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의 끝은 소리가 없었다.
양쪽 청각을 모두 기이 연명 장부의 제물로 바쳐 버린 세상은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고막을 찢을 듯이 휘몰아치던 군주의 비명도, 제단이 부서져 내리며 내뿜던 파편의 마찰음도 먼지처럼 바스러져 사라졌다. 오직 두개골 안쪽에서 웅웅거리는 둔탁한 진동과, 기압이 급격히 내려앉으며 고막 안쪽을 짓누르는 묵직한 압박감만이 내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털썩.
부서진 대리석 잔해와 탁한 황무지의 흙먼지가 뒤섞인 바닥으로 몸이 굴러떨어졌다. 전신을 타고 짜릿한 통증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윽!"
비명은 목구멍 안쪽에서 무음의 기포가 되어 터졌다. 10화에서 거울령들을 몰살하고 얻었던 전리품, 상실 감각을 영구 고정해 주는 '영적 복구 물약'의 약효가 가슴팍 깊은 곳에서부터 뜨겁게 박동하고 있었다. 16화에서 마비된 몸을 강제로 움직이기 위해 들이켰던 그 비약은, 장부의 대가로 지불되어 무감각해졌던 육체에 날카로운 '고통의 인지력'을 영구히 되돌려 놓았다. 부러진 갈비뼈가 폐포를 찌르는 감각, 어깨뼈가 어긋나며 근육을 짓밟는 고통이 머릿속을 하얗게 탈색시켰다.
하지만 이 고통이야말로 내가 아직 인간의 경계를 완전히 넘어서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가슴팍이 유난히 뜨거웠다. 고개를 숙이자, 가슴을 관통하듯 박혀 있는 고대 나침반의 놋쇠 바늘이 보였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적갈색 피가 나침반의 복잡한 기하학적 문양을 채울 때마다, 유리 덮개 너머로 불길한 보랏빛 광륜이 피어올랐다.
나침반의 바늘은 여전히 내 심장의 가장 깊은 방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 가슴속에 깃든 윤아의 영혼. 그리고 그 영혼의 이면에 도사린,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하고 차가운 봉인. 심장이 뛸 때마다 나침반의 중심축이 뼈를 긁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름이 척수를 타고 올라왔다.
그때였다. 지면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시각은 들리지 않는 소리를 대신해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져 있었다. 저 멀리 칠흑 같은 어둠의 장막을 찢고, 형언할 수 없이 비대하고 추악한 형체가 공터의 경계를 넘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도철민이었다.
아니, 그것을 더는 인간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13화에서 대피소 지하의 어둠 속으로 추락했던 그는 제0구역의 심연에 완벽히 잠식당해 있었다. 하반신은 족히 수십 개는 되어 보이는 인간의 다리들이 기괴하게 얽히고설켜 거미의 다리처럼 꿈틀거렸고, 상반신은 부패한 시체들과 핏빛 살덩어리들이 난잡하게 이중 융합되어 거대한 결절을 이루고 있었다.
그의 썩어 들어가는 얼굴 가죽 사이로, 탐욕과 증오로 가득 찬 눈동자 세 쌍이 나를 향해 번들거렸다. 그의 입술이 찢어지며 무언가 광포한 포효를 내지르는 모양새가 눈에 들어왔다. 들리지 않았지만, 지반을 타고 전해지는 파동만으로도 그가 내뱉는 살의의 밀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수없이 얽힌 쇠사슬들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공터의 바닥을 긁어댔다. 도철민은 여전히 내가 가진 '기이 연명 장부'를 갈망하고 있었다. 이성이 모두 썩어 문드러진 상태에서도, 오직 살고 싶다는 비열한 광기와 장부에 대한 집착만이 그의 영혼을 움직이는 동력원이었다.
스스스슥!
하반신의 수십 개 다리가 일제히 지면을 차며 도철민이 폭풍처럼 돌진해 왔다. 그의 거대한 상반신에서 돋아난 돌기형 주먹들이 대기를 가르며 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형체도 남지 않고 으스러질 파괴력이었다.
