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쿨럭!

바닥으로 시커먼 핏덩이가 쏟아졌다. 시멘트 바닥의 갈라진 틈새로 스며드는 핏물이 탁했다. 마력이 전부 타버린 심장은 1분마다 한 번씩 바늘로 찌르는 듯한 극통을 내뿜었다.

"하아, 하아……."

강지한은 벽에 등을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한때 전 세계 랭킹 1위로 군림하며 하늘을 가르던 손이었다. 지금은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서울 변두리의 지하 단칸방에서 하루하루 죽어가는 퇴물에 불과했다.

지익, 지이익.

구석에 놓인 구형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지지직거리며 화면을 띄웠다. 화려한 조명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남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신성 길드의 수장, 유채린 헌터가 이번 S급 게이트 소탕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옆에 계신 세계 헌터 협회 부회장 도준혁 님과 함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모든 영광을 국민 여러분께 돌립니다. 과거 서울 대폭발 사건의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겠습니다.”]

카메라를 향해 자애로운 미소를 짓는 유채린. 그녀의 곁에서 든든한 동반자처럼 웃고 있는 도준혁.

지한의 아랫입술이 짓이겨졌다. 이빨 사이로 비린 생혈이 다시 흘러내렸다.

서울 대폭발 사건. 그들이 짜놓은 판에 걸려들어 마력을 봉인당하고, 영웅에서 순식간에 게이트 폭발의 주범이자 사기꾼으로 전락했던 날. 믿었던 연인과 동료의 배신은 지한의 영혼을 통째로 도려냈다.

그들은 승승장구하며 세계의 정점에 섰고, 지한은 이곳 쓰레기더미 속에서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통증에 지한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마력 역류였다. 방송을 켜지 않으면 마력이 역류해 심장이 터져 죽는 기괴한 저주. 아니, 저주가 아니라 각성이었다.

바로 그 순간. 지한의 흐릿해진 시야 속으로 기괴한 빛무리들이 끼어들었다.

윙—!

귓가를 찢는 고주파 소음과 함께, 눈앞에 난생처음 보는 반투명한 푸른빛 창들이 우후죽순 떠올랐다.

[시스템 권능 '우주망 TV'가 활성화됩니다.] [지구의 헌터 각성 시스템과 기괴한 융합을 개시합니다.] [고유 BJ 상태창이 각성되었습니다!]

차가운 기계음이 머릿속을 울렸다. 지한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BJ 상태창? 이 다 죽어가는 퇴물에게 이제 와서 방송이라도 하라는 건가.

[경고: 현재 실시간 시청자 수가 '0명'입니다.] [마력 역류 제한 시간이 시작됩니다. 남은 시간: 05:00] [시간 초과 시, 심장 혈관이 파열되어 사망합니다.]

"……미친."

가슴 뼈 안쪽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진짜였다. 경고창의 붉은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심장을 쥐어짜는 압박감이 배로 강해졌다. 살기 위해서는 방송을 켜야 했다. 그것도 아주 자극적인 방송을.

지한은 떨리는 손을 뻗어 허공의 시스템 화면을 건드렸다.

[채널을 개설합니다.] [채널명을 입력해 주십시오.]

지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체를 숨기고 쥐새끼처럼 목숨을 연명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자신을 나락으로 보낸 자들의 목을 따고, 1000억 원 대의 은퇴 자금을 쥐고 떵떵거리며 살기 위해서는 정면 돌파뿐이다. 비난이든 욕설이든, 대중의 관심이라는 트래픽을 힘으로 치환하면 그만이었다.

그는 거침없이 채널명을 적어 넣었다.

[채널명: '퇴물 1위의 생존쇼 - 은퇴 번복한다.'] [라이브 스트리밍이 시작됩니다!]

방송이 켜지기 무섭게, 우주망 TV의 기괴한 알고리즘이 작동했다. 지구의 인터넷망은 물론, 저 멀리 우주의 경계를 넘어선 성좌들의 시야에까지 지한의 방송방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띵동! 띵동!

[시청자 '방구석 미식가'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시청자 '심해의 트롤러'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시청자 '정의는 살아있다'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순식간에 시청자 수가 두 자릿수를 돌파했다. 채팅창이 미친 듯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 이거 진짜 강지한임? —와, 서울 대폭발 주범 새끼 사기치다가 런하더니 결국 인방 충으로 복귀했네ㅋㅋㅋ —은퇴 번복? 야 미쳤냐? 마력 다 날아가서 폐인 됐다며? —주작 방송이네. 썸네일 어그로 오지고요.

인간들의 조롱 섞인 채팅 사이로, 붉은빛을 띠는 성좌들의 메시지가 섞여 들었다.

