며 넋이 나간 듯한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묻은 푸른 잔여물이 허공에서 차갑게 말라붙어 가고 있었다.

나는 바닥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을 지배하던 마비감이 서서히 걷히는 것이 느껴졌다. 약물을 삼키지 않았으니, 뇌신경을 짓누르던 가상의 족쇄도 더는 힘을 쓰지 못했다. 내 눈빛은 이전의 멍청하고 순종적인 남편의 것이 아니었다. 극도로 차갑고, 모든 진실을 꿰뚫어 보는 소설가 정우현의 눈이었다.

나는 나를 붙잡으려던 은혜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고 밀쳐냈다.

"아악!"

가녀린 신체가 뒤로 밀려나며 서재 벽면에 거칠게 부딪혔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가 비뚤어지며 이가 맞지 않는 문틀처럼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은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턱끝에서 툭, 투둑 떨어졌다.

"여보... 당신... 어떻게..."

"연극은 끝났어, 은혜야."

내 목소리는 서재의 차가운 정적을 가르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내 발걸음 소리가 방음벽에 부딪혀 기괴하게 왜곡되어 되돌아왔다.

"이 완벽한 감옥 속에서, 당신이 매일 아침 내게 건넨 수칙들... 오후 3시의 초인종은 환청이니 무시하라고? 욕실 거울의 습기를 매 시간 닦아내라고? 전부 내가 바깥세상과 연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추악한 장치들이었지."

"아니야... 나는, 나는 당신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나는 비웃음을 흘렸다. 가슴 속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가 목구멍을 뜨겁게 달구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오히려 더 서늘하고 건조하게 내려앉았다.

"당신이 설계한 진짜 형벌은 나를 살리는 것인가, 아니면 내 자아를 완전히 갈기갈기 찢어서 죽이는 것인가? 대답해 봐!"

"우현 씨!"

은혜가 울음을 터뜨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어깨가 애처롭게 흔들렸다. 그 흔들림 속에서, 옷감 너머로 비치는 왼쪽 어깨의 일그러진 화상 흉터 자국이 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지독한 탄내와 함께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진짜 기억의 파편들.

3년 전, 그 불타던 집에서 나를 구하기 위해 온몸으로 불길을 막아섰던 그녀의 헌신은 진짜였다. 하지만 그 헌신의 대가로 그녀가 선택한 것은 나를 영원한 정신적 불구로 만들어 자신의 곁에 묶어두는 지옥이었다. 주치의 김도진과 결탁하여 내 뇌를 유린하고, 가짜 피해자 정체성을 주입해 이 포레스트 힐 402호라는 차가운 실험실에 나를 가둔 것이다.

"당신은 나를 사랑한 게 아니야."

나는 그녀의 눈앞에 손가락을 들이대며 단호하게 선언했다.

"당신은 단지 통제할 수 있는 인형이 필요했을 뿐이지. 과거의 추악한 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나라는 존재를 당신의 입맛대로 재창조한 거야. 하지만 봐, 나는 망가지지 않았어."

은혜의 눈동자가 공포로 물들었다. 평생을 지탱해 온 가상 낙원의 지배권이 완전히 붕괴되는 순간을 목도한 인간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였다. 완벽한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오직 도망치고 싶은 나약한 인간의 일그러진 민낯만이 남았다.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은혜의 전용 태블릿 PC를 거칠게 낚아챘다. 화면에는 포레스트 힐 402호의 중앙 제어 시스템 소프트웨어가 활성화되어 있었다. 화면 구석에서 깜빡이는 주파수 강도 그래프. 이 집 전체를 외부 세계와 완벽히 차단하고, 내 오감을 왜곡하던 무선 감쇄 음향벽의 핵심 엔진이었다.

도진의 해킹 로그에서 빼내어 머릿속에 각인해 두었던 관리자 바이패스 코드를 기억해 냈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정적 속에서 타악기처럼 날카롭게 울렸다.

[SYSTEM RESET PROTOCOL: ACTIVE]

화면에 붉은색 경고 창이 점멸했다. 집안의 모든 무선 시스템과 차단 주파수 엔진을 한꺼번에 정오식 전원으로 오프화하는 강제 명령어였다.

"안 돼... 우현 씨, 제발... 그걸 끄면... 그들이 들어와요... 당신을 데려갈 거라고요!"

은혜가 바닥을 기어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지만, 나는 그녀의 손을 차갑게 뿌리쳤다. 그리고 태블릿 화면 중앙의 'EXECUTE' 버튼을 강하게 눌렀다.

지이이잉-.

서재 벽면 내부에서 흐르던 묵직한 고주파의 진동음이 단숨에 사그라들었다. 마치 거대한 기계 장치의 심장이 멈추는 듯한 소리였다. 뒤이어 집안 전체를 감싸고 있던 특유의 먹먹하고 인공적인 고요함이 깨져 나갔다.

귀가 뚫리는 듯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유리창 너머로 들리는 거친 바람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밤벌레 소리가 날것 그대로 내 고막을 때렸다. 마인드 아키텍처의 가상 장벽이 완전히 붕괴된 것이다. 402호는 더 이상 은혜의 요새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하고 무력한 콘크리트 상자에 불과했다.

"아아..."

은혜는 절망적인 신음을 내뱉으며 바닥에 완전히 엎어졌다. 그녀의 세계가 종말을 고한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철컥.

고요해진 집안을 울리는 극도로 선명한 금속성 마찰음. 현관문의 디지털 도어락이 외부에서 강제로 해제되는 소리였다. 주파수 차단벽이 꺼지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외부의 침입자가 움직인 것이다.

쿵! 쾅!

거실 정문이 강한 힘에 걷어차여 열리는 소리가 서재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거칠고 무거운 군화 발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짓밟으며 빠르게 다가왔다.

나와 은혜의 시선이 동시에 서재 문을 향했다.

탁, 서재 문이 거칠게 열렸다. 문틀 사이에 내려앉은 그림자 속에서, 땀과 광기로 번들거리는 얼굴이 드러났다. 형사 강태석이었다. 그의 한쪽 손에는 묵직한 검은색 권총이 들려 있었고, 총구는 망설임 없이 나와 은혜를 번갈아 겨누었다.

"결국... 직접 문을 열어주는군, 정우현 소설가님."

태석이 이빨을 드러내며 기괴하게 웃었다. 권총의 방아쇠를 당길 듯 팽팽하게 긴장된 그의 손가락이 달빛 아래에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