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구구구구구!
지하 동굴의 천장이 쩍쩍 갈라지며 흩날리는 대리석 가루가 매캐한 안개처럼 사방을 뒤덮었다. 바스토프 추기경이 찢어발긴 검은 양가죽 스크롤에서는 심연의 끈적한 마기가 촉수처럼 뻗어 나와 기둥을 휘감았다. 고대 이단 저주인 ‘영혼 분쇄 주문’이 기동하는 순간이었다.
“교수님! 천장이 무너집니다!” “으아악! 살려줘! 여기서 나가야 해!”
방금 전까지 기세등등하게 나를 규탄하려던 귀족 학파의 자제들이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했다. 헨리 폰 벨몬트는 제 화려한 실크 망토가 흙먼지에 더러워지는지도 모른 채 머리를 감싸 쥐고 바닥을 기었다.
내 이마를 타고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시스템 알림: 악녀 지치(마기) 수치가 98%에 도달했습니다.] [경고: 한계치 임박. 2% 추가 누적 시 자아가 붕괴하며 정체가 완전히 노출됩니다.]
시야 한구석에 뜬 붉은 경고창이 눈을 찔렀다. 머릿속이 깨질 듯이 아려왔다. 제국 평판 장부를 켜서 이 상황을 타개할 최적의 경로를 계산하고 싶었지만, 단 1%의 마기라도 더 방출되는 순간 내 앞의 사냥개, 칼리안 대공이 내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이 분명했다.
칼리안은 이미 대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의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검기가 낙석들을 산산조각 내고 있었지만, 동굴 전체를 덮치는 광범위한 붕괴를 검 한 자루로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의 예리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엘리샤 교수, 이곳의 구조를 가장 잘 아는 건 그대겠지. 탈출구가 어디인가?”
그의 음성은 지독하게 침착했으나,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이 검자루를 거칠게 쥐는 모습에서 일말의 초조함이 읽혔다.
‘내 은퇴 자금! 내 남부 휴양지 저택이 콘크리트 가루가 되게 둘 순 없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나는 소리쳤다.
“멜리사! 지금 당장 가방에서 그걸 꺼내세요!”
저 멀리 구석에서 머리에 가방을 뒤집어쓰고 납작 엎드려 있던 수석 조교 멜리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의 쫑긋해진 귀가 내 목소리를 포착했다.
“예? 예?! 뭘요? 소모품 대장인가요, 아니면 제 사직서인가요?” “5화…… 아니, 지난번에 역사 보관소 폐기물 더미에서 주웠다던 그 붉은 인장이 찍힌 양가죽 조각 말이에요!”
멜리사는 울상을 지으며 가방을 미친 듯이 뒤적였다. 마침내 그녀의 손끝에서 꼬질꼬질하지만 붉은 인장의 마력이 희미하게 일렁이는 가죽 조각이 딸려 나왔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세드릭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세드릭은 붕괴하는 신전의 잔해 속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도망치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의 품 안에서 은은한 은빛 광채가 흘러나왔다.
“거기서 멈추시죠, 세드릭 씨.” “이, 이 비천한 년이……!”
내가 소매 안에서 채찍처럼 가느다란 마력사를 뻗어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툭, 하고 그의 품에서 떨어진 것은 다름 아닌 고대 은제 깃펜이었다. 임용 첫날 내 연구실에서 그가 훔쳐 갔던, 그리고 내게 역모의 누명을 씌우려 했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내 물건을 함부로 가져간 도둑고양이에게는 합당한 처벌이 필요한 법이죠.”
나는 가볍게 은제 깃펜을 회수해 손가락 사이로 우아하게 돌렸다. 펜촉 끝에 서린 차가운 마력이 내 손가락을 자극했다. 이 깃펜은 단순한 필기도구가 아니었다. 이 고대 신전의 제어 장치를 활성화하는 마력 유도체였다.
나는 멜리사에게서 양가죽 조각을 낚아채듯 받아들었다. 그리고 아카데미 지하 역사 보관소 지도에는 결코 기재되어 있지 않던, 오직 내 머릿속 ‘장부’와 비밀 지도에만 존재하던 벽면의 기하학적 문양으로 달려갔다.
“전하! 기사들에게 명해 학생들을 이쪽으로 모으십시오!”
벽면에 새겨진 거대한 사자 문양의 눈에 멜리사가 가져온 붉은 인장 양가죽 조각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은제 깃펜의 끝으로 사자의 심장부를 정확히 찔렀다.
지잉-!
뇌리를 울리는 공명음과 함께, 단단히 닫혀 있던 석벽이 연기처럼 스러지며 지도에 없던 ‘비밀 지하 동굴’의 거대한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쪽에서는 신선하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어, 어라? 문이 열렸다!” “살았다! 살았어!”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듯 동굴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밀지 마십시오! 질서를 유지하세요! 벨몬트 공자, 그 화려한 망토를 찢어서 뒤처진 학생들의 밧줄로 쓰세요. 명예로운 귀족 가문의 자제라면 목숨을 구걸하기 전에 품위부터 지키는 겁니다!”
