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주님."
르네의 입가에 핀 미소는 밤안개처럼 서늘하면서도, 어딘가 달콤한 모카 번의 향기를 닮아 있었다. 그녀가 레온하르트의 넓고 단단한 손바닥 위에 떨어뜨린 두꺼운 양장 문서는 묵직한 마찰음을 내며 안착했다.
레온하르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제 손바닥 위에 놓인 종이 뭉치와 르네의 맑은 눈동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얀 가죽 장갑을 낀 그의 손가락 끝이 천천히 움직여 서류의 첫 장을 들추었다.
바스락.
종이가 넘어가는 아주 작은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그 순간, 사자 수인 가문의 냉혹한 가주인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무섭게 일렁였다.
"이건……."
"바실리 상단이 지난 5년간 제국 황실을 기만하며 축적한 세금 탈루 내역과, 금지 품목인 적유 마석을 밀수해 군사 무기를 제조하려 한 명백한 물증입니다. 날짜와 담당 관료의 서명, 그리고 뇌물이 오간 비밀 계좌까지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기록되어 있지요."
르네는 침대 옆 협탁으로 가만히 걸어가, 그 위에 놓여 있던 작은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병 안에는 펠릭스가 수송선 바닥에서 끈질기게 긁어모아다 준, 미량의 반짝이는 '적유 마석가루' 포대 포장재 잔해가 들어 있었다. 불빛을 받을 때마다 붉은빛으로 타오르듯 반짝이는 고운 가루였다.
그녀는 유리병을 레온하르트의 눈앞에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이 밀수하던 적유 마석의 잔해입니다. 가주님께서 제 빵집을 의심하시며 탁자 위에 엄포용으로 올려두셨던 '은색 미세 마력 측정기'를 기억하십니까?"
르네는 탁자 한편에 고요히 놓여 있던, 은백색 광택을 내뿜는 정밀 측정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레온하르트가 빵집의 위생과 마약 성분을 검사하겠다며 가져다 놓았던 가문 전용의 최고급 마력 측정기였다.
"하급 사법관 옵스가 들고 왔던 조잡한 측정기는 마석 가루의 오염 수치를 멋대로 조작할 수 있었지만, 가주님의 이 은색 측정기는 제국의 그 어떤 마법 장벽보다 확고하지요. 이 측정기에 이 붉은 가루를 올려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레온하르트의 턱끝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그는 르네의 손에서 유리병을 받아내어, 코르크 마개를 열고 미세한 붉은 가루 한 꼬집을 은색 미세 마력 측정기 위에 떨어뜨렸다.
징-.
맑고 예리한 금속성이 울려 퍼지며 측정기의 은빛 표면 위로 푸르스름한 마력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그 빛은 이내 붉게 물들더니, 복잡한 기하학적 문양과 함께 하나의 인장을 선명하게 그려냈다.
[바실리 상단 소유 등기 광산: 제3구역 적유 마석 고유 파동 일치율 99.8%]
"……바실리의 개인 광산이군."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분노보다도 더 차가운, 포식자의 살기가 방 안의 공기를 얼려버릴 듯이 퍼져나갔다.
"안개의 숲 남쪽 지하를 무단으로 채굴하고 있었던 거다. 그곳은 제국 법으로 엄격히 금지된 군사 접경 지역인데도 말이지."
"맞습니다. 그들은 저를 위생 불량이라는 누명을 씌워 쫓아내려 했습니다. 그래야 자신들의 은밀한 밀수 통로인 이 안개 숲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으니까요. 제 빵이 특별해서 약재 상권을 독점하려 한 것도 있지만, 진짜 목적은 제 영토를 빼앗아 마석 밀매 기지를 확장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르네는 마음속으로 '영혼의 가계부'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가계부의 투명한 장부 페이지 위에는 바실리 상단의 숨겨진 세금 미납액과 불법 유통 경로가 소수점 아래 자리까지 정밀한 무역 수치로 기록되어 있었다.
평생을 비즈니스적 손익계산서 뒤에 숨어 사람을 불신하며 살아온 그녀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계산기가 아주 훌륭한 무기가 되어주었다.
