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 마비가 수반된 핏방울이 은서의 하얀 볼을 타고 내리고, 그녀를 끌어안은 강진혁의 손아귀 너머로 푸른 번개 파편이 눈부시게 폭발하기 시작하는 오열의 극하점 찰나.
사위를 집어삼킬 듯 넘실거리던 검붉은 저주의 장막이 진혁의 폭발적인 마나 제어력에 밀려나며 마침내 한풀 꺾였다. 하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비틀거리던 은서의 고개가 무력하게 꺾이며 그의 가슴팍으로 무너져 내렸다. 볼을 타고 흐르는 피는 멈췄으나, 그녀의 얇은 심장 격벽은 이미 서경 한씨 가문의 금기 유물인 '파혈 귀환 단검'이 뿜어낸 역살에 심각하게 균열이 간 상태였다.
"은서야. 정신 차려. 한은서!"
진혁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그녀를 품에 안아 올렸다. 그의 목덜미를 타고 검은색 반동의 핏줄이 무섭게 꼬여 올라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비즈니스 룸의 은밀한 결계를 해제한 진혁은 지체 없이 자신의 집무실 안쪽에 위치한 전용 휴게실로 향했다.
철제 보안문이 열리고 나타난 공간은 차분한 오크 우드 톤의 가구들과 가슴 무겁게 포근한 구스 침대가 놓인 간결한 침실이었다. 진혁은 은서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안치했다. 그녀의 안색은 이미 밀랍 인형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고, 가느다란 호흡만이 간신히 연명 줄을 잡고 있었다.
"내 생명력을 가져가. 얼마든지 좋으니까 전부 가져가란 말이야."
진혁이 은서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두 손을 움켜쥐었다. 'Business Night Act'의 생명 동기화 시퀀스를 강제로 한계점까지 끌어올리는 영격 전이 마법이 방 안을 푸른빛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보통의 동기화가 잔잔한 호수 같은 공명이었다면, 지금 진혁이 행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 마나 핵을 통째로 개방해 그녀의 깨진 격벽으로 들이붓는 가혹한 폭포수와 같았다.
진혁의 미간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심장이 뜯겨 나가는 듯한 계약의 반동이 그의 전신을 채찍질했다. 그러나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은서의 손가락바닥을 자신의 뺨에 밀착시킨 채, 밤새도록 마나를 쥐어짜 그녀의 안색을 돌보았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정제된 순수한 생명 에너지가 그녀의 혈관을 타고 흐르자, 은서의 목걸이 끝에 매달려 있던 가문의 유품, '푸른 펜던트'가 미약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아무런 마력도 지니지 못한 단순한 가문의 유산인 줄만 알았던 푸른 펜던트가 진혁의 푸른 하이브리드 입자를 가차 없이 흡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흡수된 마나는 투명하고 단단한 백색의 광막으로 치환되어 은서의 찢어진 심장 격벽을 덧대기 시작했다.
진혁의 눈이 커졌다. 이 펜던트는 단순한 치장품이 아니었다. 소멸해 가는 한씨 가문의 마나 격벽을 임시로 완벽하게 복구해 줄 수 있는, 전설적인 '마나 핵 촉매제' 그 자체였다. 진혁의 순수한 생명 마나가 펜던트라는 촉매를 만나 비로소 은서의 육체를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열쇠로 각성한 것이다.
그녀의 호흡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갈 무렵, 기력이 소진되어 몽롱해진 은서의 손끝에서 푸른빛 연기 같은 실루엣이 흘러나왔다. '영혼의 잔상'이었다.
은서의 숨겨둔 진심이 투사된 그 가냘픈 실루엣은 허공을 떠돌다 침실 구석에 놓인 진혁의 비밀 금고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 아주 슬픈 눈빛으로 진혁을 한 번 바라본 뒤, 금고 안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스스스스.
그 잔상의 끝자락이 금고 벽을 통과해 깊은 곳에 안치되어 있던 향나무 상자에 결합하듯 닿았다. 그러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지난 3년 동안 그 어떤 고위 해독 마법으로도 풀리지 않던, 붉은 마나 실로 무겁게 봉인되어 있던 은서의 이별 편지 투명 격벽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저게 왜 지금 반응하는 거지?"
