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서부경찰서 제3취조실의 공기는 섭씨 18도에 고정되어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은 1초에 약 예순 번씩 미세하게 진동하며 고주파 음을 뱉었다. 지익, 지이익. 고막을 긁는 소음이 사방을 뒤덮은 방음용 연질 발포폼 벽면에 부딪쳐 둔탁하게 꺾였다. 철제 테이블 위에 놓인 하태신의 양손은 차가운 수갑에 묶인 채 미동조차 없었다. 손목을 조여 오는 아연 도금 강철의 감촉은 서늘했고, 살갗에 닿는 금속의 온도는 그의 체온을 빠르게 빼앗아 가고 있었다.

하태신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망막 뒤편, 전두엽의 깊은 심연에서부터 정교한 격자무늬의 장부가 펼쳐졌다. 평생의 모든 순간을 초 단위로 기억하는 과잉기억 증후군. 그러나 지금 그의 기억 속에는 잔혹하게 도려내 진 공백이 존재했다. 아내 한연희가 살해당하던 그 날 밤의 특정 4시간. 그 암전된 시간이야말로 그를 이 좁고 어두운 밀실로 끌어당긴 덫이었다.

머릿속에서 뜨거운 열감이 치솟았다. 전두엽의 미세혈관들이 터져 나가는 듯한 자극과 함께, 콧잔등 끝으로 매캐한 타는 냄새가 스쳤다. 뇌세포가 연소하고 있었다. 진실을 보기 위해 초감각 연산 장치를 가동할 때마다 지불해야 하는 가혹한 등가교환의 대가였다.

머릿속 장부의 첫 페이지가 찢겨 나가며, 아내 연희와 함께했던 어느 봄날의 기억이 하얗게 바스러졌다. 노란 후드티를 입고 카페 테라스에 앉아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던 연희의 입 모양이, 그녀가 건네던 다정한 목소리의 주파수가 영구히 소실되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심장 부근이 뻐근하게 조여들었지만, 태신의 표정은 오히려 유리처럼 차갑게 굳어갔다. 슬퍼할 시간조차 사치였다. 연희를 죽인 진범을 찾아 지옥으로 보내기 전까지는, 이 뇌세포 한 줌마저 기꺼이 불태워야 했다.

태신은 고개를 살짝 숙여 철제 테이블 아래쪽을 응시했다.

시각과 촉각, 공간 인지 능력이 극도로 증폭되며 테이블 밑바닥의 미세한 구조가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상판 아래, 보이지 않는 음지에 덧대어진 보강용 프레임 공정의 결함이 보였다. 용접선이 매끄럽지 못하고 미세하게 갈라진 틈새. 그리고 그 틈새 사이에 은밀하게 밀착되어 있는 가로 3센티미터, 세로 1센티미터의 소형 송신기 부품이 감지됐다.

정식 수사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 불법 도청 장치였다.

태신의 동공이 미세하게 수축하며 장비 표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일련번호를 스캔했다.

[SN-9942-TX]

경찰 청사 내부에서 사용하는 보안 등급 외의 사설 장비였다. 백야 재단의 그림자가 이미 이 경찰서 깊숙한 곳까지 뻗어 있음을 증명하는 확실한 물증. 태신은 그 번호를 머릿속 기억 장부의 최상단에 또렷하게 각인시켰다. 이 밀실은 적들이 파놓은 함정이지만, 동시에 외부의 모든 간섭이 차단된 자신만의 완벽한 전장이었다.

철컥.

무거운 철제 문이 열리며 탁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들어선 사내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가죽 구두 굽이 바닥을 짓이기는 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적의가 실려 있었다. 강력계 25년 차 베테랑 팀장, 임철주였다. 그의 거친 손에는 누렇게 바랜 수사 기록철과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임철주는 의자를 거칠게 빼고 앉으며 종이컵을 테이블 한가운데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믹스커피의 달콤하고 텁텁한 냄새가 취조실의 서늘한 공기를 오염시켰다.

"하태신."

임철주가 담배 찌든 내가 섞인 목소리로 태신의 이름을 뱉었다. 그의 눈빛은 굶주린 맹수처럼 번들거렸다.

"자네가 제 발로 기어들어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보통 아내 목을 그은 놈들은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발버둥을 치거든. 그런데 제 발로 경찰서 정문을 걸어 잠그고 취조실로 들어오다니. 역시 대단한 프로파일러 나리셔."

태신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임철주의 목덜미와 흉부의 움직임에 고정되어 있었다.

머릿속 장부가 실시간으로 임철주의 신체 데이터를 계량하기 시작했다.

