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동 경로 수정 불가. 압력 한계점 도달까지 잔여 시간 4분 12초."

태오의 망막 디스플레이(HUD) 위에 붉은색 경고 박스가 점멸했다. 궤적을 그리며 솟구치는 그래프의 종착지는 명확했다. 180bar. 아틀라스 원자로의 2차 냉각 가스 배관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찢어발겨지는 임계점이었다. 한시윤의 목소리가 에덴 전체를 짓누르던 하울링의 잔향은 이미 귓가를 떠났으나, 그가 남긴 기계적 교착 상태는 실시간으로 배관을 조여 오고 있었다.

"안 돌아가요! 모터 기어가 완전히 잠겼어!"

세아가 주철제 밸브 휠에 매달린 채 소리를 질렀다. 가죽 장갑을 낀 그녀의 두 손이 미끄러지며 금속 림을 긁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통로에 퍼졌다. 밸브 축을 고정하는 황동 하우징 표면은 이미 고열로 인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표면 온도 84.7도. 접촉 시 2도 화상을 유발하는 열기였다.

태오는 왼쪽 관자놀이를 강하게 압박했다.

두통이 두개골 내부를 송곳으로 찌르듯 파고들었다. 12번의 루프를 거치며 영구적으로 소실된 뇌 신경망 39.6%의 공백이 시각적 노이즈로 환원되어 나타났다. 간헐적으로 망막을 가로지르는 청색 스펙트럼 라인. 맥박수는 분당 118회까지 치솟았다.

태오는 전두엽에 이식된 루프 동기화 칩의 신경 인터페이스를 활성화했다.

'이브. 메인 시스템 우회 경로 탐색. 하부 제어망 바이패스 승인 프로토콜 구동.'

[경고. 대상 노드의 제어 알고리즘에 고속 암호화 쐐기(Crypto-wedge)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시야 한구석에 이브의 건조한 시스템 폰트가 떠올랐다.

[해당 암호화 블록은 256비트 타원곡선 암호(ECC) 체계를 기반으로 하며, 매 0.001초마다 의사난수 생성기(PRNG)를 통해 비대칭 키를 재구성합니다. 현재 가용 전력 내에서 완전 해독에 소요되는 연산 시간은 14시간 22분입니다. 물리적 제어권 획득이 불가능합니다.]

"한시윤."

태오의 입술 사이로 차가운 숨결이 새어 나왔다.

디지털 해킹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하드웨어 입출력 포트 레벨에서 게이트를 잠가버린 것이다. 물리 밸브의 제어 모터에 전력을 공급하는 솔레노이드 필드가 암호화된 전기 신호에 의해서만 구동되도록 설계된 상태였다. 전자적 접촉은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태오 씨, 방법이 없어요! 배관 내부 압력 158bar 돌파! 펌프실 메인 제어반을 거치지 않으면 수동으로도 이 밸브를 강제로 열 방법이……!"

세아가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터빈 정비공으로 뼈가 굵은 그녀였지만, 디지털로 잠겨버린 아날로그 밸브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어 있었고, 거칠게 요동치는 그녀의 가슴팍 위로 낯익은 금속제 물건이 흔들렸다.

째깍. 째깍. 째깍.

고주파의 소음과 진동 속에서도 기묘할 정도로 정교하게 고막을 파고드는 기계적 구동음이 있었다. 세아의 손목에 묶인 구형 태엽식 손목시계였다. 주위의 모든 최첨단 디지털 인프라가 먹통이 된 순간에도, 황동 기어들의 맞물림으로만 움직이는 그 아날로그 장치는 일정한 주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태오의 시선이 그녀의 손목에 머물렀다.

"그 시계."

태오의 건조한 목소리에 세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 비친 태오의 눈빛은 여전히 유리알처럼 차가웠으나, 그 깊은 곳에는 정교한 수식의 톱니바퀴가 돌아가고 있었다.

"이거요……?"

세아가 자신의 왼쪽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노후화된 유리 덮개 너머로 플레이트가 마모되어 은색 속살을 드러낸 기어들이 보였다.

"동생 민우가…… 에덴 정부 기술원에서 정비사 자격증을 따던 날 준 선물이에요. 구역 내 폐기물 처리장에서 굴러다니던 100년 전 부품들을 모아서 직접 조립해 준 거예요. '누나, 에덴의 모든 시스템이 정전되어 멈춰도 이 시계는 멈추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절대 길 잃지 마'라면서."

세아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하지만 이 시계, 고장 났어요. 배율 기어가 너무 낡아서 기어 이빨 마모 때문에 기계적 지연이 발생하거든요. 실시간 표준시보다 항상 정확히 2초가 늦게 맞물려 돌아요. 기어 축이 회전할 때마다 미세하게 헛돌아서 생기는 오차예요. 버려야 하는데…… 버릴 수가 없어서 그냥 차고 다녔어요."

항상 2초가 늦는다.

태오의 머릿속에서 전두엽 칩의 논리 연산 장치가 폭발적인 속도로 연산을 개시했다.

