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폐부에 들어찬 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화약 연기와 매캐한 디젤 매연 대신, 자욱한 숯가마 냄새와 눅눅한 흙먼지 냄새가 콧속을 찔렀다. 비강을 타고 넘어오는 이질적인 감각에 한진우는 눈을 번쩍 떴다.

시야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낡은 서까래와 흙으로 바른 벽이 보였다. 군용 텐트도, 국방부 병기창의 콘크리트 천장도 아니었다.

"으윽……!"

머리를 쪼개는 듯한 두통과 함께 낯선 기억들이 뇌의 해마를 강제로 점령해 들어왔다.

왕선(王宣). 현종 즉위년, 강조의 정변으로 즉위한 황제의 먼 친척이자 사직의 변두리로 밀려난 몰락 종실. 그것이 이 육체의 이름이었다.

동시에 눈앞에 기이한 푸른색 반투명 격자선들이 펼쳐졌다. 망막 위에 직접 투사되는 듯한 정밀한 공학적 수치들의 나열이었다.

[시스템 동기화 완료: 공학 연산계(Engineering Calculation System) 기동] [사용자: 한진우 (고려 종실 왕선으로 동화율 100%)] [신체 상태: 영양 부족, 가벼운 저체온증] [심박수: 98 bpm (경고: 급격한 정보 유입으로 인한 과부하 주의)]

"이건……."

진우, 아니 왕선은 떨리는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거친 삼베옷의 촉감이 너무도 생생했다. 환각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육군 병기공학 장교로서 고속 탄도 계산과 합금 성분 분석을 수행하던 두뇌의 연산 능력이, 이 낯선 시대의 몸에 고스란히 이식되어 있었다.

머릿속에서 가공할 만한 정밀 도면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고로의 내부 구조, 흑색화약의 이상적인 배합 지오메트리, 수력 벨로즈의 기어비율까지. 손을 뻗어 방 한구석에 놓인 주석 잔을 바라보자, 즉각 주황색 분석 선이 잔을 훑었다.

[물질 분석: 주석 합금 잔] [조성: Sn 84.3%, Pb 14.2%, Cu 1.5%] [특이사항: 납(Pb) 함량이 기준치 초과. 장기 사용 시 중독 위험.]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찍혀 나오는 정밀한 장비 데이터. 그것은 단순한 가상이 아니었다. 왕선은 마른침을 삼키며 방바닥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매서운 북풍이 뺨을 때렸다.

지금은 서기 1010년 10월.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병기 공학자라 할지라도, 이 시기의 고려가 처한 운명만큼은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 단 한 달 뒤인 11월, 요나라의 성종 야율융서가 2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널 터였다. 강조의 정변을 구실 삼아 고려의 산하를 피로 물들일 제2차 여요전쟁의 서막이었다.

마당 한편에 쌓인 조잡한 철제 농기구들을 바라보았다.

[물질 분석: 고려제 괭이 날] [조성: Fe 98.2%, C 0.08%, S 0.12%, P 0.15%] [조직 상태: 조대화된 페라이트, 다량의 비금속 개재물 포함] [경도: HB 95 (극도의 취성 및 저강도)]

"연철(軟鐵)이군."

왕선의 미간이 좁혀졌다. 탄소 조절이 전혀 되지 않아 물러터진 쇠붙이였다. 강철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의 저질 선철과 연철이 고려 무기의 실상이었다. 이딴 무기로 거란의 정예 철기병이 걸친 고탄소 주조 찰갑을 상대하겠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거란의 찰갑은 탄소 함량이 정밀하게 조절된 침탄강(Carburized Steel)을 사용한다. 반면 고려의 평범한 보병들이 쥐는 칼은 한 번 휘두르면 휘어지고, 방패에 부딪히면 깨어지는 똥쇠였다.

'3%.'

왕선의 머릿속 공학 연산계가 현재 고려의 무장 상태로 거란 대군과 맞붙었을 때의 생존율을 두들겼다. 소수점 이하의 확률은 의미가 없었다. 전멸, 혹은 굴욕적인 항복뿐이었다.

살아남아야 했다. 고려를 외세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강철의 주권 제국으로 재창조하지 않는 한, 자신 역시 이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줌의 재로 사라질 터였다.

