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빗방울이 고막을 찢을 듯이 때려 누웠다.

차갑고 비린 쇠 냄새.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액체는 빗물인지, 아니면 전작의 참패와 동료들의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 흘렸던 피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알코올 중독으로 떨리던 늙은 손 대신, 힘이 가득 들어간 단단하고 젊은 손가락이 바닥의 진흙을 움켜쥐었다.

허공을 향해 시선을 올렸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 아래, ‘인페르노’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게 박힌 슬레이트보드가 뒹굴고 있었다. 15년 전. 자신의 데뷔작이자 완벽한 파멸의 시작점이었던 그 아수라장.

태성은 반사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요동쳤다. 단순히 회귀의 충격 때문이 아니었다. 머릿속이 깨질 듯이 아파오며, 눈앞의 허공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파지직!

정전기 같은 소음과 함께 반투명한 푸른빛의 스크린이 허공에 둥둥 떠올랐다. 망막에 직접 투사되는 듯한 기이한 인터페이스. 그것은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

[시네마 빌드 장부 (Cinema Build Ledger)] - 감독: 이태성 (Level 1) - 활성화 씬: ‘인페르노’ 제17씬 - 빗속의 도망자 - 씬 완성도: 8% (최악) - 스태프 피로도: 82% (한계 도달) - 실시간 흥행 예측값: 0.8% (투자금 회수 불가능) - 활성화 인물 트라우마 지수: * 백서진: 99% (자살 임박 / 임계치 초과)

***

“……서진이.”

태성의 입술 사이로 갈라진 신음이 터져 나왔다.

백서진. 자신의 데뷔작에서 주연을 맡았던 천재 배우. 그러나 지독한 메소드 연기의 늪과 아동 학대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첫 촬영 날 밤 이 폐공장 옥상에서 몸을 던졌던 불운의 천재.

그 비극이 태성의 눈앞에서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장부 위에 뜬 99%라는 붉은 수치가 미친 듯이 점멸했다.

태성은 생각할 시간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젖은 시멘트 바닥을 차고 달렸다. 낡은 폐공장의 계단은 비명 같은 삐걱거림을 내질렀다. 허벅지 근육이 팽팽하게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번에는 안 놓쳐. 절대로 안 잃어.’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가슴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던 죄책감이 그를 채찍질했다.

옥상 철문을 거칠게 밀쳐 열었다. 쾅! 철문이 벽에 부딪히며 비명과 같은 소리를 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지옥 그 자체였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회색빛 하늘 아래, 난간도 없는 옥상 모퉁이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비에 젖어 몸에 착 달라붙은 낡은 셔츠. 뼈마디가 앙상하게 드러난 어깨가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고 있었다.

백서진이었다.

그의 발끝은 이미 허공을 향해 반쯤 나가 있었다. 아래는 수십 미터 아래의 콘크리트 바닥이다. 떨어지면 즉사였다.

“백서진!”

태성의 고함이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서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빗물에 젖어 눈가를 가린 머리카락 사이로, 생기를 완전히 잃어버린 잿빛 눈동자가 보였다. 초점이 없었다. 그 눈빛은 이미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감독님…….”

서진의 목소리는 바람에 날려갈 듯 가냘팠다.

“더는 안 되겠어요. 안에서…… 자꾸 그 소리가 들려요. 날 가두던 그 좁은 다락방 냄새가, 이 비 냄새랑 똑같아서…… 숨을 쉴 수가 없어요.”

서진의 발가락이 다시 한번 허공을 향해 움츠러들었다.

태성은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서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저 녀석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영혼을 갈아 넣어 배역을 만드는 천재이자, 그 자학적인 광기에 중독된 환자다. 그를 끌어내리려면 더 자극적이고, 더 살벌한 연출적 충격을 주어야 한다.

태성의 눈빛이 냉혹하게 변했다. 가학적인 방어기제가 그의 입을 열었다.

“비겁한 새끼.”

서진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뭐라고…… 요?”

“예술가 흉내 내지 마, 이 쓰레기 새끼야.”

태성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갔다. 빗물에 젖은 구두가 질척이는 소리를 냈다. 그의 목소리에는 서진을 압도하는 살기 어린 디렉팅이 실려 있었다.

“네가 지금 여기서 뛰어내리면 사람들이 널 천재 연기자로 기억해 줄 것 같아? 아니. 그냥 촬영장 분위기 망치고 도망친 약쟁이, 멘탈 쓰레기 조연 배우 새끼로 끝나는 거야. 네가 그리던 그 위대한 예술은 시작도 못 해보고 충무로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거라고!”

“감독님이…… 뭘 안다고 그래!”