하지만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저 품속에서 묵직한 가죽 표지의 '기이 연명 장부'를 꺼내 들었을 뿐이다.
바람이 장부의 페이지를 거칠게 넘겼다. 내 손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동시에 피를 갈구하는 괴이의 온기로 가득했다.
나는 도철민의 기괴한 신체 구조를 응시했다. 무음의 세계 속에서, 내 뇌세포는 극도의 냉정함을 유지하며 그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나갔다.
인간의 영혼 30퍼센트. 제0구역의 어둠이 지닌 침식력 20퍼센트. 그리고 그를 받치고 있는 수많은 시체들의 살점 50퍼센트.
그것은 완벽한 융합이 아니었다. 살기 위해 억지로 기이의 힘과 타인의 육체를 이어 붙인, 기만적이고 불안정한 누더기 주술에 불과했다.
"장부의 거래에는 언제나 엄격한 대차대조가 따르지."
내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나는 장부의 우측 하단, 7화에서 내 피로 적셔 해독해 두었던 '미지의 특별 비밀 조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붉은 핏자국 아래 감춰져 있던 고대의 흘림체 글씨들이 내 손가락끝의 피와 반응하며 선명한 잔상을 남겼다.
[이면의 합의 제9조: 계약자는 영역 내 존재의 부정합성을 고발함으로써, 강제적인 등가성 대차대조를 집행할 권리를 가진다. 단, 고발의 매개체로 상응하는 영적 에너지를 지불해야 한다.]
매개체라면 이미 내게 있었다.
나는 2화에서 뒤틀린 지형 속 기차 바닥을 흐르던 그 기이하고 뜨거운 온기, 비정상적으로 충전되어 있던 '영적 열기'를 떠올렸다. 14화에서 장부의 거래를 통해 내 우측 청각을 내어주는 대신 완전히 흡수하여 장부의 여백에 저장해 두었던 방대한 열에너지였다.
"지불한다."
내가 속삭임과 동시에, 장부의 페이지가 붉은 화염에 휩싸이듯 타오르기 시작했다. 장부 내부에 압축되어 있던 기차의 영적 열기가 내 손끝을 통해 대기 중으로 방출되었다.
화르륵!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눈앞의 공간이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지며 극도의 고열이 도철민이 딛고 있는 지면을 덮쳤다. 제0구역의 차갑고 축축한 어둠 속에서 자라난 도철민의 괴이한 육체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기차의 영적 열기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쩍, 쩍쩍!
도철민의 하반신을 이루고 있던 시체 다리들이 열기에 노출되자마자 비정상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유리에 뜨거운 물을 부은 것처럼, 그의 기괴한 육체 결합부에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장부를 허공에 든 채, 그의 주술 시술 비율을 실시간으로 뒤틀었다.
"이식 등가의 법칙을 발동한다. 네놈의 몸을 구성하는 시체들의 절망과 원한을 장부의 부채로 산입하겠다."
도철민의 얼굴이 기형적으로 일그러졌다. 그의 눈동자들이 사정없이 흔들리며, 벌어진 입에서 시커먼 혈포가 뿜어져 나왔다.
원래라면 그의 몸에 완벽히 귀속되어 작동해야 할 수십 개의 인간 다리들이, 갑자기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왼쪽의 다리가 오른쪽의 다리를 짓밟고, 뒤쪽의 다리들이 앞쪽의 살점을 뜯어내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기어가려 발버둥 쳤다. 이식 등가의 균형이 깨지자마자, 괴이의 거부 반응이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철민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어떻게든 나를 죽이기 위해 수천의 괴물 형상을 한 돌기형 주먹들을 허공으로 난사했다. 사방으로 튀는 뼈 조각과 피비린내 나는 살점들이 공터를 가득 메웠다.