진혁은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금고로 다가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두꺼운 강철 문을 열자, 붉은 실이 스스로 타들어 가며 재가 되어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3년 전, 은서가 오직 차가운 독설만을 남기고 이별을 고했던 그날 밤, 그의 집무실 책상에 버려지듯 놓여 있던 편지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향나무 상자에서 누렇게 빛이 바랜 봉투를 꺼냈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찢고 안의 서한을 펼쳤다. 그 안에는 정갈하지만 곳곳이 눈물 흔적으로 얼룩진 은서의 친필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진혁아. 이걸 읽을 때쯤이면 넌 날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여자라고 생각하며 증오하고 있겠지. 미안해.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죽어. 한재석이 네 마나 핵의 고유 파동을 알아냈어. 가문에서 개발한 불안정 마나 폭화 장치를 네 심장에 이식하겠다고 날 협박하고 있어. 내가 네 곁에 계속 머문다면, 그들은 주저 없이 네 마나 핵을 폭파시켜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거야. 내 목숨 따위는 가문의 저주 때문에 어차피 길지 않아. 하지만 넌 아니잖아. 넌 더 높은 곳에서 빛나야 하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제발 날 찾지 마. 널 살리기 위해 난 기꺼이 가문의 개가 될 거고, 네 기억 속에서 가장 나쁜 년으로 남을 거야. 사랑해, 진혁아. 내 처음이자 마지막인 구원자.]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진혁의 손끝이 사정없이 떨렸다. 종이 위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3년의 세월 동안 굳어 있던 잉크를 흐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배신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온전한 미래를 지켜주기 위해 가장 비참한 오명을 뒤집어쓰고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었다. 그것도 모른 채 자신은 계약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그녀를 옭아매고, 차가운 말들로 상처를 주며 복수랍시고 괴롭혀왔다.
"바보 같은 년…… 왜 말을 안 했어. 왜 혼자서 다 짊어진 건데!"
진혁이 편지를 가슴에 움켜쥔 채 침대 옆으로 무너져 내렸다. 억눌린 오열이 그의 넓은 어깨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상처받은 맹수처럼 울부짖는 그의 눈동자에서 붉은 후회와 절절한 사랑이 뒤섞인 눈물이 쏟아졌다.
오랜 시간 그녀를 향해 품었던 차가운 원망과 미움이 한순간에 눈 녹듯 사라졌다. 가슴을 찢는 듯한 고통 뒤로 찾아온 것은, 오직 하나뿐인 지고지순한 결의였다. 이 여자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심장 마나 핵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깨뜨려도 좋다는, 목숨을 바친 완전무결한 심장 공명의 맹세였다.
진혁은 은서의 창백한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이제 아무 데도 못 가. 내가 널 가둔 가문의 멍에를 전부 부숴버릴 테니까."
진혁이 결연한 눈빛으로 은서의 구두를 바라보았다. 아까 전부터 미세하게 거슬리는 이질적인 마나 파동이 느껴지던 참이었다. 은서가 신던 최고급 수제 구두를 가져와 밑창을 확인한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굽 바닥 안쪽에 정교하게 새겨진 검은 기하학 문양—가문에서 사냥감을 쫓을 때 쓰는 '흑색 추적 마킹'이었다.
한재석이 은서의 숨통을 조이고 감시하기 위해 그녀가 가문을 나설 때 몰래 심어둔 표식이었다. 진혁은 망설임 없이 손귀에 마나를 실어 구두 굽을 으스러뜨렸다. 파지직 소리와 함께 흑색 문양이 재가 되어 소멸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표식이 파괴되는 순간 발생한 최종 신호가 적들에게 그들의 위치를 완전히 노출시켰음을 진혁은 직감했다.
동시에 사옥 아래층에서부터 불길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한재석은 이미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었다. 임소윤이 마케팅팀 메인 드래프트 기획안을 유출하려다 은서가 심어둔 '마나 형광 물질 마킹 트랩'에 걸려 현행범으로 체포되었고, 그 배후가 한재석이라는 사실이 이사회와 주주총회 준비단에 실시간으로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사내 영구 축출과 사법 구속을 앞둔 미치광이에게는 이제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쾅! 쾅!
사무실 외곽의 방화문이 박살 나는 굉음이 침실까지 생생하게 들려왔다. 서경 한씨 가문의 사설 가드들이 사옥의 통제 시스템을 무력화하며 침입한 것이다. 태산의 무고한 대기 직원들과 보안 요원들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하며 돌파하는 그들의 거친 구둣발 소리가 지축을 흔들며 다가왔다.