서진이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목덜미에 핏대가 솟구쳤다.

“내가 겪은 그 지옥을! 그 어둠을 당신이 한 번이라도 느껴봤어? 난 매일 밤 그 다락방에서 죽어간단 말이야!”

“알아. 그러니까 연기하라는 거야!”

태성이 마침내 서진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태성은 주저 없이 서진의 젖은 멱살을 움켜쥐었다. 엄청난 악력이 서진의 목덜미를 조였다. 서진의 호흡이 턱 막히며 동공이 수축했다.

“그 지옥을, 그 더러운 트라우마를 혼자 처먹고 뒤지지 말고 카메라 앞에서 뱉어내란 말이야! 네가 가진 그 구역질 나는 어둠이 바로 네 무기야. 날 설득해 봐. 네가 얼마나 비참하고 위대한 배우인지, 이 영화를 통해서 증명해 보라고!”

태성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타오르는 듯한 광기가 서진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반사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함께 지옥 끝까지 가보자는, 페이스메이커로서의 처절한 동반 선언이었다.

서진의 호흡법이 변했다. 얕고 빠르게 몰아쉬던 호흡이, 태성의 강렬한 압박 속에서 깊고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자살하려던 광기가, 연기에 대한 지독한 갈망과 생존 본능으로 치환되는 순간이었다.

[시스템 링커 작동: 배우 ‘백서진’의 트라우마 트랙을 감지합니다.] [수치 변동: 99% → 95% → 88% → 82%] [경고: 감정의 등가교환 법칙이 발동합니다. 억제된 트라우마 수치만큼의 통증이 디렉터에게 전이됩니다.]

“윽……!”

태성의 척추를 타고 극심한 오한이 휘몰아쳤다. 머리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지독한 편두통이 시작되었다. 가슴이 조여들고, 숨이 쉬어지지 않는 폐소공포증의 증상이 태성의 육체를 지배했다.

서진이 느꼈던 아동 학대의 공포, 좁은 다락방의 폐쇄감이 태성의 신경망을 그대로 타고 들어온 것이다.

태성은 이를 악물었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흘러내렸지만, 멱살을 쥔 손에는 더욱 힘을 주었다. 이 통증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에 이 녀석을 잃고 평생을 불면증과 죄책감 속에서 보냈던 그 지옥에 비하면, 이 육체적 고통은 오히려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축복이었다.

“……도망치지 마.”

태성이 빗물 섞인 피를 뱉으며 낮게 읊조렸다.

“너한테 어울리는 죽음은 여기가 아니야. 카메라 앞에서, 내 컷 소리와 함께 죽어라. 그전엔 안 보내줘.”

서진의 눈에서 마침내 빗물보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태성은 서진의 몸을 난간 안쪽으로 거칠게 끌어당겨 바닥에 메치듯 내려놓았다.

쿵!

바닥에 쓰러진 서진은 빗물을 들이마시며 거칠게 기침을 토해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 않았다. 오직 태성을 향한, 경외감에 가까운 눈빛만이 번뜩이고 있었다.

“하아…… 하아…….”

서진이 가슴을 쥐어짜며 태성을 올려다보았다.

“진짜…… 악마 같은 사람이네요, 감독님은.”

“알면 일어나. 씬 채워야 하니까.”

태성은 냉정하게 대꾸하며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 순간, 태성의 눈앞에 있는 장부 스크린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백서진 트라우마 수치 안착: 80% (안정 단계 진입)] [씬 완성도 상승: 8% → 22%] [실시간 흥행 예측값 상승: 1.2% → 3.5%]

성공이었다. 서진의 목숨을 구함과 동시에, 영화의 운명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태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장부 스크린을 끄려 했다. 그런데 장부 메인 화면의 우측 하단 구석에서, 기이한 붉은색 탭 하나가 깨진 글씨로 점멸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ERR_LOCK_01: 골든 하베스트 비공개 금융 약정서 (접근 제한)]

‘……골든 하베스트?’

태성의 미간이 좁아졌다. 15년 전 자신을 몰락시키고 충무로에서 매장했던 거대 자본 카르텔의 이름이 왜 이 장부의 에러 탭에 박혀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의문을 깊게 가질 여유는 없었다.

쾅! 쾅! 쾅!

아래층에서부터 급박한 발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여러 명의 무거운 군화 소리. 뒤이어 옥상 철문이 거칠게 열리며, 빗속을 뚫고 낯익은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당장 멈춰! 촬영 중단이다!”

확성기를 든 사내가 옥상으로 들어섰다.

노란색 비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그 안의 번지르르한 수트와 탐욕스러운 눈빛은 가릴 수 없었다. 뒤편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사설 경비원 대여섯 명이 험악한 인상을 쓰며 도열해 있었다.

