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라운드 준비해."
수화기 너머로 배선우 상무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들리자마자, 검은 양복을 입은 사설 경비원 열두 명이 지하 2층 특별 검수실 복도를 빠르게 점거했다. 그들의 구두굽이 대리석 바닥을 찍는 소리가 불길한 박자로 고요한 공판장 지하를 울렸다.
경비원들의 중심에는 식약처 특별사법경찰관의 완장을 찬 남자가 서 있었다. 경인청 단속반 팀장 박종식이었다. 그의 손에는 붉은색 압수수색 표지가 들려 있었다.
"강진석 씨 본인 맞습니까?"
박종식이 검수실 철문을 거칠게 밀치며 들어섰다.
진석은 방금 전 미각이 45%까지 복구되며 살아난 예민한 혀로 입안을 가볍게 굴리던 참이었다. 공기 중에 떠도는 미세한 멸치 육수의 감칠맛과 전통 발효액의 시큼한 초산 향이 분자 단위로 쪼개져 뇌리에 박히는 감각이 생생했다. 그러나 그 감각을 음미할 틈도 없이, 차가운 공권력의 압박이 주방을 덮쳤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조여들었다. 대성 F&B에서 수년간 겪었던 가스라이팅의 기억이 척수를 타고 올라왔다. '너 같은 보조는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던 최도현의 폭언, '네가 만든 건 쓰레기'라며 싱크대에 요리를 쏟아버리던 배선우의 차가운 눈빛. 진석의 어깨가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시스템의 안전한 숫자 화면 뒤로 숨고 싶다는 회피 본능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진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손끝을 타고 흐르는 완벽한 미각의 감각이 그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진석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으나, 이내 이성적인 톤을 찾았다.
박종식이 단속장을 진석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대성 F&B 측으로부터 정식 제보가 접수되었습니다. 강진석 씨가 다음 라운드에 사용하려는 '천연 발효 전용 균주'가 미신고 수입 미생물이거나, 기준치 이상의 유해 식중독균을 내포하고 있다는 혐의입니다. 식품위생법 제4조 및 제22조에 의거, 해당 배양실의 식재료 검수 라인을 전격 봉쇄하고 균주 전량을 압수합니다."
그의 뒤로 사설 경비원들이 냉동 쇼케이스와 배양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배양기 안에는 민동현 셰프가 평생을 바쳐 완성하고, 진석에게 전수해 준 천연 단백질 분해 효소를 품은 '전통 한식 미생물 발효액 종균'이 들어 있었다.
[시스템 알림] [대상 식재료 상태 분석] * 명칭: 민동현의 씨간장 유래 종균 (전통 발효 미생물) * 유산균 및 효소 활성화율: 98.7% * 유해균(식중독균, 낙산균 등) 검출률: **0.00%** * 상태: 완벽히 안전함 (식품위생 표준 가이드라인 적합)
진석은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 닿은 것은 빳빳한 서류 뭉치였다. 이 배틀을 준비하며 한연우 변호사와 함께 수십 번 검토하고 공증을 받아둔 세관 정식 인증 유통 문서였다.
"멈추시죠."
진석이 서류를 박종식의 가슴팍에 내밀었다.
"이건 관세청과 식약처가 공동 보증한 정식 수입 및 배양 승인서입니다. 균주 코드 K-2034. 민동현 셰프가 전수해 준 이 미생물 발효액 종균 데이터는 이미 3주일 전, 생물자원보존기관에 정식 등록을 마쳤습니다. 합법적인 유통 경로를 거친 식재료를 아무런 과학적 근거 없이 압수하겠다는 겁니까?"
박종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서류의 직인을 황급히 읊조렸다.
"이, 이건 단순 수입 서류일 뿐이고... 위생 검사는 별개요! 현장에서 유해균이 검출되면 즉시 폐기 처분할 수 있소."
"유해균이라."