서늘한 금속음과 함께 침실 문이 거칠게 뜯겨 나갔다. 검은 제복을 입고 장검을 뽑아든 사설 가드 다섯 명이 침대 주변을 포위하듯 들이닥쳤다.
"한은서 대리님을 모시러 왔다. 태산의 끄나풀은 비켜서라."
가드들의 살기 어린 음성이 방 안의 공기를 얼려버릴 듯 가라앉혔다.
그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진혁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침대 머리맡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누운 은서를 자신의 등 뒤로 완벽하게 가로막으며, 가드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스스스스.
진혁의 안광이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는 야수처럼, 찬란하고도 사나운 금빛 불꽃으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 마나 파동이 침실 벽면의 유리창들을 일제히 미세하게 균열 내며 울부짖었다.
"비켜서라."
가장 전면에 선 사설 가드의 검끝이 진혁의 심장을 겨눴다. 그의 검에 서린 흑색 마나가 침실의 공기마저 썩어 들어가게 만들 듯 매캐한 냄새를 풍겼다.
진혁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분노로 가득 찬 그의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온 금빛 서슬이 가드의 시선을 정면으로 꿰뚫었다. 진혁은 오른손을 가볍게 내뻗었다. 검을 쥔 가드의 손목을 낚아채는 움직임은 눈으로 쫓을 수 없을 만큼 신속했다.
콰드득!
"아악!"
뼈가 바스러지는 비명과 함께 장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진혁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가드의 턱을 올려쳤다.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거구의 사내가 뒤로 날아가 벽면에 처박혔다. 대리석 벽판이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먼지를 토해냈다.
남은 네 명의 가드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동시에 진혁을 향해 쇄도했다. 사방에서 쏘아져 들어오는 흑색 검강이 진혁의 사지를 찢어발길 듯한 기세로 밀려들었다.
진혁은 피하지 않았다. 그의 발끝이 바닥을 딛자, 침대 주변으로 둥근 황금빛 결계가 단단하게 솟구쳤다.
깡! 깡! 깡!
강철과 마나가 부딪히는 굉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세 자루의 검이 결계의 표면에 막혀 불꽃을 튕겼다. 그 반동으로 가드들의 자세가 무너진 찰나, 진혁의 양손이 허공을 갈랐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뿜어져 나온 순도 높은 마나 침들이 가드들의 어깨와 무릎 관절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컥!"
"우윽!"
무릎을 꿇고 쓰러지는 가드들의 등 뒤로, 마지막 한 명이 은서가 누워 있는 침대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비열한 기습이었다.
진혁의 눈동자가 뒤집혔다. 그의 심장 깊은 곳에서 억눌려 있던 폭발적인 마나가 전신을 타고 역류했다.
"감히 누구 손을 대려고."
낮게 깔린 목소리와 함께 진혁이 허공을 가로질러 가드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는 충격에 침실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사내의 손에서 떨어진 장검이 바닥을 구르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으나, 진혁의 상태 역시 온전치 못했다.
"하아, 하아……."
진혁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문 간의 해묵은 원념이 자아내는 '계약의 반동'이 그의 심장을 옥죄고 있었다. 은서를 향한 감정이 깊어질수록, 그녀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질수록 반동의 고통은 배가 되었다. 그의 목덜미를 타고 올라온 검은 핏줄이 이제 턱밑까지 뻗어 나가 있었다. 그의 입술 틈새로 붉은 선혈이 울컥 배어 나왔다.
그의 무릎이 꺾이려는 찰나, 침대 위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들려왔다.
"……팀, 장님……?"
은서의 감겨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피를 흘리며 자신을 가로막고 서 있는 진혁의 거대한 등이 보였다. 코끝을 찌르는 비린 피비린내와 오존의 냄새에 그녀의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은서는 억지로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전신을 짓누르는 무력감에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다. 시선을 돌리자 바닥에 뒹굴고 있는 자신의 수제 구두, 그리고 부서진 굽 사이로 소멸해 가는 흑색 문양이 보였다.
그 옆에는 먼지 쌓인 향나무 상자와 함께 붉은 봉인이 풀려 헤진 종이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3년 전, 자신이 눈물로 썼던 이별 편지였다.
은서의 호흡이 멎었다. 그녀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읽……으셨어요?"
목소리가 모래알을 삼킨 듯 갈라져 나왔다. 진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3년 동안 쌓여온 오해가 산산이 부서진 자리 채워진, 찢어질 듯한 아픔과 애틋함이었다.