시각 피드백 노이즈가 한순간 걷히며 아틀라스 냉각 계통의 전체 설계도가 입체 홀로그램처럼 뇌리에 재구성되었다. 누적 엔트로피 보존 법칙. 타임루프가 반복되어도 물체의 물리적 마모는 리셋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틀라스 원자로의 수동 바이패스 라인에 설치된 모터식 피스톤 변위 밸브 역시 마찬가지여야 했다.

"이브."

태오가 마음속으로 명령을 하달했다.

"아틀라스 2차 냉각 라인 바이패스 피스톤 상단에 부착된 기계식 리미트 스위치의 마모 계수를 산출해."

[메모리 액세스 중…….]

이브의 응답 속도는 태오의 연산 속도를 채 따라오지 못했다. 신경망 손실의 대가로 얻은 동기화 칩의 연산력이 이브의 심층 아카이브 내부 디렉토리를 해킹해 들어갔다.

'프로젝트 E-13' 메모리 포화 임계 오버클록 프로토콜.

그 경고 메타파일의 깊숙한 곳에서 태오는 마침내 원하는 수치를 끌어냈다.

[조회 완료. 13회차 루프 누적 운전 시간 312시간 기준, 바이패스 피스톤 변위 크랭크 축의 기어 마모율 14.8%. 물리적 마찰로 인한 기계식 제어 신호 전달 지연 시간 2.03초.]

"찾았다."

태오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한시윤은 완벽한 디지털 알고리즘으로 시스템을 영구 봉쇄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계산하지 못한 물리적 변수가 존재했다. 바로 이 에덴을 구성하는 물리적 실체들의 '마모'였다. 디지털 신호는 실시간으로 흐르지만, 마모된 금속 기어들이 실제로 맞물려 피스톤을 밀어내는 물리적 반응 속도에는 필연적인 '지연'이 발생한다.

그 오차 수치는 정확히 2.03초.

"민세아, 스패너와 크랭크 바를 줘."

태오가 손을 내밀었다. 세아는 영문을 모른 채 허리춤의 공구 주머니에서 45센티미터 길이의 크롬-바나듐 합금제 크랭크 바를 꺼내 태오의 손에 쥐여주었다. 묵직하고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손바닥을 통해 상완이두근으로 전달되었다.

"지금 뭘 하려는 건데요? 디지털 락이 걸린 밸브는 사람 힘으로 아무리 돌려도……."

"디지털 락은 밸브의 '회전축'을 잠근 거다."

태오는 밸브 하우징 하단, 피스톤 실린더가 노출된 기

태오는 밸브 하우징 하단, 피스톤 실린더가 노출된 기어 블록을 가리켰다.

"디지털 락은 서보모터의 회전축을 전자적으로 고정할 뿐이다. 하지만 모터의 회전력을 피스톤의 왕복 운동으로 변환하는 크랭크의 연결 핀에는 물리적 유격이 존재해."

태오는 손가락으로 피스톤 로드와 캠 샤프트가 맞물린 틈새를 정확히 짚었다. 황동 하우징의 고열이 가죽 장갑을 뚫고 손끝을 자극했다.

"13회차 동안 축적된 엔트로피는 이 금속 부품의 표면을 정확히 4.12밀리미터 깎아냈다. 고압 가스가 역류해 피스톤이 상사점(Top Dead Center)에 도달하는 순간, 전자식 락이 걸려 있어도 기어 사이의 마모된 유격 때문에 2.03초 동안 물리적 힘이 전달되지 않는 무부하 구간이 발생한다."

"그 비어 있는 2.03초 동안 크랭크 바를 지렛대로 삼아 피스톤을 강제로 밀어내면, 서보모터의 고정 기어를 우회해 바이패스 밸브를 개방할 수 있다."

세아의 호흡이 일순간 멈췄다. 그녀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초침이 미세하게 떨리며 째깍이는 소리가 기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 타이밍을 어떻게 잡아요? 100분의 1초만 어긋나도 고압 피스톤의 반발력 때문에 크랭크 바가 튕겨 나가면서 당신 팔뼈가 가루가 될 거라고요."

"네 시계가 지연되는 주기와 일치시켜."

태오의 망막 위로 이브의 경고가 다시 한번 명멸했다.

[주의. 외부 제어 오버클록 시도로 인해 전두엽 칩의 신호 왜곡율이 4.2% 증가합니다. 프로젝트 E-13의 메모리 관리 프로토콜이 비정상적으로 활성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태오는 경고창을 시선 밖으로 쓸어 넘겼다. 심장 박동수는 분당 126회. 관자놀이 부근의 미세혈관이 터져 안구 안쪽에 붉은 상이 맺히기 시작했다. 뇌세포의 소실이 가져다주는 물리적 대가였다.

"네 시계의 초침이 헛도는 순간, 기어의 마찰음이 미세하게 변해. 째깍 소리가 2초 동안 무음 상태로 지연될 때. 그때가 피스톤이 상사점에 걸리는 타이밍이다."

태오는 크랭크 바를 피스톤 로드의 틈새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치는 가혹한 마찰음이 통로를 가득 채웠다.