그때, 마당 사립문이 거칠게 열리며 급박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선 공(宣 公)!"

푸른 비단 치마를 여미며 다급하게 뛰어 들어온 여인은 안변 한씨 가문의 여식, 한이린이었다. 몰락해 가는 종실인 왕선과 정혼한 사이였으나, 그녀의 눈빛에는 사대부 가문 규수 특유의 유약함 대신 번뜩이는 영민함이 깃들어 있었다.

"인사는 생략하지요. 상황이 급박합니다."

한이린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왕선의 앞까지 다가왔다.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왕선은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쓸데없는 수식어보다는 효율적인 정보 전달이 먼저였다.

"말해라. 소요 제기 요령에 맞춰 핵심만."

"……예?"

왕선의 뜻밖의 딱딱하고 이성적인 어조에 한이린이 순간 멈칫했으나, 이내 사태의 심각성을 떠올리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조정의 중추원 부사 채충순이 움직였습니다. 선 공께서 가문의 생계를 위해 관리해 오던 서경 인근의 사철산(沙鐵山)을 황실 자산으로 귀속하라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미 표결이 끝나, 중추원의 관리들이 이곳으로 압류 영장을 들고 오고 있습니다!"

왕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철산. 서경 외곽에 위치한 그 작은 광산은 왕선이 이 고려 땅에서 기술 변혁을 시작하기 위해 점찍어 둔 유일한 자원 거점이었다. 철 성분이 풍부한 모래를 채취할 수 있는 그곳이 없다면, 고순도 강철을 생산할 시작점 자체가 사라지는 셈이었다.

"채충순이라……."

문벌 귀족의 우두머리이자 가문의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보수주의자. 그가 종실의 미미한 재산에 손을 뻗은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종실의 힘을 빼놓고, 자신들의 철 독점권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계산이었다.

"그들이 명분으로 삼은 법 조항은 무엇인가?"

"종실은 사사로이 무기의 원료가 되는 광물을 채굴하거나 소유할 수 없다는 국초의 금령(禁令)을 들이밀었습니다. 이미 관리들이 광산 입구에 들이닥쳐 사철을 압수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가문의 모든 기반이 통째로 날아갑니다!"

한이린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왕선의 뇌세포는 오히려 차갑게 식어 내렸다. 공학 연산계가 채충순의 공세를 수식으로 분해하기 시작했다.

'법적 명분론과 이권의 충돌. 적들은 내가 종실이라는 신분에 묶여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군.'

"가자."

왕선이 짧게 뱉었다.

"예? 어디로 말입니까?"

"사철산으로. 내 재산을 함부로 손대려는 도둑놈들의 손가락을 분질러 놓아야겠으니."

* * *

서경 외곽, 검붉은 하천이 흐르는 사철산 초입.

채충순이 보낸 중추원의 하급 관리, 김우선은 거만한 자세로 가마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그의 뒤에는 가죽 갑옷을 걸친 사병 삼십여 명이 삼엄하게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이곳의 사철은 모두 국고로 환수한다! 종실의 몸으로 사사로이 쇠붙이를 탐하는 것은 모반의 싹을 틔우는 것과 다름없으니, 즉시 채굴 장비를 반납하고 물러서거라!"

김우선의 째지는 목소리가 계곡에 울려 퍼졌다. 인부들이 억울한 표정으로 캐놓은 사철 자루를 내려놓고 있었다.

"멈춰라."

낮지만 묵직한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고 들어왔다. 인부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낡았으나 기품을 잃지 않은 청색 도포를 입은 왕선이 한이린을 대동하고 걸어오고 있었다.

김우선은 왕선을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오호, 선 공이 아니십니까? 뒤늦게 오셔 봐야 조정의 결정을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이 사철산은 이제 중추원의 관리하에 들어갑니다."

"중추원의 관리하에 들어간다고?"

왕선은 김우선의 앞까지 걸어가 멈춰 섰다. 예법에 따른 인사 따위는 건너뛴 지 오래였다. 그의 차가운 눈빛에 김우선은 순간 움찔했다. 평소의 기죽어 지내던 몰락 종실의 눈빛이 아니었다.

