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스르륵. 손끝에 감기는 스코어북의 감촉이 유난히 까칠하다.

샌프란시스코의 가을바람이 미닛메이드 파크의 열기 속으로 차갑게 스며든다. 9회말 2사 주자 1, 3루. 전광판에 새겨진 스코어는 5대 4. 단 1점 차의 리드. 아웃카운트는 단 하나.

마운드 위에는 우리 팀의 수호신이자, 이번 포스트시즌 동안 11과 3분의 2이닝을 소화하며 평균자책점 0.77을 기록 중인 마무리 투수 '카터'가 서 있다.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마운드의 흙바닥을 적신다. 오늘 투구 수 24구. 그의 포심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평소의 99.2마일에서 97.4마일까지 떨어져 있다. 악력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증거다.

타석에 들어선 것은 상대 팀의 4번 타자, 시즌 42홈런의 괴수 '바스케스'.

컴퓨터 화면 속에서 수천 번은 더 돌려보았던 그의 데이터가 당신의 머릿속에서 홀로그램처럼 펼쳐진다. 바스케스는 올 시즌 우투수 슬라이더 상대 타율 .318, 장타율 .645를 기록했다. 횡으로 휘어지는 변화구는 그에게 그저 먹잇감일 뿐이다. 하지만 그의 유일한 아킬레스건. 몸쪽 하이 패스트볼, 시속 98마일 이상의 고속 직구에 대한 헛스윙 비율은 무려 42.7%에 달한다.

당신은 덕아웃 난간을 꽉 움켜쥔다. 땀으로 젖은 손바닥이 미끄러진다.

회귀 전, 만년 유망주로 어깨가 부서지도록 던지다 버려졌던 당신의 쓸쓸한 뒷모습이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지금의 당신은 패배자가 아니다. 세계 최고의 무대, 메이저리그를 뒤흔드는 가장 젊고 영리한 사령탑이다.

당신은 포수에게 사인을 보낸다. 몸쪽 하이 패스트볼.

바스케스의 배트가 감당할 수 없는 가장 뜨겁고 잔인한 궤적. 카터가 심호흡을 하며 모자챙을 매만진다. 포수가 바짝 몸을 일으키며 미트를 타자의 가슴팍 안쪽 높스름한 곳에 갖다 댄다. 관중석의 4만여 명의 관중들이 일제히 숨을 죽인다. 데시벨 측정기가 터져 나갈 것 같던 경기장이 순식간에 진공상태로 변한다.

카터의 축발이 마운드를 강하게 박찼다. 흙먼지가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그의 손끝에서 떠난 하얀 실밥의 구체가 공기를 찢으며 날아간다.

*쉬이익!*

우람한 궤적. 98.7마일. 카터가 쥐어짜 낸 영혼의 마지막 한 구가 바스케스의 몸쪽 깊숙한 골짜기로 파고든다. 바스케스의 거대한 상체가 회전한다. 배트가 허공을 가르는 파동이 덕아웃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펵!*

포수의 미트 한가운데에 공이 박히는 날카롭고 명쾌한 파열음. 삼진. 경기 종료.

"스트라이크 아웃!"

주심의 오른팔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밤하늘이 폭발하듯 수만 개의 꽃가루로 뒤덮인다.

"와아아아아!"

덕아웃에 있던 선수들이 미친 듯이 마운드로 뛰어나간다. 카터는 글러브를 하늘 높이 던져 올렸고, 포수는 마운드 위로 슬라이딩하며 그를 껴안는다. 100패를 밥 먹듯 하던 메이저리그 최하위 단골 구단이, 당신이 설계한 정밀한 데이터와 철저한 비즈니스 전술 아래에서 마침내 세계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서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감독님! 우리가 해냈습니다!"

수석코치가 당신의 어깨를 붙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당신은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모자를 벗어 관중석을 향해 들어 올린다. 야유와 불신으로 가득했던 경기장은 이제 당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거대한 함성의 도가니가 되었다.

클럽하우스는 순식간에 차가운 샴페인 거품과 뜨거운 함성으로 가득 찬다. 구단주는 당신에게 다가와 다년 연장 계약서와 메이저리그 감독 역사상 최고 액수의 연봉 보장 조항이 적힌 문서를 내밀며 호탕하게 웃는다.

미래를 읽는 혁신적인 데이터 야구, 그리고 선수들의 육체적 한계를 송곳처럼 파고든 대담한 지략. 만년 유망주였던 회귀자는 이제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완벽한 '컴퓨터 명장'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야구의 전당 가장 높은 곳에 영원히 조각해 넣는다. 우승 트로피의 은빛 표면에 당신의 당당한 얼굴이 비친다. 전설의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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