레온하르트는 르네가 제공한 문서의 수치들을 하나하나 대조해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제국의 그 어떤 정보부도 이토록 정밀하고 완벽한 밀수 장부를 단시간에 확보할 수는 없었을 터였다.
"놀랍군. 네가 일개 빵집 주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매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저는 장사꾼이니까요. 제 보금자리를 위협하는 유해 요소를 장부에서 지워버리는 것은 당연한 재고 관리입니다."
르네가 덤덤하게 대답하자, 레온하르트의 입가에 옅은 호선이 그려졌다. 그는 즉시 방 밖에 대기하고 있던 최측근 기사를 소환했다.
"이 서류와 마석 성분 분석표를 제국 황실 사법 평의회에 즉각 송달하라. 사자 가문의 인장과 연합 가주들의 연명 서한을 첨부해서."
"예, 가주님!"
기사가 서류를 받아들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것은 단순한 고발장이 아니었다.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맹수 가문인 사자 가문이 공식적으로 바실리 상단을 반역 및 탈세 혐의로 청구하는 사법적 단두대였다.
몇 시간 채 지나지 않아, 빵집 탁자 위에 놓인 마법 통신구에서 다급한 목소리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특보입니다! 제국 황실 사법 평의회가 바실리 상단의 수도 유통 법인에 대해 전면 압수 수색 영장을 발부했습니다!" - "황실 근위대가 바실리 상단의 본부를 상공에서 포위했습니다! 보관 중이던 불법 적유 마석 수천 상자가 압수되었다는 소식입니다!"
통신구 너머로 들려오는 혼란스러운 소음들은 르네에게 그 어떤 음악보다도 달콤하게 들렸다. 칼과 마법으로 피를 흘리는 대신, 정확한 세무 장부와 성분 분석표 한 장으로 제국 제일의 상단을 단숨에 붕괴시키는 완벽한 상업적 역공이었다.
"끄응……."
그때, 긴장감으로 팽팽하던 방 안의 공기를 단숨에 몽글몽글하게 녹여버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르네의 치맛자락 밑에서 솜사탕처럼 하얗고 보드라운 털뭉치가 꼬물거리며 기어 나왔다. 아기 사자 루루였다. 루루는 커다란 금빛 눈울음을 글썽이며 르네의 앞치마에 말랑말랑한 코를 킁킁 비벼댔다.
"우웅, 르네에……."
루루의 몸에서는 르네가 아침에 구워둔 달콤하고 고소한 구름 우유 식빵의 냄새가 포근하게 풍겼다. 르네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 인간을 불신하고 철저히 비즈니스적으로만 행동하려 애쓰는 그녀의 방어기제를, 이 작은 아기 맹수는 너무나 쉽게 무너뜨리곤 했다.
"루루, 잠시만요. 지금은 중요한 이야기를……."
르네가 조심스럽게 루루를 떼어놓으려 하자, 루루는 싫다는 듯이 르네의 하얀 손등 위로 자신의 핑크빛 젤리 발바닥을 턱 얹었다. 말랑말랑하고 따스한 촉감이 르네의 손등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루루는 제 삼촌인 레온하르트의 커다란 손을 향해 꼬리를 살랑거리더니, 그의 단단한 손등을 제 앞발로 꾹 눌러 르네의 손등 위로 겹쳐 버렸다.
"웅!"
루루가 만족스러운 듯 양 볼을 부풀리며 갸릉 소리를 냈다.
순간, 르네의 작고 하얀 손등 위로 레온하르트의 하얀 가죽 장갑을 낀 거대하고 단단한 손이 완전히 포개졌다. 장갑 너머로도 느껴지는 그의 뜨거운 온기와 묵직한 마력이 르네의 손끝을 감싸 안았다.
르네는 숨을 들이켜며 손을 빼려 했지만, 레온하르트는 조카의 장난을 말리지 않은 채 가만히 르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에는 더 이상 날카로운 의심이나 경계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깊고 따스한 걱정과, 르네라는 존재를 향한 기묘한 신뢰만이 묻어날 뿐이었다.