내 서슬 퍼런 외침에 헨리는 얼굴이 벌게진 채 제 값비싼 벨벳 망토를 가차 없이 찢어 다른 학생들을 끌어당겼다. 위기 앞에서도 흐트러짐 없는 내 통솔력에, 공포에 질려 있던 아카데미의 귀족 자제들의 눈빛이 경외감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엘리샤 교수님이 우릴 구하셨어…….” “역사 교수가 아니라 거의 대제사급의 혜안이시다……!”
[시스템 알림: 아카데미 구성원들의 평판이 폭발적으로 상승합니다.] [‘카이로스의 구원자’ 칭호가 임시 활성화됩니다.]
속으로는 정년퇴임 후의 안락한 삶을 방해한 바스토프 추기경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지만, 겉으로는 누구보다 자애롭고 고결한 학자의 미소를 지었다.
“모두 신속히 대피하세요. 이곳은 고대 아르덴 가문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구축해 둔 면책의 통로, 그 어떤 흑마법도 침범할 수 없는 성역입니다.”
마지막 기사와 학생까지 비밀 동굴 안으로 밀어 넣었을 때, 천장의 거대한 대들보가 굉음을 내며 우리 머리 위로 떨어졌다.
콰아아앙!
“엘리샤!”
칼리안의 외침과 함께, 그의 강인한 팔이 내 허리를 낚아챘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히며 단단한 가슴팍에 내 뺨이 파묻혔다. 은은한 침엽수 향과 함께 차가운 금속 갑옷의 촉감이 전해졌다.
우리는 무너져 내리는 돌더미를 간발의 차로 피하며 비밀 동굴의 가장 깊숙한 안쪽, 이중 철문으로 닫힌 밀실로 굴러떨어졌다. 뒤이어 입구가 완전히 붕괴하며 거대한 바위들이 통로를 가로막았다.
정적.
오직 거친 숨소리만이 좁은 밀실 안을 채웠다.
“……하아, 하아.”
내 목덜미에 닿는 칼리안의 숨결이 지독하게 뜨거웠다. 그의 가죽 장갑을 낀 손이 내 어깨를 꽉 쥐고 있었다.
“무사한가, 엘리샤.”
“덕분에 뼈는 무사한 것 같군요, 전하. 하지만 제 품위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것 같습니다만.”
엉뚱한 내 대꾸에 칼리안이 나지막한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어 가고 있었다.
고대 저주의 여파와 지하의 탁한 공기 때문인지, 그의 체내에 잠재되어 있던 마력이 폭주하려는 전조가 보였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진동이 내 피부를 따갑게 찔렀다.
‘안 돼. 여기서 대공이 폭주하면 이 밀실째로 매몰된다.’
나는 황급히 그의 주머니를 뒤적였다.
“무슨 짓을…….”
“조용히 하시고 가만히 계세요, 전하.”
그의 품에서 찾아낸 것은 다름 아닌 작은 ‘로즈마리 향낭’이었다. 은실로 정교하게 수놓아진 향낭에서는 미세한 마기 반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난날 내가 평판 장부의 연산력으로 정제해 두었던, 대공의 마력 폭주를 억제하는 독특한 주파수의 마기 무력화 향낭이었다.
나는 향낭을 쥐고 내 체내의 마기를 미세하게 흘려보내 공명시켰다.
윙-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향낭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칼리안의 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붉은 광기가 거짓말처럼 가라앉기 시작했다. 거칠던 그의 맥박이 차분하게 안정을 찾아갔다.
칼리안은 멍한 눈으로 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대…… 대체 정체가 무엇인가? 이 향낭의 비밀을 어떻게 알고…….”
“그 질문은 나중에 하시죠. 지금은 더 흥미로운 걸 발견했으니까요.”
나는 그를 밀쳐내고 밀실 한가운데에 놓인 낡은 철제 궤짝으로 다가갔다. 먼지를 털어내고 궤짝을 열자, 그 안에는 아르덴 가문의 진짜 비밀 장부들과 함께 한 장의 오래된 황금빛 양가죽 문서가 보관되어 있었다.
양가죽 문서를 펼친 순간, 내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제국 평판 장부 열람: 헤스벨트 대공가와 아르덴 가문의 계약서] - 내용: 80년 전, 북부 개간 사업 당시 헤스벨트 대공가가 아르덴 가문으로부터 빌린 영구 채무 및 마력석 광산 지분 30%의 양도 계약서. 아직 소멸시효가 끝나지 않음.
“이런, 대공 전하.”