"수치를 불러."

태오가 낮게 명령했다. 세아는 손목시계를 눈앞에 바짝 붙였다. 그녀의 동공이 극도로 수축했다. 식은땀이 그녀의 턱끝을 타고 흘러내렸다.

"배관 압력 169bar……! 171……!"

세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초침 통과합니다! 5, 4, 3…… 지금!"

째깍― 하는 소리가 멈췄다. 시계 내부의 기어가 헛도는 특유의 서늘한 정적이 통로를 지배했다.

정확히 2.03초의 기계적 공백.

태오는 전력을 다해 크랭크 바를 아래로 내리눌렀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척추를 타고 극심한 저림이 퍼져 나갔다. 전두엽 칩이 신경 신호를 강제로 증폭시켜 근섬유의 한계를 끌어올린 결과였다.

꽈드득!

굳게 잠겨 있던 솔레노이드 밸브의 하우징 내부에서 금속 톱니가 강제로 문드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기계적 쐐기가 부러지며 피스톤 로드가 아래로 30밀리미터 하강했다.

슈우우우욱―!

기화된 냉각 가스가 바이패스 배관을 타고 쏟아지는 폭음이 통로를 가득 채웠다. 망막 디스플레이의 수치들이 급격히 꺾였다.

174bar. 150bar. 122bar. 85bar.

압력 게이지의 바늘이 적색 경고 구역에서 안전 구역으로 빠르게 정렬되었다. 배관의 열기를 식히는 차가운 가스의 유동음이 금속 벽 너머로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어냈다.

"성공…… 했어요."

세아가 크랭크 바를 붙잡은 채 바닥으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녀의 손바닥은 마찰열로 인해 가죽 장갑이 일부 녹아내려 있었다.

태오는 크랭크 바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금속 막대가 콘크리트 바닥을 뒹굴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의 오른손 끝이 통제 불능 상태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뇌 신경망의 국소적 과부하로 인한 일시적 마비 증상이었다.

그러나 안도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통로 벽면에 설치된 비상 감시 모니터가 거친 노이즈와 함께 강제로 켜졌다.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제5격납고의 실시간 CCTV 피드였다.

"저건……."

세아가 모니터를 가리키며 숨을 들이쉬었다.

화면 속에는 돔 정부의 고위 관료, 주현우가 서 있었다. 그의 방사능 차폐 수트 가슴팍에는 정부 최고위 권한을 상징하는 비상 탈출 개인 펜던트가 매달려 있었다. 주현우는 극도로 흥분한 표정으로 펜던트에 내장된 일회용 대칭 난수 설계 패스코드를 터치 패드에 입력하고 있었다. 그의 안구 홍채가 단말기의 바이오 스캐너에 밀착되자, 청색 레이저가 그의 망막을 훑었다.

[승인 완료. 최고 관리자 바이오 마스터키 동기화.]

"미친 짓을 하려는군."

태오의 음성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주현우가 탑승하려는 것은 에덴 정부가 극비리에 건조한 비상 탈출용 고속 셔틀이었다. 하지만 그 셔틀의 이온 엔진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순간 전력이 필요했다.

모니터 속에서 주현우가 차단 기어 레버를 강제로 내렸다.

쿠르릉!

화면 너머로 거대한 전기 스파크가 폭발하는 모습이 잡혔다. 주현우가 셔틀의 전력 충전을 위해 아틀라스 원자로와 연결된 보조 에너지 변전 케이블을 무단으로 차단하고, 자신의 셔틀 쪽으로 전력을 전량 우회시킨 것이다. 물리적으로 절단된 태양광 급전 케이블이 뱀처럼 요동치며 사방으로 고압 전류를 뿜어냈다.

[위험. 아틀라스 원자로 보조 변전 계통 물리적 절단 발생.]

이브의 경고음이 태오의 귓가를 직접 때렸다.

[냉각수 순환 펌프의 제어 전력이 94% 감소합니다. 급수 시스템 작동 중지. 냉각수 유입 유량이 제로(0)로 수렴합니다. 코어 온도 제어 불가.]

시야를 채운 시스템 온도가 다시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가스 배관이 아닌, 원자로 내부의 핵융합 코어 자체가 열적 폭주를 향해 가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태오는 떨리는 오른손을 쥐어짜듯 움켜잡았다. 주현우의 폭거로 인해, 냉각 계통을 수리하자마자 원자로의 심장이 멈추는 최악의 궤도에 진입했다. 코어를 재가동하고 급수를 재개할 유일한 방법은 주현우의 펜던트에 내장된 바이오 마스터키를 확보해 원자로 안전 모듈을 강제 리셋하는 것뿐이었다.

"오후 3시 정각."

태오가 벽에 걸린 모니터의 타임스탬프를 확인했다.

"제5격납고로 간다. 주현우의 마스터키를 회수한다."

그가 첫발을 내딛는 순간, 격실 천장의 비상 조명이 일제히 소등되며 통로 전체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겼다. 오직 원자로의 파멸을 예고하는 적색 경고등만이 주기적으로 그들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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