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붉은 안개가 사방을 덮었다. 시야는 3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다. 콘크리트 바닥은 축축하게 젖었다. 피비린내가 콧속을 찔렀다.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사방이 적막했다. 발소리가 정적을 깼다. 질척이는 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사람들이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숨을 헐떡였다.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났다. 도망치는 이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한태조는 그들 사이에 섞여 걸었다. 태조의 걸음은 느긋했다. 다급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버려진 영화 세트장이다. 부서진 가벽들이 널려 있었다. 썩은 나무 널빤지가 뒹굴었다. 녹슨 철골이 뼈대처럼 솟아 있었다. 한 남자가 태조의 어깨를 밀쳤다. 남자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남자가 속삭였다. "비켜."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태조는 대꾸하지 않았다. 남자는 앞서 달려 나갔다. 안개 속으로 남자의 등 뒤가 사라졌다. 태조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구두 굽이 바닥을 찍었다. 탁. 탁. 탁. 일정한 박자였다. 주변의 공포가 피부에 닿지 않았다. 태조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가슴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이미 마멸되었다. 고통조차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왼손 손가락을 보았다. 끝부분이 짓이겨져 있었다. 언제 다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신경이 죽은 것은 아니다. 뇌가 통증을 거부할 뿐이다. 태조는 손을 내렸다. 시선이 허공 머물렀다. 환영이 보였다. 붉은 안개 너머로 뻗은 손이 보였다. 그 손은 가늘고 작았다. 여동생의 손이었다. 5년 전의 기억이 솟구쳤다. 도살당한 여동생의 몸이 떠올랐다. 사지가 찢긴 채 버려졌던 몸뚱이. 피가 흥건했던 방바닥. 벽에 남겨진 붉은 글씨들. 그 모든 것을 지휘한 자가 있었다. 백도현. 그 이름 석 자가 뇌리에 박혔다. 태조는 이빨을 지그시 맞물렸다. 눈앞의 환영이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차가운 현실이 다시 돌아왔다. 앞서가던 무리가 멈춰 섰다. 거대한 철문 앞이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자물쇠가 쇠사슬에 감겨 있었다. 남자가 자물쇠를 붙잡고 흔들었다. 철거덕거리는 소리가 소란스럽게 울렸다. "안 열려!" 남자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옆에 있던 여자가 그의 입을 막았다. "조용히 해!" 여자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태조는 철문 옆 가벽에 기댔다. 팔짱을 끼고 안개를 응시했다. 바람이 불지 않았다. 그런데 안개가 요동쳤다. 스슥.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쇠붙이가 콘크리트를 긁는 소리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컸다. 안개 속에서 형체가 드러났다. 거대했다. 키가 2미터는 되어 보였다. 몸은 비정상적으로 마르고 길었다. 기형적인 거인이었다. 얼굴에는 눈코가 없었다. 오직 찢어진 입만 존재했다. 입안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했다. 양손에는 거대한 가위가 들려 있었다. 가위날이 붉게 녹슬어 있었다. 그것이 스크리머였다. 이 구역의 도살자였다. 스크리머가 고개를 까딱였다. 소리를 찾는 몸짓이었다. 철문 앞의 남자가 뒤로 물러섰다. 그의 발이 썩은 나무판자를 밟았다. 뿌드득. 작은 소음이 고요를 찢었다. 스크리머의 고개가 꺾였다. 정확히 남자를 향했다. 남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 아아……." 남자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스크리머가 움직였다. 속도가 무지막지하게 빨랐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서걱.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남자의 목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목 없는 몸뚱이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쿵. 둔탁한 소리가 났다. 여자가 눈을 크게 떴다. 비명을 지르려 입을 벌렸다. 태조가 손을 뻗었다. 여자의 입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태조는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여자의 비명이 터져 나왔. "아아아악!" 