그러나 나는 그 파괴의 소용돌이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왼손을 가볍게 뻗어, 허공에 흩어져 있던 녹슨 쇠사슬들의 단면을 장부의 지배력 아래 두었을 뿐이다.
철그렁!
지면을 울리는 둔탁한 진동과 함께, 대피소 지하에서부터 뻗어 나온 수십 개의 쇠사슬들이 도철민의 거대한 상반신을 옭아맸다. 사슬들은 그의 비대해진 어깨와 목을 사정없이 조여들며 지면에 고정시켰다.
도철민은 사슬을 뜯어내려 발버둥 쳤지만, 이미 거부 반응으로 인해 그의 근육 세포들은 세포 단위로 붕괴하고 있었다. 그의 하반신은 이미 붉고 검은 고름이 되어 황무지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나는 옭아매진 그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불타는 세 쌍의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여전히 비열한 삶에 대한 집착, 그리고 나에 대한 무한한 저주가 담겨 있었다. 동료들을 방패막이로 삼고, 타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며 연명해 온 자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나는 그를 굽어보았다. 내 눈동자에는 그 어떤 분노도, 통쾌함도 없었다. 오직 깊이를 알 수 없는 무감정하고 차가운 종말의 시선만이 있을 뿐이었다.
"도철민. 너는 장부의 가치를 단 한 번도 이해하지 못했다."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어둠 속으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장부는 지배하는 도구가 아니라, 제 살을 깎아 심연을 건너는 외나무다리일 뿐이다. 제물도 없이 다리를 건너려 한 대가를 받아라."
스스스스……!
도철민의 몸뚱이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의 영혼이 지닌 부정합성이 장부의 가차 없는 대차대조에 의해 완전히 지워지고 있었다. 그의 썩어 문드러진 야망과 비열한 이성은, 제0구역의 법칙에 의해 완벽히 분해되어 무(無)로 돌아갔다.
퍼엉!
그의 육체가 한가운데서부터 터져 나가며, 지독한 이계의 유황 가스와 검은 액체가 공터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의 종말을 확인한 순간, 내 가슴속의 박동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요동쳤다. 고대 나침반의 바늘이 가슴을 찌르는 통증이 더욱 선명해졌다.
하지만 승리의 여운을 느낄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쿠구구구구구!
도철민이 폭사하며 내뿜은 방대한 이계 유황의 폭발력과, 장부의 거래 과정에서 방출된 기차의 영적 열기가 제0구역의 왜곡된 공간 경계에 치명적인 과부하를 일으킨 것이다.
지면이 위아래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물리 법칙이 역회전하는 제0구역의 특성상, 폭발의 충격은 사방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솟구쳤다.
머리 위의 어둠이 갈라지며, 거대한 천장 지반 전체가 역중력 상태에 휘말려 위쪽이 아닌 아래쪽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천수만 기의 거대한 철괴들이 감옥 천장에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들은 제0구역의 규칙을 유지하기 위해 고대부터 봉인되어 있던 만 근 무게의 쇳덩이들이었다.
지반의 붕괴와 함께, 그 거대한 철괴들을 지탱하던 사슬들이 차례로 끊어져 나갔다.
그리고 내 시선은 철괴들이 떨어지는 일직선의 궤적 끝에 닿았다.
그곳에는 어두운 보랏빛 결계 속에 묶여 있는,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유일한 혈육.
동생 윤아가 누워 있는 제단이 있었다.
만 근의 철괴들이 대파되어 단번에 윤아가 묶여 있는 제단을 향해 직하 하강하기 시작했다. 시각적인 궤적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완벽한 파멸의 낙하였다.
소리가 지워진 세계에서 종말의 풍경은 기이할 정도로 정갈했다.
머리 위에서 무너져 내리는 철괴들은 마치 거대한 묵시록의 활자들처럼 허공을 가르며 낙하했다. 그것들은 빛을 흡수하는 검은 표면을 번들거리며, 윤아가 누워 있는 제단을 향해 일직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발끝을 타고 올라오는 지면의 격렬한 진동이 뼈마디를 흔들었다.
