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동공이 비정상적으로 수축하며 초점을 잃었다. 허공을 밟은 신우현의 발끝이 벼랑 끝의 푸석한 흙모래를 짓개겼다. 낙하하는 신체는 중력의 법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그 아래는 시퍼렇게 날이 선 저수지였다. 수면까지의 거리는 대략 이십 미터. 이 높이에서 자유낙하로 수면에 충돌할 경우, 물은 콘크리트 바닥과 다름없는 충격으로 뼈와 장기를 바스러뜨린다.

“우현아.”

하준의 목도 구멍이 난 것처럼 거친 바람 소리만 뱉어냈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역류했다. 리스크 투표 게이지가 90%를 돌파하면서 가해진 인과율의 역습이었다. 폐포 하나하나가 바늘로 찔리는 듯한 심인성 흉통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정수리를 때렸다. 이인증(Depersonalization)*의 장막이 시야를 흐릿하게 물들였다. 눈앞의 세계가 마치 한 겹의 얇은 유리창 너머에 존재하는 가상현실처럼 낯설고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이인증(Depersonalization): 내가 내 몸에서 분리되어 유체이탈을 한 것 같은 기괴한 감각을 느끼는 증상. 연예계에서는 흔히 '영혼 가출 증후군' 혹은 '배우가 자아를 너무 깊은 분장실에 두고 온 상태'로 비유되곤 한다.]

그 유리의 틈새로, 과거 회귀 전 차갑게 식어 가던 신우현의 마지막 모습이 겹쳐 흘렀다. 하얀 시트 위에서 미동도 하지 않던 그 앙상한 손목.

그것을 다시 볼 수는 없었다.

하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혈향이 미각을 자극하자 비로소 흐릿하던 시야에 붉은색 글자들이 선명하게 박혔다.

[경고: 신우현의 감정 과부하 수치 121% 돌파.] [캐릭터 '우민'의 자멸 충동이 실제 인물의 의식을 완벽히 잠식 중.] [보유 자산 ‘대차대조표’ 정밀 연산 모드를 가동합니다.]

시간이 극도로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초당 24프레임의 영화 화면이 1,000프레임의 초고속 카메라로 쪼개진 것처럼, 우현의 몸이 기울어지는 각도와 흩날리는 머리칼의 궤적이 낱낱이 분석되어 하준의 뇌리에 입력됐다.

‘지급 불능(Default) 상태는 허용하지 않는다.’

하준은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을 비웃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고압 희색(高壓 喜色). 죽음의 문턱에 다다를수록 오히려 화사하게 피어나는 가학적인 미소였다.

그는 바닥을 박차고 도약했다.

일반적인 인간의 반사신경으로는 불가능한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배우의 대차대조표]는 이미 하준의 신체 운동 에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정산 포인트를 짚어내고 있었다.

[특수 액션: ‘정밀 악력 제어’ 발동.] [대차대조표 부채 계정에서 신우현의 낙하 에너지 일부를 완충 자산으로 강제 이관합니다.] [일시적 근육 피로도 상승률: +180%]

하준의 오른손이 허공을 갈랐다. 벼랑 끝으로 반쯤 몸이 넘어간 순간, 그의 손가락이 우현의 마르고 굳은 손목을 정확히 낚아챘다.

콰아아앙.

두 사람의 체중이 한꺼번에 절벽 가장자리의 외줄 같은 중력선에 걸렸다. 어깨관절이 비명을 지르며 탈구될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하준의 구두 끝이 절벽 바위틈을 파고들며 마찰음을 냈다.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날카로운 돌멩이들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윽……!”

하준은 신음마저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지금 이 순간, 이 상황을 단순한 ‘사고’로 보이게 해서는 안 되었다. 수십 명의 스태프와 강태오 감독의 눈, 그리고 돌아가는 카메라 렌즈 앞에서 이것은 완벽한 ‘기획된 명장면’이어야만 했다. 리스크 투표의 위화감을 지우기 위한 유일한 돌파구는, 이 목숨을 건 사투조차도 대본에 예정되어 있던 정교한 즉흥 연기(Ad-lib)로 승화시키는 것뿐이었다.

하준은 왼손으로 절벽 위의 튀어나온 바위 뿌리를 움켜잡으며, 메마른 가슴팍에서 끓어오르는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캐릭터 ‘사현’의 목소리였다.

“……아직 안 끝났어.”

그것은 대본에 없는 대사였다. 하지만 극 중 사현이 우민을 향해 품은 집착과 애증을 이보다 더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없었다.

“너 혼자 지옥으로 도망치게 둘 것 같나? 내 허락 없이는, 네 파멸조차 내 자산이다.”

하준의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고통으로 허덕이는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상대를 완전히 지배하겠다는 오만함만이 서려 있었다.

우현의 초점 없던 눈에 아주 미세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제 뺨을 베고 지나가는 거친 바람과, 손목을 부러뜨릴 듯 움켜쥐고 있는 온하준의 뜨거운 악력이 그를 현실로 끌어내린 것이다.

“하, 하준…… 아…….”

“버텨.”

하준은 장부의 수치를 실시간으로 조율했다.