[대상: 임철주] [맥박수: 분당 88회 -> 92회 (상승 중)] [호흡 주기: 2.2초 (얕고 빠름)] [동공 상태: 좌측 동공 미세 수축, 시선이 테이블 좌측 하단을 주기적으로 회피함] [의도 분석: 확증 편향에 따른 흥분 상태, 동시에 외부 감시(도청)를 의식한 긴장감 누출]

"형사님."

태신의 건조하고 고요한 목소리가 취조실 벽면에 부딪쳐 반사되었다. 감정이 거제된, 마치 기계가 뱉어내는 듯한 서늘한 음색이었다.

"커피를 탈 때 설탕을 세 스푼 넣으셨군요. 맥박이 비정상적으로 빠릅니다. 게다가 들어오실 때부터 왼쪽 어깨가 미세하게 처져 있어요. 3년 전 검거 작전 때 다친 회전근개 파열의 후유증이 도진 모양입니다. 날씨가 흐려서 통증이 심한 겁니까, 아니면 저를 마주하는 게 생각보다 버거우신 겁니까?"

임철주의 눈썹이 험악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턱근육을 질기게 씹으며 상체를 한층 더 앞으로 밀착시켰다.

"주둥이 터는 버릇은 여전하군. 네놈이 아무리 잘난 척을 해봐야 너는 지금 아내를 죽인 살인 피의자야. 네 집 안방에서 흘러나온 연희 씨의 피가 거실 복도까지 적셨어. 그리고 그 현장에 있던 건 네놈 하나뿐이었지. 기억이 안 난다고? 해리성 기억상실? 웃기지 마. 네놈이 짠 완벽 범죄 시나리오의 마지막 조각이 고작 정신병자 흉내냐?"

임철주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쾅 하는 파열음이 취조실을 울렸지만, 태신의 눈꺼풀은 단 1밀리미터도 떨리지 않았다.

"형사님의 호흡 주기가 1.8초로 단축되었습니다. 분노 수치가 임계점에 달했다는 뜻이죠. 하지만 그 분노의 이면에는 초조함이 깔려 있습니다."

태신이 상체를 뒤로 기대며 수갑을 찬 양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쇠사슬이 부딪치는 쇳소리가 기괴할 정도로 맑게 울렸다.

"왜냐하면, 현장에서 발견된 제 지문과 혈흔만으로는 기소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니까요. 제가 연희를 찔렀다는 직접적인 흉기도 찾지 못하셨고, 가장 중요한 '범행 동기'가 빠져 있습니다. 평생 아내만을 위해 살았던 과잉기억 증후군 환자가 아무런 징후도 없이 아내를 살해했다? 배심원들이 그 소설을 믿어줄 것 같습니까?"

"이 새끼가 진짜……!"

임철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고, 굵은 목줄기가 터질 듯이 팽창했다. 당장이라도 태신의 멱살을 움켜잡을 듯한 기세였다.

하지만 태신은 그 험악한 기세 속에서도 오직 수치만을 읽어 내려갔다.

[임철주 맥박: 분당 105회] [호흡: 거칠고 불규칙함] [안면 근육 미세 떨림 강도: 상] [결론: 심리적 제어권 완전히 상실. 유도 질문 투입 최적기.]

태신이 나직하게 비웃음을 흘렸다. 입꼬리만 미세하게 끌어 올린 서늘한 미소였다.

"형사님. 어차피 이 방 안에는 우리 둘뿐이고, 저기 매립된 도청 장치 너머로 우리 대화를 엿듣고 있는 누군가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니 가식은 이쯤 하죠. 유도 신문을 하실 거라면, 차라리 제가 판을 깔아드리겠습니다."

"뭐라구?"

"질문은 형사님이 하는 게 아닙니다. 이 방의 주도권은 처음부터 저에게 있었으니까요."

태신의 목소리에는 거만함을 넘어선 절대적인 확신이 서려 있었다. 피의자 신분으로 취조실에 갇힌 처지임에도, 그의 태도는 마치 면접관이 미숙한 피면접자를 내려다보는 듯했다.

임철주는 머리끝까지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25년 동안 온갖 흉악범을 상대해 보았지만, 이토록 오만하고 자신을 철저하게 해부하듯 분석하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태신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임철주는 자신이 취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해부당하고 있다는 기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임철주의 거친 숨소리가 취조실의 적막을 깨뜨렸다. 그는 터져 나오려는 욕설을 억지로 삼키며, 서서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이대로 태신의 페이스에 휘말리면 수사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긴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것이다.

"하태신……."

임철주가 이빨을 사려 물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서 핏기가 가시고, 대신 지독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네놈이 머리가 좋아서 잔가지를 잘 쳐내는 모양인데, 진짜 몸통을 보면 과연 그 잘난 주둥이가 계속 열릴지 궁금하군."