[성좌 '방구석 미식가'가 콧방귀를 뀝니다: "지구의 랭킹 1위라는 놈의 꼴이 왜 이 모양이지? 마력의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는군."] [성좌 '심해의 트롤러'가 낄낄거립니다: "퇴물이 돈 떨어지니까 구걸 방송 켰네! 꿀잼 직관 간다!"]

지한은 화면을 향해 비스듬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동정표를 구걸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오히려 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돈 떨어져서 켠 거 맞는데, 구걸은 안 한다."

지한의 목소리는 낮고 가라앉아 있었지만, 묘한 압도감이 있었다.

"욕하고 싶으면 나갈 필요 없이 여기서 실컷 짖어라. 트래픽 올려줘서 고마우니까."

채팅창이 일순간 멈칫했다가, 이내 더 격렬한 폭소와 비난으로 도배되었다.

—ㅋㅋㅋㅋㅋ 태도 보소? 여전하네 싸가지. —야, 입만 살아있는 퇴물 새끼야! 마력 0인 거 세상이 다 아는데 뭔 은퇴 번복이야! —인증해 봐라! 마력 측정기 가져와서 인증하면 인정해 줌ㅋㅋㅋ

그때, 시스템 알림음이 고막을 찔렀다.

[성좌 '방구석 미식가'가 미션을 투하합니다!]

[!] 미션: 헌터 실격 테스트 - 조건: 현재 자신의 마력 측정 수치를 실시간으로 인증하시오. - 성공 보상: 마력 1% 영구 복구 - 실패 페널티: '퇴물' 낙인 획득, 모든 스탯 영구 삭감 (지망생 수준으로 추락)

지한의 눈이 번뜩였다. 시스템이 주는 미션. 성공하면 마력이 복구되지만, 실패하면 진짜로 재기 불능의 퇴물이 되어 죽는다. 성좌들은 주인공이 고통받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즐기는 변태적인 관전자들이었다. 그들은 지한의 마력이 완전히 소멸했다고 확신하고 이 미션을 던진 것이 분명했다.

마력 인증이라. 지한은 방구석 한쪽에 처박혀 먼지가 가득 쌓인 가죽 가방을 끌어당겼다. 그 안에서 손때 묻은 구형 개인용 마력 측정기가 나왔다. 여론 장악을 위해 길드들이 보급한, 오차율 0%의 정밀 측정기였다.

"마력 측정기, 여기 있다."

지한이 측정기를 화면에 비추자 채팅창이 요동쳤다.

—오? 진짜 하네? —수치 10도 안 나올 거에 내 손목아지 건다ㅋㅋㅋ —일반인 평균이 15인데, 이 새끼 마력 구멍 뚫려서 5도 안 나올 듯.

지한은 측정기를 켜기 전, 화면을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성좌들을 도발했다.

"겨우 내 마력 보는데 마력 1%를 건다고? 성좌라는 놈들이 쩨쩨하게 굴기는. 우주 규모의 큰손들이라더니, 주머니 사정이 딱한 모양이지?"

이 도발은 정확히 먹혀들어 갔다.

[성좌 '심해의 트롤러'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 날뛰기 시작합니다!] [성좌 '심해의 트롤러'가 특별 추가 미션을 제안합니다!]

[!] 추가 미션: 트롤의 역설 - 조건: 마력 측정 수치가 '10 이하'인 것을 증명하시오. - 성공 보상: 성좌의 하사품 '심연의 톱날(봉인)' 지급 - 실패 페널티: 없음 (단, 대가로 착용 시 매초 마력을 극소량 강제 흡수하는 저주가 부여됨)

"심연의 톱날?"

지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성좌 심해의 트롤러가 던진 이 아이템은 기괴한 페널티가 붙은 저주받은 무기였다. 마력을 갉아먹는 무기라니, 마력이 없는 퇴물에게는 쥐어줘도 쓰지 못할 자살용 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한의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했다.

'매초 마력을 흡수한다고?'

지금 지한의 마력은 역류하여 전신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오히려 이 톱날 검을 사용해 역류하는 마력을 강제로 배출하거나 제어할 수 있다면? 이것은 페널티가 아니라, 자신에게 딱 들어맞는 완벽한 조율 장치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마력 수치 10 이하를 증명하는 것? 지금의 지한에게는 숨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좋지. 딜 성립이다."

지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측정기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웅—!

