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주방 콘센트 뒤쪽에서 얇은 기계음이 울렸다. 귀청을 찌르는 고주파 수음이었다. 망막을 뒤덮은 푸른빛 상태창이 붉게 물들었다. 가로획과 세로획이 거칠게 찢어지며 노이즈를 일으켰다.

[시스템 상태 알림] | 구분 | 현재 상태 | 상세 내용 | | :--- | :--- | :--- | | 동기화 | ERROR | 외부 전파 간섭 발생 (오류율 58%) | | 미각 마비 | 12% -> 35% | 물리적 신경 퇴화 진행 중 | | 가이드 | 비활성화 | 실시간 분자 조합률 출력 불가 |

혀끝이 차갑게 식었다.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감각이 사라졌다. 침을 삼켜도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배선우가 보낸 전파 교란 장치의 여파였다. 식약처 전관 유태환 변호사의 사법적 비호 아래 실행된 물리적 공작이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과거 대성 F&B 주방의 기억이 덮쳐왔다. '너는 기계 없으면 쓰레기야.' 최도현이 귀에 대고 속삭이던 비아냥이 이명처럼 울렸다. 진석은 눈을 감았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피해망상과 회피 본능이 고개를 들려 했다. 그는 어금니를 깨물며 주머니에서 가죽 노트를 꺼냈다.

그동안 시스템의 가이드를 보며 매일 밤 기록해 둔 성분 배합 노트였다.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시스템이 꺼졌다면, 시스템이 남긴 데이터를 쓰면 된다.

"글루탐산나트륨 0.12%."

진석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는 정밀 저울 위에 분말을 올렸다. 손 감각은 이미 수만 번의 칼질과 계량으로 다져져 있었다. 상태창의 실시간 수치 유도가 없어도, 손끝이 기억하는 오차는 0.01그램 이하였다.

"이노신산나트륨 0.03%."

미세 스푼으로 백색 분말을 떠서 비커에 담았다. 정확했다. 저울의 디지털 액정이 정확히 0.03g을 가리켰다. 진석은 민동현 셰프가 전수해 준 천연 종균 발효액을 가볍게 흔들었다. 유기산 배합 비율은 이미 뇌리에 공식으로 박혀 있었다.

"젖산 0.05%, 초산 0.02%."

차가운 금속 주방에 비커가 부딪히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렸다. 진석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기계가 아니라, 숫자를 지배하는 전문가였다.

철컥.

주방 뒷문이 거칠게 열렸다. 차가운 빗물 냄새와 함께 감색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맨 처음에 선 인물은 희끗희끗한 반백 머리에 금테 안경을 쓴 사내였다. 식약처 출신 전관, 유태환 변호사였다. 그 뒤로 위생 단속반 조끼를 입은 공무원 세 명이 따랐다.

"강진석 씨입니까?"

위생 점검 팀장 김 주무관이 신분증을 제시했다. 행동에 주저함이 없었다. 잘 짜인 각본대로 움직이는 군인 같았다.

"불법 화학 첨가물 무단 배합 및 성분 허위 표시 혐의로 긴급 현장 점검을 실시합니다. 제보가 접수되었습니다."

유태환이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강진석 셰프. 요즘 푸드 테크니 뭐니 하면서 기계적 수치로 장난을 치신 모양인데. 일반 음식점에서 허용되지 않는 화학적 합성품을 소스에 불법 혼합했다는 내부 고발이 있었습니다. 식품위생법 제15조 위반입니다."

진석은 저울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유태환의 가슴팍에 달린 배지로 향했다. 대성 F&B의 사외이사 배지였다.

"내부 고발이라뇨."

진석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저희 매장은 모든 원재료의 MSDS(물질안전보건자료)와 성분 분석표를 매주 입구에 공시하고 있습니다. 법적 의무 사항이 아님에도 말입니다."

"그 공시가 조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유태환이 서류 봉투를 조리대 위에 던졌다.

"대성 F&B 연구소에서 분석한 강진석 레시피의 분자 구조 분석서입니다. 자연계에 존재할 수 없는 과도한 도파민 유도성 아미노산 결합이 검출되었습니다. 이는 의약품 성분의 불법 도용 혹은 미승인 화학 첨가물 사용의 명백한 증거입니다."

김 주무관이 채수병을 꺼내며 조리대 위의 소스 냄비를 가리켰다.

"샘플을 수거하겠습니다. 분석 결과가 나올 때까지 영업은 잠정 정지 처분됩니다."

"잠깐만요."

주방 입구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단정한 정장 차림의 한연우 변호사였다. 그녀의 손에는 두툼한 가죽 서류 가방이 들려 있었다. 한연우는 유태환 앞으로 걸어와 자신의 변호사 신분증을 내밀었다.

"행정조사기본법 제17조에 의거, 사전 통지 없는 불시 검문은 구체적이고 급박한 위해가 입증되지 않는 한 위법입니다. 대성 F&B의 사설 연구소 분석서는 공인 시험 기관의 시험 성적서가 아니므로 사법적 증거 능력이 없습니다."

유태환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한 변호사. 아직 미숙하군. 식약처 점검국은 행정조사기본법의 예외 조항인 '식품안전상의 긴급한 필요'를 적용할 권한이 있어. 내가 그 법안 초안을 작성한 사람이야."

"그렇습니까?"

진석이 비커를 내려놓으며 유태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진석의 손가락이 태블릿 화면을 두드렸다.

"그럼 이 성적서도 예외 조항에 들어갑니까?"