"루루가 널 아주 좋아하는군."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낮고 부드럽게 울렸다.
"……아이들은 원래 달콤한 빵을 좋아하니까요."
르네는 일부러 시선을 피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귓가가 붉게 물드는 것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평생 홀로 추운 겨울을 버텨내며 보금자리를 갈망해 왔던 그녀의 차가운 마음 벽 틈새로, 루루의 핑크빛 젤리와 레온하르트의 묵직한 온기가 몽글몽글한 안개처럼 스며들고 있었다. 이 비즈니스 관계가, 어쩌면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가족'이라는 형태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낯선 설렘이 가슴을 두드렸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파지직!
탁자 위의 마법 통신구가 붉은 섬광을 내뿜으며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펠릭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찌르는 듯이 흘러나왔다.
- "르네! 가주님! 큰일났습니다! 바실리 상단 소유의 국경 도매 지부 17곳이 일제히 압수 수색에 들어가면서 유역 차단령은 깨졌는데…… 바실리가 미쳤습니다!"
"무슨 일이지?"
레온하르트가 즉시 르네의 손을 놓고 통신구를 향해 차갑게 물었다.
- "바실리 녀석, 전 재산과 상권이 몰수당하게 생기자 도망칠 구멍이 없어졌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황실 기사단이 도착하기 전에 르네의 빵집을 지도에서 통째로 지워버리려고 합니다! 자신이 고용할 수 있는 최고급 암흑 마법 용병단을 안개 숲으로 밀파했습니다!"
바실리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자신의 파멸이 확실해지자, 르네의 제빵 비법이라도 강탈하고 안개 숲 일대를 맹화로 쓸어버려 증거를 인멸하겠다는 광기 어린 음모였다.
우우웅-.
그 순간, 빵집 외부를 감싸고 있던 안개의 장막이 붉은 마력에 잠식당하며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안개 숲을 지켜주던 자연의 방벽이 바실리 사병들의 사악한 화염 마법에 의해 서서히 타들어 가며 걷히고 있었다.
창밖으로 짙은 붉은색 마법진들이 숲의 경계선 너머에 촘촘히 늘어서는 것이 보였다. 수십 명의 용병들이 거대한 화염 마법 화살을 정렬한 채 빵집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루루를 데리고 뒤로 물러서라."
레온하르트가 검 자루를 꽉 쥐며 르네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의 등 뒤로 거대한 사자의 마력 환영이 위압적으로 피어올랐다.
하지만 용병들이 화염 마법의 주문을 완성해 빵집의 방벽을 부수기 위해 일제히 손을 뻗는 바로 그 찰나.
쿠구구구구-!
빵집의 굴뚝 끝에서, 이제껏 본 적 없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오색빛 마력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며 하늘을 향해 거대하게 솟구치기 시작했다. 안개 숲의 모든 습기를 빨아들이듯 회전하는 그 압도적인 마력의 기운에, 용병들의 화염 마법진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거칠게 어그러졌다.
레온하르트의 황금빛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마력은…… 대체 무엇이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찬란한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르네의 영혼의 가계부가 이 세상의 법을 초월한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빵집이 품고 있던 가장 따뜻하고 비밀스러운 온기의 방출이었다.
르네는 머리를 깨부수는 듯한 날카로운 두통에 비틀거리며 제 이마를 짚었다. 시야가 붉게 번지며, 귓가에서 가계부의 투명한 알림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 비상 방어 권능: '온기의 방벽(溫暖之壁)' 강제 기동. - 시스템 경고: 외부의 물리적·마법적 타격 전력 감지. 빵집 영토를 수호하기 위해 가계부의 비상 재고 마력을 방출합니다. - 대가 지불 필요: 르네 본인의 기억 중 '어린 시절, 누군가 건네준 작은 사탕 하나에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했던 가장 순수했던 기억'.
'기억을…… 또 가져간다고?'
