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초대 맹주의 석함에서 피어오른 고색창연한 기운이 당신의 손끝을 적신다. 정사합일(正邪合一). 그 찬란한 비급의 봉인이 풀리려던 찰나, 지반을 흔드는 거대한 진동이 지하 묘실 전체를 뒤흔든다.

고동소리보다 묵직한 이명이다. 무림맹의 비기이자 최악의 살진인 음양몰락진(陰陽沒落陣)이 급동한 탓이다. 지면이 비틀리고, 백여 길 머리 위의 천장이 갈라져 내린다. 버티고 서 있던 석주들이 연쇄적으로 꺾인다. 거친 암석 가루가 안개처럼 퍼지며 시야를 가린다.

당신은 석함을 움켜쥔 손가락에 억센 힘을 준다. 손끝이 하얗게 질린다. 구결이 새겨진 석판을 품에 안으려 몸을 틀었으나, 공중에서 낙석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쿠구구구쿵!

성인 장정 여럿이 매달려도 들지 못할 거석이 당신의 어깨를 강타한다. 뼈가 처참하게 으스러지는 파공음이 고막을 찌른다. 당신은 턱을 굳게 사린다. 비린 혈향(血香)이 목구멍을 역류하여 입안을 가득 채운다.

한 걸음 내딛으려 하나, 무릎이 먼저 바닥에 꺾인다. 단전에 남은 마지막 진기(眞氣)를 끌어올려 보지만, 몰락진의 이진(異陣) 기류가 경맥을 사정없이 뒤흔든다. 맥로가 꼬이고 기혈이 뒤틀린다.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검붉은 선혈이 울컥 뿜어져 나온다.

시야가 서서히 붉게 물들어 간다. 허물어지는 석벽 틈새 너머로 멀어져 가는 지상의 희미한 빛이 보인다. 위선(僞善)으로 가득 찬 군자들이 지배하는 세상. 그들이 견고하게 구축한 가짜 평화가 이제 이 어둠 속에 진실의 전부를 묻으려 하고 있다.

당신의 손에 쥐여 있던 석판의 온기가 서서히 식어간다. 천장의 붕괴는 단 한 치의 자비도 없다. 마침내 수천만 근의 흙더미와 바위가 온전했던 초대 맹주의 묘실을 송두리째 짓눌러 삼켜버린다.

천하를 공포로 호령하던 흑도(黑道) 황제의 기세도, 한 줄기 빛조차 허락되지 않는 깊은 심연의 무덤 속으로 가라앉는다. 정사와 사도의 경계가 허물어진 거대한 압살의 혼돈만이 가득할 뿐이다.

당신은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버티며 마지막 허공을 응시한다. 암흑이 영원한 장막을 친다. 숨결이 멎는다. 정파의 비밀은 구천의 먼지로 화했고, 무림은 여전히 차디찬 위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백 길 지하의 깊은 침묵 속에서, 사파 제일인 장무극의 전설은 영원한 종언(終焉)을 고한다.

이전화목차마지막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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