기계가 작동하며 푸른빛이 지한의 손바닥을 훑었다. 그리고 이내, 붉은색 디지털 숫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 마력 수치: 3 ]

완벽한 밑바닥. 일반인보다도 못한, 헌터 지망생조차 비웃을 수준의 처참한 수치였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3이네! —개퇴물 확정 탕탕탕! —야, 3이면 길가던 슬라임한테 들이받혀도 뒤지는 수준 아니냐? —저러면서 은퇴 번복을 하겠다고 입을 털었어? 뻔뻔함 하나는 랭킹 1위 맞네ㅋㅋㅋ

채팅창이 비웃음과 조롱으로 폭발했다. 하지만 지한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의 눈앞에 쏟아지는 시스템 메시지들이 진짜 보상이었으니까.

[미션 '헌터 실격 테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성공 보상: 전성기 마력의 1%가 영구 복구됩니다.]

[!] 복구 진행률: [ 1% / 100% ]

콰아아아!

순간, 지한의 단전 부근에서 꺼져가던 불씨가 다시 피어오르는 듯한 극도의 열감이 솟구쳤다. 가슴을 짓누르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끊어졌던 마력 회로의 일부가 다시 이어지는 짜릿한 감각에 지한은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힘이 돌아오고 있었다. 겨우 1%였지만, 일반인 수준의 마력과는 순도 자체가 궤를 달리하는 전성기의 '신화급' 마력이었다.

이어서 또 다른 알림이 떴다.

[추가 미션 '트롤의 역설'을 완료하였습니다!] [성좌 '심해의 트롤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자신의 뺨을 때립니다.] [미션 완료 보상이 지급됩니다.]

스스스슥!

허공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이내 기괴하게 톱날이 돋아난 칠흑빛 단검 하나가 지한의 손아귀로 떨어졌다.

[[ 아이템: 심연의 톱날 (봉인) ]] - 등급: 신화 (현재 봉인 상태) - 효과: 착용자의 마력을 매초 1씩 흡수하여 예리함을 극대화함. - 설명: 심해의 지배자가 사용하던 이빨로 제련된 검. 마력이 바닥나면 착용자의 생명력을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크하하하!"

지한은 단검을 쥐고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검을 쥐자마자 몸 안에서 요동치던 불안정한 마력이 검끝으로 스르륵 흡수되며 안정을 찾아갔다. 완벽했다. 이 검은 지한의 역류하는 마력을 제어할 최고의 브레이크였다.

화면 너머의 성좌들은 물론, 시청자들은 지한이 허공에서 갑자기 무기를 꺼내 들자 큰 충격에 빠졌다.

—어? 저거 방금 허공에서 나온 거 맞냐? —무슨 아공대 가방이라도 쓴 거야? —주작이네! 특수효과 오지게 넣었네 퇴물 새끼ㅋㅋㅋ —야, 근데 저 검 기운이 심상치 않은데? 진짜 아이템인가?

지한은 검날을 가볍게 튕겼다. 쨍—! 하는 청아한 소리가 좁은 지하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의 시선이 카메라 렌즈를 꿰뚫을 듯이 똑바로 향했다.

"주작이라고 짖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라."

지한의 목소리에 마력이 실렸다. 비록 1%에 불과한 마력이었지만, 전직 세계 1위의 위압감은 채팅창의 소란을 단숨에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말했지. 나 은퇴 번복한다고."

지한은 검을 허리에 차며, 카메라를 향해 선언했다.

"내일 아침 9시. 서울 외곽의 C급 야산 던전으로 간다."

그의 폭탄선언에 채팅창이 다시 한번 뒤집어졌다.

—C급? 마력 3짜리가 C급 던전을 간다고? —거기 자살하러 가냐? —진짜 미쳤네. 어그로 끌다가 내일 시체로 뉴스 나오겠네.

지한은 비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방어구도, 파티원도 없다. 무기는 오직 이 톱날 검 하나."

그가 단검의 자루를 툭툭 쳤다.

"맨몸으로 들어가서 보스까지 썰어버리는 걸 실시간으로 중계해주지."

[실시간 시청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현재 시청자 수: 3,412명 돌파!] [마력 역류 제한 시간이 완전히 해제되었습니다.]

지한은 카메라를 향해 검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내일 봐라. 도망치지 말고 끝까지 지켜보라고."

그 말을 끝으로 지한은 가차 없이 방송 종료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검게 암전되며 방 안에는 고요함이 찾아왔다. 하지만 허공에 남은 푸른빛 시스템 창은 여전히 지한의 눈앞에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획득한 보상 내역] - 영구 복구된 마력: +1% (전성기 대비) - 획득 장비: 심연의 톱날 (봉인) - 예약 대기 시청자 수: 3,412명 (인지도 대폭 상승!)

지한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자신의 심장 박동을 느꼈다. 규칙적인 고동. 그리고 손끝에서 느껴지는 벼려진 칼날의 감각.

복수의 서막이, 이제 막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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