진석이 차갑게 실소를 터뜨렸다. 미각이 완전히 살아나며 그의 코와 혀는 이미 배양실 내부의 완벽한 청결도를 감지하고 있었다. 되려 그의 머릿속 상태창에 다른 장소의 데이터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1화에서 최도현의 플래그십 매장을 스캔했을 때 각인되었던, 유통기한이 임박한 식재료들의 썩은 수치들이었다.
"진짜 유해균이 어디 있는지 알려드릴까요?"
진석이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화면에는 대성 F&B 최도현의 플래그십 매장 주방 내부의 조리 도구 및 식재료 위생 분석 데이터가 표 형태로 실시간 정렬되어 있었다.
[대성 F&B 플래그십 매장 위생 정밀 데이터] * 조리도구 세균 오염도(RLU): 8,400 (법적 기준치: 400 이하) * 냉장고 내 낙산균(Clostridium butyricum) 검출률: **89.2%** (오염 단계: 심각) * 소고기 원산지 표기: 국내산 한우 (실제 성분 분석: 수입산 육우 78% 혼입)
"이건 제가 식약처 위생 표준 점검 포털에 정식 신고 접수한 대성 F&B 플래그십 매장의 실제 낙산균 오염 데이터입니다."
진석의 어조는 건조했으나 힘이 실려 있었다.
"당신들이 진짜 위생 단속반이라면, 합법적인 승인을 받은 내 배양실이 아니라 지금 당장 기준치보다 21배 높은 세균이 검출된 최도현의 주방부터 봉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엉뚱한 곳에 와서 사설 경비원들을 거느리고 공권력을 낭비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박종식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 이 데이터는 검증되지 않은..."
"검증되지 않았다고요?"
지하 검수실 문이 활짝 열리며 날카로운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단정한 정장 차림의 한연우 변호사였다. 그녀의 손에는 가죽 가방과 함께 태블릿 PC가 들려 있었다.
"그 검증, 지금 법적으로 끝내 드리죠."
연우가 박종식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그녀는 가방에서 낡고 바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그것은 대성 F&B의 카르텔에 맞서다 억울하게 기소당했던 그녀의 아버지가 남겨둔 '미완성 레시피 법률 자문서'였다.
"대성 F&B가 우회 출원했던 발효 특허는 이미 무효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문서는 당신들이 오늘 행한 불법 압수수색이 단순한 위생 단속이 아니라, 특정 기업의 사적 이익을 위해 기획된 '공권력 남용'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선행 기술 문헌이자 법적 증거입니다."
연우가 태블릿 화면을 박종식의 얼굴 바로 앞에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법원의 전자 직인이 찍힌 결정문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1민사부] * 사건: 공무원 권한 남용에 따른 직무 행위 위헌 가처분 이의 신청 * 결정 사안: 강진석 요리 연구실에 대한 식약처 및 사설 경비원의 압수수색 집행 즉시 정지. * 효력 발생 시간: 즉시 효력 발생.
"법원으로부터 방금 송부된 임시 명령 가처분 결정본입니다."
연우의 목소리는 차가운 얼음송곳 같았다.
"박종식 팀장님. 대성 F&B 배선우 상무에게 얼마를 받고 이 불법 사찰에 동조하셨는지는 이제 검찰 조사에서 밝히시면 됩니다. 저희는 즉각 공익 신고 무고죄 및 직권남용 혐의로 당신을 형사 고소할 것입니다. 이 가처분 명령을 위반하고 단 1밀리리터의 종균이라도 손을 댄다면, 그 즉시 현행범으로 체포 요청을 하겠습니다."
"이, 이건..."
박종식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려 턱끝으로 툭 떨어졌다. 그의 시선이 허공에서 방황했다. 배선우 상무의 약속만 믿고 저지른 일이었다. 법원의 가처분 결정문과 형사 고소라는 실존하는 법적 수갑 앞에서, 일개 단속반 공무원이 버틸 재간은 없었다.