르네는 입술을 짓씹었다. 시큰한 콧날 사이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평생을 외톨이로 자라온 그녀에게,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따뜻한 기억은 어둠 속의 촛불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마저 꺼지면 자신은 정말로 차가운 장부 기계가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제 치맛자락을 꼭 쥔 채 발을 동동 구르는 루루를 내려다보았다. 보드라운 하얀 털을 파르르 떨며 저를 지키겠다고 앞발을 뻗는 작은 아기 사자. 그리고 자신을 가로막고 선 레온하르트의 듬직하고 넓은 등.
이곳은 그녀가 처음으로 손에 넣은, 아무도 자신을 쫓아내지 않는 영원한 안식처였다. 이 보금자리를 잃는다면 소중한 기억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가져가."
르네가 마음속으로 낮게 읊조린 순간, 머릿속에서 달콤한 설탕 냄새와 함께 알록달록한 유리병에 가득 차 있던 별 모양 사탕의 기억이 연기처럼 사르르 녹아내려 사라졌다.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 버리는 고독감이 밀려왔지만, 그와 동시에 빵집의 굴뚝에서 뿜어져 나온 오색빛 마력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화아아아-!
은은한 버터 향과 고소한 단호박 수프의 내음이 섞인 몽글몽글한 마력의 장막이 빵집 주변을 거대한 돔 형태로 감싸 안았다.
"발포하라! 당장 저 빵집을 불태워라!"
안개 너머에서 용병 대장의 표독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수십 개의 붉은 화염 마법 화살이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빵집을 향해 빗발치듯 쏟아졌다.
콰아아앙! 쿠구궁!
하늘을 찢는 듯한 폭음이 연이어 터졌지만, 그 어떤 화염도 빵집의 몽글몽글한 온기 장막을 뚫지 못했다. 사나운 불꽃들은 장막에 닿자마자 마치 뜨거운 팬 위에 떨어진 버터처럼 사르르 녹아내리며 달콤한 카라멜 시럽 향을 내뿜는 연기로 변해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결계 마법이 아니잖아! 마법의 파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어떻게 화염구를 삼켜 버리는 거지?"
용병들은 난생처음 보는 기묘한 현상에 무기를 든 손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 찰나의 틈을 놓칠 레온하르트가 아니었다. 르네가 자신의 기억을 대가로 방어막을 펼쳤음을 직감한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잔혹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손등 위로 붉고 뜨거운 마력 핏줄이 요동치며, 전신(戰神)이라 불리는 사자 수인 가주의 진정한 힘이 해방되었다.
"감히 내 영지에서, 내 비호를 받는 자의 보금자리를 더럽히려 들다니."
레온하르트가 대검을 뽑아 들고 천천히 빵집 문을 열고 한 걸음 나아갔다. 그의 등 뒤로 피어오른 황금빛 사자의 환영이 대지를 뒤흔들 정도의 포효를 내질렀다.
크오오오오-!
"끄악! 사, 사자 가주의 마력이다!" "레온하르트 대공이 왜 변방의 빵집에 있는 거야!"
용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레온하르트가 허공을 향해 대검을 가볍게 내리긋자, 눈이 멀 것 같은 찬란한 황금빛 검기가 반월형을 그리며 숲을 쓸어내렸다.
콰과과광!
검기가 지나간 자리에 서 있던 용병들의 마법진이 일제히 과부하를 일으키며 처참하게 박살 났다. 무기를 쥐고 있던 손들이 마력 역류로 인해 새하얗게 질려버렸고, 용병들은 단 한 번의 합도 겨루지 못한 채 낙엽처럼 바닥을 굴렀다.
제국을 호령하는 전신의 압도적인 무력이 안개 숲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순간이었다.
르네는 문틀을 잡고 그 광경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가계부의 기적과 레온하르트의 무력이 결합한 완벽한 방어전이었다.
하지만 승리의 여운을 느낄 시간도 없이, 땅바닥이 기이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구구구구-.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발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불쾌하고 뜨거운 파동이 빵집의 바닥 틈새를 타고 전신으로 전해졌다.
"우웅! 우우우-!"
루루가 꼬리를 바짝 세우고 르네의 앞치마 자락을 입으로 물어당기며 경계의 울음소리를 냈다. 아기 사자의 본능이 거대한 재앙을 감지한 것이었다.