스크리머의 가위가 번쩍였다. 여자의 몸이 세로로 갈라졌다. 장기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흩어졌다. 그들은 소리를 죽이려 애썼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코를 막고 숨을 참았다. 하지만 공포는 억누를 수 없다. 누군가 끅끅거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스크리머의 신형이 다시 지쳤다. 가위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비명이 멎었다. 육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태조의 뺨에 붉은 점이 찍혔다. 피가 흘러내렸다. 태조는 손가락으로 피를 닦았다. 그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갔다. 비린 맛이 혀끝을 자극했다. 품속이 뜨거워졌다. 가슴 안쪽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태조는 재킷 안으로 손을 넣었다. 두꺼운 가죽 장부가 만져졌다. 괴담 회수 장부였다. 장부의 표면이 맥박처럼 뛰고 있었다. 두근. 두근. 진동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바닥에 흐른 피가 장부로 이끌렸다. 붉은 안개 속의 혈액이 증발했다. 그 증기가 태조의 품으로 스며들었다. 장부가 피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검은 가죽 표면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글씨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채무자: 스크리머] [괴담: 소리를 내면 목이 잘린다] [회수율: 0%] 글씨가 기괴한 빛을 뿜었다. 태조는 장부를 꺼내 들었다. 장부의 첫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갔다. 종이 재질은 거칠었다. 가운데에 붉은 소용돌이 문양이 있었다. 그것이 요동치고 있었다.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임종의 고통이 밀려왔다. 방금 죽은 여자와 남자의 절망. 그들이 죽기 직전 느낀 공포. 그것이 태조의 신경망을 두드렸다. 심장이 조여들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눈앞이 붉게 번지며 시야가 흔들렸다. 대차대조의 법칙이었다. 괴담의 힘을 깨우는 대가였다. 태조는 이를 악물었다. 얼굴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하지만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태조는 통증을 무시했다. 공포를 비웃었다. 고통은 가짜다. 자신은 살아 있다. 살아서 백도현을 죽여야 한다. 그 일념이 고통을 압도했다. 태조가 장부를 꽉 쥐었다. 손가락뼈가 하얗게 드러났다. 장부의 붉은 빛이 강해졌다. 스크리머가 태조를 향해 돌아섰다. 눈이 없는 얼굴이 태조를 응시했다. 스크리머가 가위를 벌렸다. 금속 마찰음이 귀를 찔렀다. 철컥. 철컥. 태조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주변에 살아남은 이들이 태조를 보았다. 그들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미친놈이라는 눈빛이었다. 태조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태조는 크게 소리쳤. "야." 목소리가 세트장 전체에 울렸다. 소음이 사방의 벽에 부딪쳐 반사되었다. 사람들이 귀를 막았다. 스크리머의 거대한 몸이 경직되었다. 그것의 규칙이 발동했다. 소리를 낸 자는 죽인다. 스크리머가 대지 위를 박찼다. 거대한 덩치가 탄환처럼 날아왔다. 가위날이 태조의 목을 겨냥했다. 빛의 궤적이 그려졌다. 태조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른발을 옆으로 뻗었다. 콘크리트 파편을 밟으며 중심을 낮췄다. 가위가 태조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머리카락 몇 올이 잘려 나갔다. 바람의 압력이 얼굴을 때렸다. 태조는 가위의 안쪽 품으로 파고들었다. 스크리머의 가슴이 눈앞에 있었다. 태조는 왼손으로 장부를 펼쳤다. 붉은 소용돌이가 격렬하게 회전했다. "해킹한다." 태조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장부에서 푸른 불꽃이 일었다. 그것은 소음을 빨아들이는 결계였다. 스크리머가 내는 모든 진동이 흡수되었다. 가위가 부딪치는 소리도 사라졌다. 스크리머의 발소리도 묵음이 되었다. 인과율의 왜곡이었다. 스크리머는 소리를 감지하지 못했다. 그것의 존재 기반이 흔들렸다. 괴담의 규칙이 오작동을 일으켰다. 스크리머의 몸이 허공에서 굳었다. 방향을 잃은 괴물이 비틀거렸다. 태조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장부의 우측 페이지를 움켜쥐었다. 그곳에 쓰인 글씨가 빛났다. [압축 소음 탄환 생성] 태조의 오른손에 푸른 구체가 맺혔다. 세트장 안의 모든 소리가 모인 구체였다. 바람 소리도 있었다. 비명 소리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점으로 압축되었다. 태조는 구체를 쥔 주먹을 내질렀다. 