[신우현의 감정 소모율 120% -> 95%로 하향 안정화.] [온하준의 대차대조표 리스크 비용 추가 정산: 좌측 어깨 인대 손상률 15% 누적.]

어깨뼈가 어긋나는 불쾌한 마찰음이 귓가를 때렸지만, 하준은 이를 악물고 팔을 끌어당겼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척추를 타고 내려가는 신경망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기어이 우현의 몸뚱이를 절벽 위로 끌어올렸다.

두 사람의 몸이 거친 흙바닥 위로 거칠게 뒹굴었다.

“컷.”

멀리서 강태오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의 그 카랑카랑하고 신경질적인 외침이 아니었다. 무언가에 완전히 압도당해, 차마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는 자의 젖은 목소리였다.

“……컷! 오케이! 오케이, 완벽해!”

강태오는 메가폰을 쥔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모니터링 화면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방금 전의 시퀀스는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대본상의 밋밋한 검투 액션을 뛰어넘어, 서로를 파멸시키려 하면서도 끝내 구원하고자 하는 두 인물의 본질이 날것 그대로 카메라에 담겼다. 와이어조차 연결되지 않은 날것의 절벽에서 펼쳐진, 그 어떤 특수효과로도 재현할 수 없는 진짜 ‘목숨의 무게’가 프레임 가득 실려 있었다.

“이건…… 역사에 남을 단막극이야.”

강태오가 읊조렸다. 스태프들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누구도 방금 전의 상황이 진짜 ‘사고’였다고 의심하지 않았다. 온하준의 비상식적일 정도로 정교한 대사 처리와, 눈빛의 일관성이 이 위험천만한 추락을 완벽한 ‘계획된 연출’로 둔갑시켰기 때문이다.

[리스크 투표율 급감: 94% -> 45%] [대중의 위화감이 ‘천재적인 액션 합과 애드리브’라는 경탄으로 치환되었습니다.] [영구 소멸 위기가 해제됩니다.]

머릿속을 울리던 경고음이 잦아들자, 하준은 비로소 흙바닥에 대자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강원도의 하늘은 지독하게도 맑았다.

옆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엎드려 있던 신우현이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흐느낌이었다. 그의 얇은 입술 사이로 억눌린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미안하다. 내가, 내가 정신을 잃었어.”

우현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 벼랑 끝에서 느꼈던 그 절대적인 허무와 자멸의 충동이 아직도 손끝에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만약 하준이 잡아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정말로 저 차가운 수면 아래에서 평생 갈망하던 ‘완성’이라는 이름의 죽음을 맞이했을 터였다.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나약한 도피였는지, 하준의 꽉 쥔 손이 뼈저리게 가르쳐 주었다.

하준은 아픈 어깨를 쓸어내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여전히 바닥을 짚고 우는 우현의 뒤통수를 가볍게 툭 쳤다.

“울지 마라. 분장 지워진다. 강 감독 성격에 테이크 다시 가자고 하면 나 진짜 팔 하나 부러뜨려야 해.”

“하준아…….”

“그리고 내가 말했지.”

하준은 흙먼지 묻은 재킷을 털어내며 생긋 웃었다. 그 미소는 차가웠지만, 우현의 얼어붙은 내면을 녹이기에는 충분할 만큼 견고했다.

“우리 장부에 부도는 없어. 네 목숨값은 이미 내 자산 계정에 묶여 있으니까, 함부로 처분할 생각 하지 마.”

우현이 붉어진 눈으로 하준을 올려다보았다. 하준의 눈동자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완벽주의적인 오만함, 그리고 자신을 결코 놓지 않겠다는 기묘한 집착이 보였다. 우현은 마침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미친놈.”

“배우치고 정상인 놈이 어딨냐. 일어나. 이제 장부 정리하러 갈 시간이다.”

하준의 시선이 촬영장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세단 세 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차 문이 열리고 내린 인물들의 면면을 본 하준의 입꼬리가 한층 더 높게 올라갔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

차에서 내린 자들은 깔끔한 정장 차림의 사내들과, 그 앞을 리드하는 경찰 제복 차림의 중년 사내였다. 그리고 그들의 뒤편에서, 가죽 코트를 걸친 한서진이 승리감에 젖은 미소를 지으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거기 두 사람, 움직이지 마십시오.”

경찰이 신분증을 꺼내 보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극장 무단 강제 침탈 및 무단 침입, 그리고 이든 엔터테인먼트의 영업 비밀 누설 및 명예훼손 혐의로 체포합니다. 온하준 씨, 그리고 신우현 씨.”

촬영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스태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강태오 감독이 인상을 쓰며 앞장섰다.

“이봐요! 지금 한창 크랭크업 촬영 중인 거 안 보입니까? 어디서 영장도 없이 남의 촬영장에 들이닥쳐서 난장판을 만들어!”

한서진이 부드러운 걸음걸이로 강태오의 앞을 막아서며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뱀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강 감독님,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저희 회사 소속 배우들을 무단으로 탈취하고, 허위 사실을 유포해 기업 이미지를 실추시킨 범죄자들을 더는 묵과할 수 없어서 말입니다. 법 집행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법이죠.”