"왜 그랬어."
진혁이 한 걸음 다가와 그녀의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온기가 은서의 차가운 손가락 끝을 녹여갔다.
"왜 혼자서 감당하려고 한 거야.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어? 가문이 널 협박하고, 내 목숨을 인질로 잡았다면 내게 말했어야지!"
"말하면……."
은서의 눈에서 결국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말하면 당신은 날 살리겠다고 정말로 심장을 내주었을 테니까요. 당신 성격에, 가문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고 껍데기만 남았을 테니까……."
"그래서 날 버리는 선택을 한 거라고?"
진혁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그는 은서의 눈물을 거친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댔다.
"바보 같은 년. 내 심장이 터져 나가든 말든, 네가 없는 세상 따위 내게아무 의미도 없었어."
두 사람의 심장이 약속이나 한 듯 격렬하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은서의 목에 걸린 푸른 펜던트가 눈부신 백색 광원을 토해내며 진혁의 푸른 마나를 빨아들였다. 찢어졌던 심장 격벽이 완전히 메워지며 은서의 뺨에 붉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가문의 저주가 완벽하게 억제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감격적인 재회도 잠시였다.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하던 가드들의 대장이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붉게 점멸하는 소형 통신기를 꺼내 들었다.
"끄윽…… 하하하! 감동적인 순애보로군. 하지만 너무 늦었어, 강진혁 팀장."
진혁의 안광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가드의 목덜미를 구두굽으로 짓눌렀다.
"무슨 소리지?"
"한재석 대리님이…… 이미 태산 본사 지하의 '중앙 마나 제어실'을 장악했다. 임소윤이 꼬리를 밟힌 순간부터, 대리님은 가문의 마지막 비기인 '마나 과부하 기폭 장치'를 본사 그리드에 연결하셨지."
가드가 고통 속에서도 붉은 침을 뱉으며 쇳소리를 냈다.
"앞으로 세 시간 뒤면 긴급 주주총회가 열린다. 그전까지 한은서를 제어실로 데려오지 않으면, 대리님은 태산 이노베이션 빌딩 전체를 공중분해 시킬 거다. 주주들과 임원진,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사원들과 함께 지옥으로 가는 거지."
"미친 자식이……."
진혁의 주먹에 핏줄이 돋아났다.
삐- 삐- 삐-!
침실 벽면에 부착된 디지털 비상 단말기에서 붉은 경고등이 요란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본사 하부의 마나 흐름이 비정상적으로 역류하고 있다는 경보음이었다. 한재석의 자폭 협박은 거짓이 아니었다. 주주총회를 앞두고 태산의 핵심 기술과 가문의 권력을 모두 잃게 된 미치광이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은서는 진혁의 소매를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속에서 요동치는 펜던트의 기운을 느꼈다.
"팀장님."
은서의 눈빛이 차갑고 단단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회피하고 숨어 다니던 신입 사원의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가야 해요. 주주총회장으로."
"한은서, 네 몸은 아직—"
"아니요, 지금 제 몸 상태는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해요. 당신이 준 생명 마나와 이 펜던트가 가문의 저주를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어요."
은서는 침대바닥을 딛고 당당하게 일어섰다. 흐트러진 옷가지를 매만지는 그녀의 손길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한재석은 저를 원해요. 제가 가문의 후계자로서 태산의 마나를 넘겨주는 계약서에 서명하도록 강제하려는 거예요. 그렇다면 제가 직접 주주총회장에 나타나 줘야죠. 그 미치광이가 판을 깨기 전에, 주주들 앞에서 그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을 카드를 들고."
진혁은 은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결연한 눈동자 속에서, 3년 전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여전사의 실루엣이 겹쳐 보였다.
"좋아."
진혁이 자신의 넥타이를 가볍게 고쳐 매며 은서의 곁에 섰다. 그의 금빛 안광이 어둠 속에서 더욱 매섭게 타올랐다.
"비즈니스를 끝마칠 시간이다, 한은서 씨."
"네, 팀장님."
두 사람이 깨진 침실 문을 나서려는 찰나, 빌딩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마나 해일의 진동이 발밑에서부터 솟구쳤다. 본사 지하 제어실의 마나 수치가 폭발적인 임계점을 가리키며 단말기의 경고음이 비명처럼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은 단 세 시간.
그리고 주주총회장의 문이 열리기 직전, 은서의 펜던트가 불길하리만치 거대한 백색 빛을 내뿜으며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