나는 고풍스러운 실크 손수건으로 손가락을 닦으며, 양가죽 문서를 칼리안의 코앞에 흔들어 보였다.
“우리 가문이 반역죄로 몰려 재산이 몰수되었다고 해서, 헤스벨트 대공가가 진 ‘영구 채무’까지 소멸하는 건 아니랍니다. 제국법 제104조에 따르면, 가문의 생존자가 단 한 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 채권은 유효하거든요.”
칼리안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이 상황에서도 돈 계산을 하고 있는 건가? 목숨이 경각에 달린 마당에?”
“돈이 아니라 안전보장입니다, 전하. 제가 이 채권을 청구하지 않는 대가로, 전하는 제 종신 교수 임명과 면책 특권을 황실 앞에서 적극적으로 옹호해 주셔야겠습니다.”
나는 우아하게 턱을 치켜세웠다.
“어떻습니까? 아주 합리적인 거래 아닙니까?”
칼리안은 잠시 나를 쏘아보더니, 이내 가죽 장갑을 벗어 던지고 맨손으로 내 뺨을 살짝 쓸어내렸다. 그의 손가락 끝에 서린 열기가 뺨을 간지럽혔다.
“기꺼이. 그대의 그 지독한 계산기 속에 내 자리가 있다면, 얼마든지 대가를 지불하지.”
그의 눈동자에는 이제 사냥감을 향한 의심 대신, 자신과 동등한 지략가를 향한 깊은 경외와 소유욕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 * *
몇 시간 뒤, 아카데미 지원 기사단과 제국 마법사들의 복구 작업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지상으로 연결된 비밀 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지상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아카데미 본관 건물 일부가 무너져 내렸고, 연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가장 빛나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찰과상 하나 없이 무사히 구조된 귀족 자제들과 기사들이었다.
“엘리샤 교수님 만세!” “카이로스의 위대한 학자이자 구원자이십니다!”
학생들의 부모인 제국의 유력 귀족들이 달려와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라파엘 학장과 평의회 의원들 역시 내게 허리를 굽히며 감사를 표했다. 이번 사건으로 내 제국 평판 등급 SSS ‘아카데미 수호신’의 위상은 황실조차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인 영역에 도달했다.
반면, 무너진 유적의 잔해 속에서 꾀죄죄한 몰골로 기어 나오던 바스토프 추기경의 앞길을 막아선 이들이 있었다.
제국 세무관들과 황실 직속 성기사단이었다.
“바스토프 추기경. 당신을 교황청 자금의 불법 세금 포탈, 제국 역사 유물 무단 도굴 및 횡령 혐의로 체포합니다.”
세무관의 차가운 선언에 추기경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 이게 무슨 소리냐! 나는 신성한 교회의 대리자다! 감히 누가 나를 체포한단 말이냐!”
“멜리사 조교가 역사 보관소에서 발견한 붉은 인장 양가죽 조각이 바로 당신이 세금을 포탈하며 위조했던 진짜 비밀 거래 장부의 봉인이더군요.”
내가 군중 사이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게다가 이 무너진 유적 밑바닥에서 당신이 훔치려 했던 교회의 금서들과 성물들이 고스란히 발견되었습니다. 도굴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되는 것만큼 명확한 사필귀정은 없겠지요.”
“이…… 이 사악한 악녀가……!”
추기경이 광증 어린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지만, 무자비한 철제 수갑이 그의 손목을 무겁게 채웠다. 그는 허망하게 기사들의 손에 이끌려 구치소로 압송되기 시작했다.
그의 몰락은 완벽했고, 내 승리는 눈부셨다. 이제 내 앞길을 가로막을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두두두두두!
지평선 너머에서 거대한 말발굽 소리가 아카데미의 대지를 뒤흔들었다. 백색의 갑옷을 입고, 황실의 붉은 용 문양 깃발을 치켜든 황실 근위대와 이단 심문관들의 대부대가 아카데미 정문을 부수듯 밀고 들어왔다.
그들의 중심에 선 기사단장이 황금빛 옥새가 선명하게 찍힌 칙서를 높이 치켜들었다.
“황명이다! 아카데미 평의회는 들으라!”
기사단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광장에 모인 군중의 귀를 찢었다.
“대역죄인 아르덴 가문의 잔당으로 의심되는 엘리샤 폰 아르덴 교수의 종신 임명을 전면 거부한다! 아울러, 그녀를 이단 및 황실 모독죄로 즉시 체포하여 황궁 지하 감옥으로 가두라는 황제 폐하의 직속 명령이다!”
서릿발 같은 선언과 함께, 백색의 검날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겨누어졌다.
방금 전까지 환호하던 광장에 찬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내 은퇴 비자금과 정년퇴임의 꿈이, 황제의 직접적인 개입이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다시 한번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