한서진은 하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내 손바닥 안’이라는 오만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온하준. 기자회견에서 제법 그럴듯한 쇼를 했더군. 하지만 말이야, 대중은 결국 더 자극적인 법적 사실에 움직이게 되어 있어. 네가 폭로한 서류들? 전부 위조된 찌라시에 불과하다고 이미 언론 플레이 끝내 놨다. 이제 남은 건 너희 둘이 쇠창살 뒤에서 조용히 썩어가는 것뿐이지.”

한서진이 하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신우현은 내가 아주 비싼 값에 ‘비운의 천재’로 포장해서 내보낼 거야. 옥중에서 자살한 비운의 배우…… 주식 상장용 서사로는 아주 기가 막히지 않나?”

소름 끼치도록 정교한 악마의 설계였다.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이 인간은 타인의 목숨을 오직 숫자로만 환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색은 더욱 화사해졌다.

“한 대표님.”

하준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나 분노가 아닌, 깊은 동정심마저 묻어나고 있었다.

“대표님은 복식부기의 기본을 모르시는군요.”

“뭐?”

“모든 거래에는 대변과 차변이 존재합니다. 대표님이 쓰신 지출(악행)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자산의 감소나 부채의 증가로 정산되어야 하죠.”

하준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 순간, 촬영장 주변의 숲속과 스태프들 사이에 섞여 있던 몇몇 인물들이 카메라를 치켜들었다. 그들의 카메라 렌즈 위에 붙은 붉은색 표시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On Air.’

실시간 생중계 스트리밍이었다.

“……저게 뭐 하는 짓거리야?”

한서진의 비서가 당황해하며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하준은 주머니에서 소형 녹음기 겸 외장 하드를 꺼내 들어 흔들었다.

“이건 3화에서 대표님의 비서분께서 우리 소극장 무단을 습격하셨을 때 친절하게 떨어뜨려 주신 선물입니다. 기억나십니까? ‘비운의 요절 마케팅 포트폴리오’.”

한서진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건 이미 위조 문서라고…….”

“문서는 위조할 수 있죠. 하지만 대표님의 그 독특한 비음 섞인 목소리와, 소속 배우들의 우울증을 유도하기 위해 마약을 처방하도록 지시한 구체적인 음성 녹취록까지 위조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준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 것은 한서진의 생생한 목소리였다.

[- 우현이 그 새끼, 슬슬 멘탈 한계니까 약 좀 더 먹여서 완전히 무너뜨려. 타이밍 봐서 유서 대필할 애 정해두고. 죽고 나면 유작 앨범이랑 추모 영화로 땡겨먹을 돈이 최소 삼백억이야. 알았어?]

현장에 있던 모든 이의 숨소리가 멎었다.

동행했던 형사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자신들이 이 거대한 살인 모의 및 사기극의 공범으로 이용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 이건 조작이야! 음성 합성이라고!”

한서진이 처음으로 품위를 잃고 소리를 질렀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조작인지 아닌지는 국과수에서 정밀 정산해 줄 겁니다.”

하준은 생중계 중인 카메라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아, 참고로 이 방송은 지금 동시 접속자 수 50만 명을 돌파했네요. 대표님이 그렇게 좋아하시는 ‘대중의 반응’입니다. 아주 뜨겁군요.”

[리스크 투표율: 0%] [한서진의 모든 방어선 붕괴.] [대차대조표 최종 정산: 자산 ‘신우현’의 구원 완료, 부채 ‘이든 엔터테인먼트’의 완전 소멸.]

“한서진 씨.”

형사들 중 가장 선임으로 보이는 사내가 한서진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철컥.

차가운 수갑이 한서진의 손목에 채워졌다.

“살인예비음모,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그리고 사기 및 협박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고…….”

미란다 원칙이 읊어지는 동안, 한서진은 넋이 나간 눈으로 하준을 응시했다. 자신이 공들여 쌓아 올린 이든 제국이, 단 한 명의 신인 배우가 짜놓은 정밀한 덫에 걸려 단 몇 분 만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가 경찰차로 호송되는 순간, 촬영장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수많은 언론사의 카메라들이 일제히 방향을 틀었다.

그들의 렌즈가 향한 곳은 수갑을 찬 패배자가 아니었다.

절벽 끝에서 서로를 구원해 내고, 마침내 악마의 사슬을 끊어낸 두 천재 배우.

온하준과 신우현이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두 사람의 얼굴을 하얗게 비추는 가운데, 한 다큐멘터리 전문 제작사의 피디가 흥분한 얼굴로 하준에게 달려왔다.

“온하준 씨! 신우현 씨! 두 사람의 이 기적 같은 구원 서사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고 싶습니다! 칸 영화제 출품작 <심연의 가면> 메이킹과 연계해서, 영혼의 듀엣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해주십시오!”

하준은 옆에 선 우현을 바라보았다. 우현은 비로소 맑은 눈으로 하준을 보며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옥 같던 회귀 전의 비극은 이제 완벽하게 정산되었다.

새로운 장부가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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