임철주는 천천히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의 손이 테이블 위에 놓인 갈색 서류 봉투로 향했다. 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승리를 확신하는 흥분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자네가 그 잘난 머리로 아무리 시뮬레이션을 돌려봐야, 현실은 네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아. 백날 천날 기억이 안 난다고 우겨봐라. 법정이 네놈의 그 얄팍한 연극을 받아줄 것 같나?"

임철주가 서류 봉투의 실타래를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취조실의 정적 속에서 비정상적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

태신은 눈을 감지 않았다. 머릿속 장부의 카운터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아내와의 기억이 또 한 조각 연소하는 통증이 뇌리를 스쳤다. 이번에는 연희와 함께 갔던 동해바다의 푸른 파도 소리가, 그 차갑고 맑았던 바닷물의 촉감이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져 나갔다.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극심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강타했지만, 태신의 눈빛은 더욱 투명하고 예리해졌다.

임철주가 마침내 봉투 안에서 한 장의 고해상도 현장 사진을 꺼내 들었다.

"이걸 보고도 네놈이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지 보자고."

임철주의 손이 공중에서 멈추었다가, 이내 테이블 위로 가차 없이 사진을 내던졌다.

탁.

사진이 철제 테이블 위를 미끄러지며 태신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사진 속에는 어두운 안방 바닥, 붉은 피웅덩이 사이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기괴한 흔적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발자국이 아니었다. 아내 한연희가 쓰러져 있던 바로 옆, 무언가에 긁힌 듯 정교하게 새겨진 격자형의 흉터 자국이었다.

태신의 눈동자가 그 사진을 마주한 순간, 심장 박동이 처음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태신은 가만히 굳어버린 시선으로 사진 속 격자무늬를 응시했다.

기억 장부의 연산 회로가 폭발적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뇌 속 깊은 곳에서 불꽃이 튀는 듯한 작열감이 일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차가운 턱끝에 맺혔다.

툭.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또 하나의 기억 조각이 무참히 바스러졌다. 비가 내리는 정류장, 하나의 우산 아래에서 연희가 자신을 향해 내밀었던 따스한 손길. 그녀의 부드러운 손가락 마디와 손끝에 머물던 은은한 라벤더 향기가 형체도 없이 타버린 재가 되어 흩어졌다. 이제 연희의 손이 어떻게 생겼었는지, 그 손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태신은 영원히 떠올릴 수 없었다.

가슴을 후벼 파는 공허함이 밀려왔지만, 태신의 동공은 오히려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그는 잃어버린 기억의 대가로 얻어낸 물리적 수치들을 정교하게 배열했다.

[사진 분석: 바닥재의 파임 깊이 및 격자형 마찰흔] [바닥 소재: 18mm 두께의 천연 오크 원목, 폴리우레탄 코팅] [변형 임계값 계산: 목재의 섬유방향 수직 압축 강도 기준] [요구 하중: 최소 85kg 이상, 순간 충격력 가산 시 95kg 추정] [태신의 신체 스펙: 신장 181cm, 체중 71kg]

태신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임철주를 바라보았다. 임철주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가 있었다.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하는 사냥꾼의 미소였다.

"왜, 네 그 잘난 과잉기억 증후군으로도 이 사진은 설명이 안 되지?"

임철주가 테이블을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약을 올렸다.

"네 안방 바닥에 선명하게 긁힌 자국이다. 국과수 애들도 놓친 걸 내가 현장 재감식해서 찾아냈지. 네놈이 연희 씨를 칼로 찌르고, 시신을 끌고 가려다 생긴 구두 굽 자국이야. 이 격자무늬, 네 옷방에 있던 수입 수제화 밑창 패턴과 아주 정확하게 일치하더군."

태신의 호흡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시선이 임철주의 동공과 목덜미의 맥박을 훑었다.

[대상: 임철주] [맥박수: 분당 98회 (흥분 상태 유지)] [동공 진동: 우측 편향 (거짓말 혹은 정보 은폐 시의 전형적 반응)] [호흡 패턴: 폐부 깊은 곳에서 나오는 가래 섞인 호흡]

"거짓말이 서투르시군요, 형사님."

태신의 건조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이 자국은 구두 밑창이 아닙니다. 폴리우레탄 코팅이 입혀진 오크 원목을 이 정도로 깊게 파고들려면, 단순한 고무나 가죽 밑창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금속 재질의 무언가가 엄청난 하중을 받아 긁고 지나간 흔적이죠."

"뭐?"

임철주의 미소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게다가 긁힌 방향을 보십시오."