"철, 철수해."
박종식이 마른침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팀장님? 하지만 배 상무님이..."
사설 경비원 대표가 당황해 물었으나, 박종식은 이미 법적 파멸의 공포에 질려 있었다.
"철수하라고 했잖아! 이대로 진행하면 우리 다 공무원 자격 박탈이야!"
검은 정장의 무리가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빠르게 지하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고요해진 배양실 내부.
진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민동현 셰프의 발효 종균 배양기를 바라보았다. 완벽하게 보존된 종균 데이터가 상태창에 녹색 빛으로 안전함을 알리고 있었다.
[시스템 알림] * 미생물 발효액 종균 안전도: 100% * 평가단의 2차 위생 검증 결과 송부 완료: **무경점(0점 감점) 판정 확정**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연우가 서류를 정리하며 진석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석 씨가 미리 대성 내부 위생 데이터를 확보해 둔 덕분에 법원을 설득하기 수월했습니다. 아버지가 남기신 자문서가 드디어 제 역할을 했네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변호사님."
진석은 주먹을 꽉 쥐었다. 혀끝에서 느껴지는 정밀한 감각이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살아 움직였다. 배선우가 뒤에서 어떤 음모를 꾸미든, 이제 법과 과학적 데이터는 온전히 그의 편이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때는 아니었다. 배선우의 또 다른 카드가 남아 있을 터였다.
'배선우... 네가 수입산 발암 위험 대체 소밀 감미료 공급 계약서를 몰래 체결했다는 사실도 이미 내 상태창에 기록되어 있어.'
진석은 머릿속에 저장된 대성의 극비 화학 감미료 계약서 초안 데이터를 떠올렸다. 다음 주주총회에서 그들의 목을 완전히 꺾어버릴 결정적 무기였다.
그때였다.
공판장 무대 방향과 연결된 지상 통로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지하 배양실까지 흘러들었다.
매캐하고 탄내가 섞인, 인위적인 화학 물질의 연소 냄새였다.
"이 냄새는..."
진석의 섬세해진 미각과 후각이 즉각 반응했다. 가스 누출이었다.
동시에, 천장에 설치된 적색 경보등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고막을 찢는 비상 사이렌을 울리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경고: 인근 조리 구역 내 가스 누출 발생] * 메탄 및 부탄가스 농도: 4.2% (폭발 하한계 근접) * 화재 발생 가능성: 극도로 높음
경연장 쪽에서 최도현이 무리하게 분자요리용 고압 가열 기계의 온도를 올리며 오버클럭을 시도하다가 가스 밸브를 파손시킨 것이 분명했다.
"진석 씨, 대피해야 해요!"
연우가 진석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하지만 진석의 시선은 붉게 점멸하는 비상구 너머, 가스 연기가 차오르기 시작한 지상 무대로 향해 있었다. 최도현의 마지막 자멸이 시작되고 있었다.
진석은 발걸음을 멈췄다. 코끝을 찌르는 냄새는 단순히 가스레인지에서 새어 나온 연료 가스가 아니었다. 미각과 후각이 예리해진 그의 감각이 미세한 화학물질의 타는 냄새를 잡아냈다. 단맛이 비정상적으로 농축된, 불쾌한 단내가 섞여 있었다.
[시스템 알림] [대기 성분 정밀 분석 데이터] * 산소 농도: 16.5% (주의 단계) * 가스 농도: 메탄 3.8%, 부탄 0.9% * 특이 화학 물질: 소밀 감미료 연소 유독 가스 (성분명: 사카린 유도체 B-4) * 발암 위험 물질 검출률: **12.4%** (허용치: 0.00%)
진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소밀 감미료.' 배선우가 수입하려던 발암 위험성 물질이었다. 대성 F&B의 신제품 소스 단가를 낮추기 위해 극비리에 들여온 무허가 화학 첨가물이다.