양산형 제작자, 명노식이었다.

골든 하베스트의 자금을 받아먹으며 영화를 단순히 돈 세탁용 쓰레기로 취급하던 충무로의 기생충.

명노식은 바닥에 젖어 쓰러져 있는 백서진과, 그 앞에 피를 흘리며 서 있는 이태성을 번갈아 보더니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이태성 감독. 내가 분명히 경고했지? 이딴 정신병자 새끼 주연으로 쓰면 사고 난다고. 방금 투자사에서 최종 통보 내려왔어. 백서진 검증 실패 및 감독 자질 부족으로 제작 즉각 중단이다. 장비 다 빼고, 당장 여기서 꺼져.”

명노식의 메가폰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태성의 고막을 찔렀다.

사설 경비원들이 태성과 서진을 향해 위협적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태성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명노식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지독한 두통 속에서도, 태성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포식자처럼 빛나고 있었다.

명노식의 비열한 웃음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질척하게 흩어졌다.

사설 경비원들이 군화로 진흙탕을 짓밟으며 카메라와 조명 장비가 세팅된 천막 안으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갔다. 스태프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15년 전, 이 무기력한 폭력 앞에 무릎 꿇고 영화를 빼앗겼던 기억이 태성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태성은 송곳으로 장기를 사정없이 쑤셔대듯 밀려드는 등가교환의 통증을 견디며 아랫입술을 깊게 짓씹었다. 터진 입술 사이로 비릿한 혈향이 울컥 넘어왔지만, 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두 다리에 힘을 꽉 주고 대지를 지탱했다. 여기서 무너지면 백서진도, 이 영화도, 자신의 구원도 없다.

“손대지 마.”

태성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기묘할 정도로 옥상 전체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경비원 중 한 명이 장비 케이블을 뽑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태성의 눈에 서린 맹렬한 살기가 그들의 발을 붙잡은 것이다.

“뭐 해? 안 치우고! 이 새끼들 일당 일 초 단위로 끊어지는 거 보고 싶어?”

명노식이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의 기름진 이마 위로 빗물이 흘러내려 눈가를 적셨다.

“명 부장님! 이건 명백한 계약 위반입니다!”

빗속을 뚫고 억척스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웅덩이를 거칠게 밟으며 뛰어온 사람은 제작팀장 강혜원이었다. 그녀는 젖은 머리칼을 뒤로 거칠게 넘기며 명노식의 앞을 가로막았다. 손에는 흙먼지가 묻은 서류철이 꽉 쥐어져 있었다.

“투자 단행본 계약서 제4조 2항에 의거, 현장 제작 중단 권한은 제작사의 독단이 아니라 투자사와 감독, 그리고 제작 총괄의 3자 대면 합의서가 제출되어야 효력이 발생합니다! 이런 식으로 깡패들 동원해서 장비에 손대면, 내일 당장 법원에 가처분 신청 넣고 언론에 배임으로 터뜨릴 겁니다!”

혜원의 악에 받친 목소리에 명노식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강 팀장, 네가 아직 돈줄이 어디서 나오는지 분간이 안 가지? 골든 하베스트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네년 충무로 바닥에서 평생 기획서 한 장 못 돌리게 만들 수 있어!”

“그럼 해보시던가요! 나 혼자 죽나, 골든 하베스트 비자금 쪼개기 공시 위반으로 같이 죽나 해보자고!”

혜원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얇은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거대 자본이라는 괴물 앞에서 일개 제작팀장이 부릴 수 있는 오기의 한계였다.

태성은 혜원의 어깨를 부드럽지만 묵직한 손길로 짚어 뒤로 물러서게 했다. 혜원이 놀란 눈으로 태성을 올려다보았다. 태성의 뺨은 이미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식은땀이 빗물과 섞여 턱 끝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백서진의 뇌리를 지배하던 폐소공포증과 자학적 트라우마가 태성의 중추신경계를 사정없이 유린하고 있는 탓이었다.

하지만 태성의 입꼬리는 비틀려 올라가 있었다. 가학적인 방어기제가 작동한 그의 입에서 얼음장 같은 독설이 흘러나왔다.

“혜원아, 저런 삼류 양아치한테 계약서 보여줘 봐야 글자도 못 읽어. 뇌 대신 골든 하베스트가 던져준 사료가 가득 차서, 주인이 짖으라면 짖는 개새끼일 뿐인데 무슨 말을 섞냐.”

“이태성, 너 이 새끼가……!”

명노식의 눈등에 핏대가 거칠게 솟구쳤다.