태블릿 화면에 붉은색 경고 마크가 선명한 성분 분석표가 나타났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지정 공인분석기관 성적서] | 의뢰처 | 강남구청 위생과 (강진석 제보) | | 대상 매장 | 대성 F&B 강남 플래그십 레스토랑 | | 검출 균주 | 낙산균 (Clostridium butyricum) | | 수치 | 기준치 대비 420% 초과 (불합격) | | 비고 | 유통기한 14일 경과 수입산 버터 사용 확인 |

유태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게 무슨……."

"1화 수집 데이터입니다."

진석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최도현의 플래그십 매장에서 사용되는 식자재의 실시간 낙산균 오염 데이터입니다. 제가 보조 시절부터 기록해 둔 대성 F&B의 원가 절감 내부 문건과 대조했습니다. 유통기한이 지난 수입산 버터를 유화제와 섞어 재가공한 흔적입니다. 이 성적서는 어제 날짜로 식약처 본청 위생점검국에 정식 접수되었습니다."

한연우가 가방에서 다른 서류 한 부를 더 꺼냈다. 바래진 종이 위에 붉은색 직인이 찍힌 서류였다. 그것은 한연우의 아버지가 남겨둔 '미완성 레시피 법률 자문서'였다.

"유태환 변호사님."

한연우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대성 F&B가 최근 '미생물 도파민 결합 소스'라는 명목으로 우회 출원한 특허 제202X-00481호에 대해 말씀드리죠. 여기 제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 작성하신 선행 기술 자문서가 있습니다. 대성이 출원한 특허의 분자 결합 구조식과 아버님의 유작 레시피는 99.8% 일치합니다."

한연우가 서류를 유태환의 가슴팍에 밀어붙였다.

"특허법 제29조 제1항 신규성 및 진보성 결여에 해당합니다. 당소는 오늘 오전 9시부로 특허심판원에 해당 특허의 무효 심판 청구서를 송달했습니다. 대성이 청구한 독점 사용권은 법적으로 원천 무효입니다."

주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김 주무관을 비롯한 단속반원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피의자로 지목되어야 할 진석의 주방이 아니라, 고발자인 대성 F&B의 심장이 법적으로 뚫리고 있었다.

"이봐요, 김 주무관님."

진석이 화학 분석용 간이 키트를 가리켰다.

"샘플링 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현장에서 식약처 표준 분석법인 고성능 액체 크로마토그래피(HPLC) 간이 시약 반응을 즉시 진행해 주십시오. 제가 배합한 소스의 화학 첨가물 수치를 이 자리에서 검증하겠습니다."

진석은 비커에 투명한 시약을 떨어뜨렸다. 시약이 소스와 섞이며 푸른빛으로 변했다. 기준치 적합을 나타내는 반응이었다.

"정확히 식품위생법 시행규칙 별표 12의 천연 첨가물 기준치 이하입니다. 오차 범주는 0.001%입니다."

진석이 유태환을 바라보았다.

"전파를 교란한다고 해서, 이미 증명된 과학적 사실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유태환의 입술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손가락이 서류 봉투를 쥔 채 파르르 떨렸다. 전관의 권위를 앞세워 기선 제압을 시도하려던 계획은, 진석과 연우가 준비한 완벽한 사법적·과학적 팩트 폭격 앞에 형편없이 조각났다.

"철수하지."

유태환이 이빨 사이로 말을 뱉었다.

"분석 결과는 법정에서 다시 따지겠어."

"그 전에 영업 방해 및 허위 사실 유포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 소송장부터 받으셔야 할 겁니다."

한연우가 쐐기를 박았다. 단속반원들이 유태환을 따라 도망치듯 주방을 빠져나갔다.

주방 뒷문이 닫히는 순간, 진석의 귓가에 맑은 기계음이 울렸다. 붉은 노이즈가 걷히며 상태창이 원래의 푸른빛을 되찾았다.

[시스템 상태 복구 완료] | 구분 | 결과 | 상세 내용 | | :--- | :--- | :--- | | 미각 마비 | 35% -> 8% | 27% 급격한 복구 성공 | | 포인트 획득 | +1,500 P | 고객 및 관계자 감정 동조 (도파민 급증) |

혀끝에 고였던 돌 같은 마비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침의 맛이 명확하게 느껴졌다. 진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숫자 뒤로 숨지 않고, 법과 과학의 힘으로 정면 돌파해 얻어낸 진짜 승리였다.

"진석 씨, 해냈어요."

한연우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태블릿을 정리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삐- 삐- 삐-.

한연우의 태블릿 태스크바에 대성 F&B 지주회사의 실시간 공시 알림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 뜬 붉은색 헤드라인을 확인한 한연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이게…… 무슨……."

진석이 한연우의 옆으로 다가와 화면을 보았다.

[대성 제1F&B 지주회사 긴급 공시] - 건명: 지정 부동산 신탁 자산 강제 매입 완료의 건 - 대상: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 812-3 일대 (민동현 식당가 포함 상가 건물 12개 필지) - 내용: 대성 제1F&B 지주사는 특수목적법인(SPC)을 통한 백지 신탁 방식으로 해당 지역 토지 및 건물 지분 92.4%를 강제 우회 매입 완료하였음을 공고함. 본 공고 즉시 소유권 이전 등기가 경료되었으며, 익월 1일부터 해당 구역 내 무단 점유 및 임대차 계약 미갱신 필지에 대한 명도 집행을 실시할 예정임.

진석의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민동현 셰프의 전통 노포가 있는 골목이 통째로 대성의 손에 넘어갔다는 선언이었다. 배선우가 준비한 진짜 덫은 레시피 특허가 아니었다. 땅줄기를 통째로 들어내는, 자본의 잔인한 물리적 청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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