스크리머의 턱밑을 정확히 겨냥했다. 쾅! 엄청난 폭음이 터져 나왔. 압축되어 있던 소음이 한 번에 방출되었다. 물리적인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졌다. 가벽들이 뒤로 넘어졌다. 안개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스크리머의 머리가 뒤로 꺾였다. 괴물의 목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우드득. 검은 피가 허공에 뿌려졌다. 스크리머의 몸이 바닥에 처박혔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괴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머리가 반쯤 날아가 있었다. 완벽한 처단이었다. 태조는 주먹을 내렸다. 오른손 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장부를 덮었다. 탁. 가죽 표지가 맞물리는 소리가 맑았다. 머릿속의 고통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대차대조의 채무가 청산되었다. 태조는 숨을 고르며 바닥을 보았다. 스크리머의 시체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검은 진흙처럼 변해갔다. 그리고 그 흔적 속에 무언가 남았다. 태조는 허리를 숙였다. 그것을 집어 들었다. 붉은빛을 띠는 작은 열쇠였다. 열쇠의 머리 부분에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해골이 십자가를 물고 있는 형상이었다. 밤의 골고다. 살인마 연합의 표식이었다. 태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괴물은 그들의 사냥개에 불과했다. 진짜 사냥은 이제 시작이었다. 태조는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살아남은 민간인들은 넋을 잃고 있었다. 그들은 태조를 괴물 보듯 바라보았다. 태조는 그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안개 저편을 응시했다. 발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까보다 훨씬 무겁고 규칙적인 소리였다. 진흙을 밟는 소리가 아니었다. 단단한 군화가 자갈을 밟는 소리다. 벅. 벅. 벅. 피비린내가 짙어졌다. 안개 너머에서 거대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스크리머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박감이었다. 태조는 장부를 다시 꽉 쥐었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새로운 사냥감이 다가오고 있었다.

안개가 쩍 갈라졌다. 검은 군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는 거대한 쇠사슬을 감고 있었다. 쇠사슬 끝에는 갈고리가 매달렸다. 갈고리에선 피가 뚝뚝 떨어졌다. 사내가 바닥의 시체를 보았다. 그의 눈자위가 가늘게 떨렸다. "스크리머가 죽었다고?" 사내의 목소리에선 쇳소리가 났다. 그의 시선이 태조에게 닿았다. 태조는 장부를 가볍게 털었다. 종이에 묻은 피가 흡수되었다. 사내의 눈이 장부로 향했다. 그의 얼굴에 탐욕이 번졌다. "네놈이 그 장부의 주인이군." 사내가 갈고리를 빙빙 돌렸다. 쉭. 쉭. 바람 가르는 소리가 매서웠다. 태조는 비스듬히 섰다. 가벽 뒤의 틈새를 눈여겨보았다. 도주로가 아닌 저격 각도였다. "너희는 누구지?" 태조가 건조하게 물었다. 사내는 대답 대신 팔을 뻗었다. 갈고리가 탄환처럼 날아왔다. 태조는 몸을 옆으로 굴렸다. 쿠웅! 갈고리가 콘크리트 기둥을 박살 냈다. 돌가루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태조는 깨진 파편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사내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사내가 고개를 돌려 파편을 피했다. 그 찰나에 태조가 거리를 좁혔다. 오른손이 사내의 턱을 겨냥했다. 사내는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의 몸놀림은 짐승 같았다. "하급 사냥꾼이라도 쉽지 않군." 태조가 가볍게 중얼거렸다. 사내는 품에서 붉은 신호탄을 꺼냈다. 그가 신호탄의 고리를 잡아당겼다. 피쉭! 붉은 불꽃이 하늘로 솟구쳤다. 안개 속에 붉은빛이 번졌다. 사내가 기괴하게 웃었다. "이제 넌 도망칠 수 없다." 그의 목소리에 확신이 차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 마리가 아니었다. 수십 마리의 사냥개들이 짖는 소리였다. 동시에 안개 속에서 그림자들이 솟아올랐다. 그들의 손에는 흉기가 들려 있었다.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었다. 태조는 장부를 꽉 쥐었다. 심장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두려움 대신 기묘한 흥분이 일었다. 과연 이 지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태조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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