태성은 명노식의 위협을 콧방귀로 받아넘기며, 바닥에서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운 백서진을 가리켰다. 서진의 옷은 진흙과 빗물로 엉망이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눈동자였다.

“명노식. 네 눈에는 저게 안 보이지?”

태성이 서진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저 녀석은 방금 지옥에서 기어 올라왔어. 그리고 지금 당장 카메라 앞에서 제 살점을 뜯어 발릴 준비가 끝났다고. 배우가 저토록 미쳐 날뛰고 싶어 하는데, 메가폰을 잡은 내가 여기서 도망을 쳐?”

태성은 천천히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망막 위에 점멸하는 장부의 스크린이 다시금 붉은 열기를 뿜어냈다.

[백서진 ‘인페르노’ 제17씬 몰입도: 92% (최상)] [현재 씬 기대 완성도: 85% (명작 수준)] [경고: 스태프 피로도가 높으나, 감독의 연출 카리스마로 인해 ‘광기 어린 동조’ 상태 돌입]

스태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주저주저하며 장비를 놓으려던 촬영감독과 조명 스태프들의 눈빛에 기묘한 열기가 떠올랐다. 자살하려던 주연 배우를 멱살 잡아 끌어내리고, 투자사의 횡포 앞에서도 피를 흘리며 버티는 감독의 광기. 그 뜨거운 현장의 에너지가 전염병처럼 스태프들의 심장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미친 새끼들…… 진짜 단체로 약이라도 처먹었나.”

명노식이 뒷걸음질을 쳤다. 태성의 눈에 서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집념과 광기에 압도당한 것이다.

태성은 명노식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등가교환의 고통으로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악력만큼은 명노식의 멱살을 부러뜨릴 듯 강하게 쥐어 잡았다.

“딱 한 테이크다.”

태성의 목소리가 명노식의 귓가를 찢었다.

“지금 당장 이 빗속에서 제17씬을 찍는다. 모니터 보고 말해. 네 그 썩어빠진 눈으로 보고도 예술이 아니라고 느껴진다면, 내 발로 메가폰 부수고 이 현장에서 꺼져주지. 판권도 네 마음대로 처분해.”

“……뭐?”

명노식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대신, 오케이 컷이 떨어지는 순간.”

태성이 명노식의 귓가에 대고 낮게 읊조렸다.

“넌 이 촬영장에서 꺼져라. 그리고 다신 내 배우와 내 스태프들 몸에 손대지 마. 한 번만 더 선 넘으면, 네가 골든 하베스트 뒤에 숨겨둔 그 더러운 구멍들을 내가 직접 다 찢어발겨 줄 테니까.”

태성의 시선이 장부 스크린 우측 하단에서 붉게 깜빡이는 [ERR_LOCK_01: 골든 하베스트 비공개 금융 약정서]를 향했다. 그 눈빛은 단순한 허세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포식자의 눈이었다.

명노식은 침을 꿀꺽 삼켰다. 태성의 기세에 완전히 눌려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하, 한 테이크……? 좋아. 네가 스스로 무덤을 파는구나. 저 정신병자 새끼가 이 빗속에서 제대로 된 대사 한마디라도 뱉을 수 있을 것 같아? 당장 카메라 돌려! 실패하는 즉시 이 세트장 전체를 압류할 테니까!”

명노식이 멱살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태성은 더 이상 그를 보지 않았다. 뒤를 돌아 젖은 슬레이트보드를 집어 들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 속에서, 시야가 붉게 번졌지만 정신은 극도로 맑아졌다.

태성이 카메라 바로 옆, 빗물이 사정없이 들이치는 현장 한가운데에 우뚝 섰다. 서진이 카메라 앵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등 뒤로 폐공장의 거칠고 어두운 실루엣이 음울하게 깔렸다. 완벽한 지옥의 풍경이었다.

“전 스태프, 롤!”

태성의 고함이 세트장을 뒤흔들었다. 스태프들이 일제히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레디…….”

태성이 서진과 눈을 맞췄다. 서진의 눈동자가 깊게 요동치며 배역의 심연 속으로 침잠했다. 태성은 자신의 내면을 갉아먹는 통증을 서진의 연기 에너지로 치환하며 마침내 메가폰을 쥐었다.

“액션!”

그 순간, 명노식의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차형록 회장’.

동시에 태성의 눈앞에 떠 있는 시네마 빌드 장부의 에러 탭이 미친 듯이 붉은빛을 뿜어내며 기괴한 경고음을 울렸다.

삐이이이-!

[위험: 외부 세력의 강제 개입 시도가 감지되었습니다.] [비공개 금융 약정서의 락(Lock) 해제 프로세스가 강제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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