태신이 쇠사슬을 쩔렁이며 사진 속 격자무늬의 시작점을 가리켰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사선 42도 각도로 꺾여 있습니다. 이건 누군가를 끌고 갈 때 생기는 흔적이 아닙니다. 오른쪽 다리에 심각한 장애가 있거나, 특수 제작된 정형외과용 보조기를 착용한 사람이 체중 전체를 지탱하며 발을 끌었을 때 발생하는 궤적입니다."

태신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철제 테이블에 수갑이 부딪치는 둔탁한 파열음이 방안을 채웠다.

"제 다리는 양쪽 모두 정상입니다. 체중 역시 71킬로그램에 불과하죠. 이 정도 깊이의 영구 변형을 원목에 남기려면, 최소 85킬로그램 이상의 거구가 한쪽 발에 비정상적인 압력을 가해야만 합니다. 즉, 진범은 오른쪽 다리가 불편한 거구의 남성이라는 뜻입니다."

임철주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의 호흡 주기가 순간적으로 멈췄다가 급격하게 가빠졌다. 태신의 정교한 분석이 그의 억지 기소를 정면으로 받아치고 있었다.

"소설 쓰지 마! 네놈이 몸무게를 늘리기 위해 무거운 짐을 들고 있었을 수도 있잖아!"

"그렇다면 양발의 압력이 균등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장에는 오직 이 오른쪽 다리의 '격자형 긁힘'만 존재하죠. 마치 한쪽 다리로만 지탱하며 연희를 살해했다는 뜻입니다."

태신의 목소리에 서늘한 한기가 서렸다.

"그리고 가장 흥미로운 점은 따로 있습니다."

태신은 테이블 아래, 아까 스캔해 두었던 불법 도청 장치 [SN-9942-TX]가 숨겨진 위치로 시선을 던졌다.

"이 사진은 공식 수사 기록에 누락되어 있었습니다. 현장을 통제하고 감식반을 지휘한 건 서부서 강력계가 아닌, 본청에서 내려온 특별수사팀이었죠. 형사님이 아무리 베테랑이라 해도, 봉인된 현장에 단독으로 들어가 이 사진을 찍어오는 건 불가능합니다."

임철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르게 가셨다. 그의 손끝이 보이지 않게 떨리고 있었다.

"누가 이 사진을 건네주었습니까?"

태신의 시선이 일방향 거울을 통과해, 그 너머 어둠 속에 숨어 있을 누군가를 향했다.

"이 취조실 밑바닥에 도청기를 심어두고, 형사님을 조종해 저를 살인범으로 신속하게 기소하려는 그 배후. 오른쪽 다리를 절뚝이며, 백야 재단의 특수 보조기를 착용하는 그 자가... 지금 이 대화를 듣고 있겠군요."

취조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임철주는 흐르는 식은땀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넋이 나간 표정으로 태신을 응시했다. 자신이 쥐고 흔들려 했던 피의자가, 오히려 자신과 자신을 조종하는 거대한 그림자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바로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취조실의 철문이 거칠게 열렸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값비싼 맞춤 정장 위에 푸른빛이 도는 트렌치코트를 걸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은색 머리가 달린 고급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탁, 탁.

지팡이가 바닥을 때리는 규칙적인 소리. 그의 오른쪽 구두 굽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미세하게 끌리는 소리가 취조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남자의 입가에는 부드러우면서도 가학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백야 재단의 사법 함정을 설계한 엘리트 검사, 강민우였다.

강민우는 지팡이를 테이블 옆에 기대어 세워두며, 태신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과연 명불허전이군요, 하태신 프로파일러."

강민우의 목소리는 매끄럽고 나긋나긋했다.

"하지만 그 뛰어난 대가리가 때로는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법입니다. 방금 그 흥미진진한 가설을 입증할 '진짜 물증'이 방금 서부서에 도착했거든요."

강민우가 품 안에서 얇은 태블릿 PC를 꺼내 태신의 앞에 내려놓았다. 화면 속에는 실시간으로 재생되는 CCTV 영상이 떠 있었다.

비가 내리는 그날 밤의 골목길. 우비를 깊게 눌러쓴 한 남자가 한연희의 집 안방 창문으로 침입하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바람에 우비 모자가 살짝 벗겨지는 순간, 화면 가득 드러난 얼굴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하태신 본인의 얼굴이었다.

"이래도 본인이 아니라고 우기시겠습니까?"

강민우의 눈동자가 기괴한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태신의 머릿속 장부가 격렬하게 비명을 질렀다. 존재하지 않아야 할 자신의 모습이 담긴 가짜 물증. 그리고 그 순간, 태신의 뇌리 깊은 곳에서 연희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마저 연기처럼 흐릿해지며,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극심한 통증이 다시금 그를 덮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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