내 눈동자 속에 낙하하는 철괴의 궤적이 맺혔다. 물리적 거리는 아득했고, 내 육체는 이미 도철민의 습격을 받아 만신창이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저 제단에 닿기도 전에 쇳덩이 밑에 깔려 고기반죽이 될 터였다.
"……."
가슴에 박힌 고대 나침반이 뜨겁게 박동했다. 상처에서 울컥 쏟아진 피가 놋쇠 판의 음각 기하학 문양을 타고 넘쳐흘렀다. 기이 연명 장부가 내 의사와 무관하게 품속에서 펄럭이며 펼쳐졌다. 스스로를 태워 올리듯 붉게 물든 종이 위로 새로운 피의 글씨가 솟아올랐다.
[경고: 제0구역의 물리 법칙 붕괴율 87%.] [고대 나침반의 역방향 중력 간섭 경로를 개방하려면, 영혼의 가장 깊은 축을 이루는 '중심 기억'의 영구 결손이 필요합니다.]
중심 기억. 내 감정 결핍의 유일한 예외이자, 이 지옥 같은 심연을 버티게 해 준 유일한 닻이었다. 동생 윤아의 얼굴, 어린 날 부서진 단칸방 구석에서 내 손을 잡으며 보냈던 윤아의 첫 미소, 그 따뜻했던 온기의 기억들.
그것을 잃는다면 나는 더는 윤아를 구해야 할 '이유'를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저 윤아를 구하겠다는 결벽증적인 '의무와 집착'만이 녹슨 기계 장치처럼 남을 터였다.
하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집착이 나를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이라면, 기꺼이 기계가 되리라.
"가져가라."
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무음의 허락과 함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소중한 것이 뜯겨 나가는 서늘한 감각이 스쳤다. 머릿속의 어떤 구역이 하얗게 표백되었다. 윤아의 웃는 얼굴이 흐릿해지고, 오직 '구해야 한다'는 서늘한 명제만이 뇌리에 각인되었다.
지잉—!
가슴팍에 박힌 고대 나침반의 바늘이 반시계 방향으로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바늘이 돌 때마다, 나침반에서 뻗어 나온 반투명한 보랏빛 역중력의 실들이 허공으로 뻗어 나갔다. 그 실들은 낙하하던 만 근의 철괴들을 거미줄처럼 휘감았다.
스으으으읍.
공기의 흐름이 역전되었다. 아래로 내리꽂히던 거대한 철괴들이 허공에서 일제히 정지했다. 나침반이 만들어 낸 역방향 중력장이 철괴들의 질량을 일시적으로 상쇄시킨 것이다. 철괴들은 기괴한 궤적을 그리며 제단의 비스듬한 허공 너머로 튕겨 나갔다.
쾅! 쿠구구궁!
지반이 뒤흔들리는 충격파가 시각적 먼지구름이 되어 사방으로 퍼졌다. 제단은 무사했다.
나는 비틀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윤아가 누워 있는 제단을 향해 달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가슴에 박힌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은 여전히 내 심장 내부였다.
이상했다. 윤아가 눈앞에 저렇게 누워 있는데, 왜 나침반은 내 가슴속을 가리키는가.
마침내 제단 앞에 도달해 윤아의 어깨를 붙잡으려 손을 뻗은 순간. 서서히 걷히는 먼지 안개 속에서, 제단 위의 '윤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는 맑은 갈색이 아니었다. 빛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빨아들이는, 끝을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심연의 공허였다.
그것은 내 동생의 영혼이 아니었다.
"……!"
제단 위의 존재가 기괴하게 입꼬리를 찢으며 소리 없이 웃었다. 동시에, 내 가슴에 박힌 나침반이 살을 더 깊숙이 뚫고 들어가며 내 심장을 직접 겨눴다.
진짜 윤아는 내 안에 있고, 눈앞의 것은 나를 삼키기 위해 제0구역의 지배자가 파놓은 함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