동시에 르네의 눈앞에 있는 가계부 화면이 전례 없는 붉은색 경고등을 깜빡이며 사정없이 점멸했다.
[!!!] 비상 재앙 경보 (Calamity Warning) - 분석 대상: 안개 숲 남쪽 지하 제3구역 적유 마석 광산. - 상태: 급격한 마력 연쇄 과부하 및 자폭 장치 가동 감지. - 원인: 도주로를 차단당한 바실리 상단이 증거 인멸 및 동귀어진을 위해 광산 내부의 마석 제어 장치를 고의로 폭파함. - 폭주 임계점 도달까지 남은 시간: 05:14. - 예측 피해: 안개 숲 일대 반경 5km 완전 소멸 및 르네의 베이커리 영구 증발.
"바실리…… 이 미친 장사꾼이 결국……."
르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바실리는 자신이 파멸할 것을 깨닫자, 자신을 밀고한 르네와 자신을 압박한 사자 가문의 기사단, 그리고 모든 범죄의 증거가 남은 이 안개 숲 자체를 마석 폭발로 날려버리려 하는 것이었다. 금지 품목인 적유 마석 광산이 통째로 폭발한다면, 그 위력은 고위 파괴 마법 수십 개를 동시에 터뜨리는 것과 맞먹을 터였다.
"가주님!"
르네가 다급하게 밖을 향해 소리쳤다. 레온하르트가 용병들의 잔당을 처단하려다 말고 즉시 고개를 돌려 르네에게로 도약했다. 순식간에 르네의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무슨 일이지? 몸에 이상이 생긴 건가?"
"그게 아닙니다! 바실리가…… 광산을 폭파하려 합니다! 지하에 묻힌 적유 마석들이 연쇄 폭발을 일으키기 시작했어요. 이대로 두면 5분 뒤에 이 숲 전체가 날아갑니다!"
레온하르트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 역시 대지의 진동 속에서 심상치 않은 마력의 결을 느끼고 있었다.
"광산의 제어 장치를 멈춰야 한다. 하지만 자폭 장치라면 가문의 마법사들이 와도 5분 안에 해제하는 것은 불가능해."
"방법이 있습니다."
르네는 가계부의 반투명 장부 페이지를 거칠게 넘겼다. 장부의 하단에 숨겨진 특수 레시피가 붉은 빛을 내며 활성화되어 있었다.
[!] 히든 퀘스트: '대지의 불순물 정화' - 정화 맞춤형 레시피: '단호박 라벤더 타르트'의 얼어붙은 냉기 마력 주입 필요. - 재료 재고: 단호박 1개, 라벤더 줄기 3개, 빙설 마석 가루 10g (재고 보유 중) - 제약 조건: 폭발 중심부(광산 심장부)에서 직접 레시피를 기동하여 마석의 열기를 급속 냉각시켜야 함.
"저를 광산 중심부로 데려가 주세요. 가계부의…… 제 비법으로 마석의 폭주를 강제로 얼려버릴 수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르네의 말에 레온하르트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의 단단한 팔이 르네의 허리와 허벅지를 단단히 지탱했다. 품에 안긴 르네의 몸이 가볍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그 어떤 전사보다도 완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루루는 기사들에게 맡긴다. 르네, 꽉 잡아라."
"웅! 르네에!"
루루가 가지 말라는 듯 앞발을 뻗었지만, 레온하르트는 즉시 신형 비행 마법 마석을 기동하며 가파른 절벽 아래, 붉은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광산 입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슈우우웅-!
바람을 가르는 매서운 속도 속에서, 르네는 레온하르트의 품에 안긴 채 붉게 타오르는 광산의 심장부를 응시했다.
그때였다.
쿠구구궁-!
광산 입구에서 거대한 불꽃과 함께 1차 폭발의 잔해가 뿜어져 나오며, 땅바닥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무너져 내리는 바위틈 사이로 시뻘건 적유 마석의 마력 줄기가 용암처럼 솟구쳐 오르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그들의 눈앞을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