"단순 가스 누출이 아닙니다." 진석이 연우를 돌아보았다. "배선우가 창고에 쌓아둔 무허가 감미료를 태우고 있어요. 사고를 가장해 증거를 인멸하려는 겁니다."
연우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소방서와 식약처 환경위생과에 동시 신고하겠습니다. 현장 보존이 우선이에요."
진석은 단상 위로 뛰어 올라갔다. 매캐한 회색 연기가 이미 복도와 주방 입구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켁, 켁 하는 거친 기침 소리가 화재경보기의 사이렌 소리 사이로 찢어지듯 들렸다.
주방 중심부. 최도현이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과열되어 시뻘갛게 달아오른 고압 분자 가열기가 서 있었다. 압력 게이지의 바늘은 이미 적색 한계선을 한참 초과해 있었다.
그 옆에서 배선우의 비서가 파란색 드럼통을 굴려 불길 속으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었다. 드럼통 표면에는 영문으로 'S-Sweetener B-4'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
"비키십시오." 진석이 차가운 목소리로 외치며 주방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비서가 흠칫 놀라며 드럼통을 놓쳤다. "강진석... 네가 어떻게 여기에?"
최도현이 연기 속에서 붉게 충혈된 눈으로 진석을 바라보았다. 그의 몰골은 비참했다. 흰색 조리복은 그을음으로 얼룩덜룩했고, 손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진석은 그들을 무시한 채 스마트폰 카메라를 켰다. 드럼통의 라벨과 연소되는 화학 가스의 수치를 실시간으로 캡처했다.
[시스템 알림] [불법 화학 물질 증거 확보 완료] * 대상: 무허가 수입 소밀 감미료 (B-4) * 용량: 약 200L (3개 드럼) * 법적 조치: 식품위생법 제93조(위해식품등의 판매등 금지) 위반 증거력 99.8%
"배선우 상무의 지시입니까?" 진석의 어조는 건조했다. "화재 사고로 위장해 이 유독 물질들을 전부 태워 없애려 한 거로군요."
"닥쳐!" 최도현이 비명을 지르며 가열기 레버를 붙잡았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가 그 서류만 안 들이밀었어도... 대성은 내 거였어!"
그의 정신은 이미 붕괴 직전이었다. 최도현은 압력 게이지가 파괴되기 직전인 가열기의 수동 배출 밸브를 강제로 돌려버렸다.
치이이이이익—!
엄청난 고압의 증기와 함께 미처 연소되지 않은 가스액이 주방 전체로 분사되기 시작했다.
"최도현, 멈춰!" 진석이 경고했으나 이미 늦었다.
스파크가 튀었다. 주방 천장의 환풍구로 빨려 들어가던 가스에 불꽃이 닿는 순간, 거대한 폭음이 주방을 뒤흔들었다.
쾅—!
강한 충격파와 함께 진석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콘크리트 벽면에 부딪힌 진석의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열기와 연기가 순식간에 주방을 채웠고, 출구 쪽 철문이 폭발의 충격으로 꺾이며 그대로 닫혀버렸다.
철문이 걸쇠에 박히며 완전히 잠겨버린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철컥.
"진석 씨!" 문밖에서 연우의 다급한 비명이 들렸으나, 주방 내부의 산소 농도는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진석은 가라앉는 의식 속에서 상태창을 띄웠다.
[시스템 경고] * 현재 산소 잔여량: 12% (의식 상실 위험) * 탈출 가능 루트: 없음 (밀폐 상태) * 남은 시간: **180초**
불길이 덮쳐오는 주방 내부에서, 진석은 벌겋게 타오르는 화염 너머로 최도현과 배선우의 비서가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발밑에는 아직 타지 않은 마지막 소밀 감미료 계약서 원본 파일이 떨어져 있었다.
진석은 숨을 멈추고 계약서로 손을 뻗었다. 생존과 파멸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