"김 주서(主書). 네 놈이 들고 있는 압류 영장의 명분이 무엇이냐."

"어찌 무엄하게 반말을……! 흠, 명분이라 하셨습니까? 당연히 국초의 종실 무기 원료 사유 금지령입니다! 이 산에서 나는 사철은 군기시(軍器寺)에서 무기를 만들 원료로 쓰일 것이니, 종실은 손을 떼라는 말입니다."

"무기를 만들 원료라."

왕선은 발밑에 쏟아진 검은 모래, 사철 한 줌을 쥐어 올렸다.

스스스슥.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순간, 그의 망막 위에 푸른색 연산 그래프가 폭발적으로 그려졌다.

[물질 분석: 사철산 제3구역 표층 사철] [조성: Fe3O4(자철석) 32.1%, SiO2(이산화규소) 45.8%, TiO2(이산화티타늄) 4.2%, S(황) 0.02%, P(인) 0.03%] [특이사항: 고농도의 티타늄 및 규소 함유. 일반적인 저온 환원법(토법 제철) 적용 시, 용융 온도 미달로 슬래그 분리 불가. 고온 용융 시 점도가 극도로 높아져 선철 회수율 5% 미만.]

왕선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공학적 결론은 명확했다. 이 사철은 현재 고려의 원시적인 점토 가마 기술(토법)로는 절대로 제대로 된 철을 뽑아낼 수 없는 '쓰레기 광석'이었다. 오직 고로의 온도를 1500도 이상으로 올리고 석회석을 첨가해 슬래그를 강제로 분리하는 현대적 '산성 슬래그 제어법'이 있어야만 가치를 가지는 자원이었다.

즉, 지금의 고려 군기시에 이 사철을 가져다줘 봐야, 가마만 망가뜨리고 매연만 뿜어내는 돌덩어리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채충순 일파는 이 사실을 알고, 왕선의 광산을 무가치한 '폐광'으로 위장해 헐값에 압류한 뒤, 나중에 사적으로 이권을 챙기려 한 것이 분명했다.

"김 주서."

왕선이 사철을 바닥에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이 사철의 탄소 분량과 불순물 함량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서 가져가겠다는 거냐?"

"……예? 탄…… 소? 불순물?"

김우선의 얼굴이 멍해졌다. 난생처음 듣는 기괴한 단어였다.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철은 그저 녹이면 쇠가 되는 것이지, 무슨 해괴한 소리를……!"

"모르면 입을 닥치고 들어라."

왕선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운에 김우선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사철은 자철석 성분이 삼 할을 겨우 넘고, 이산화규소가 절반에 달한다. 게다가 이산화티타늄이 무려 사푼(4%)이나 섞여 있지. 이 뜻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 그것이 무슨……."

"현재 군기시의 야철 장인들이 쓰는 황토 가마의 온도로는 이 사철을 아무리 구워봐야 끈적끈적한 똥물만 나올 뿐, 쓸 만한 선철은 단 한 근도 건질 수 없다는 뜻이다. 인과 황의 함량도 높아, 억지로 두드려 무기를 만들면 칼날이 추위에 두부처럼 깨져 나갈 것이다."

왕선은 김우선의 품에 꽂혀 있는 채굴 보고서를 낚아챘다. 깜짝 놀란 김우선이 손을 뻗었지만, 왕선의 눈은 이미 보고서의 수치들을 스캔하고 있었다.

"여기에 적힌 '상등품 사철'이라는 기록은 조작되었군. 군기시의 야철 감관에게 뇌물을 먹이고 가짜 보고서를 쓰게 만들었겠지. 쓸모없는 광산을 국가 영토로 귀속시킨다는 명분을 세운 뒤, 실제로는 채충순 대감의 사가(私家) 야철소로 빼돌려 사리사욕을 채우려 한 것 아닌가?"

"이, 이 무슨 망발을! 증거가 있습니까!"

김우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된 이권 찬탈 음모를, 한낱 몰락 종실이 단 한 줌의 모래를 만져보고서 꿰뚫어 보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 까닭이었다.

"증거?"

왕선은 차갑게 웃었다.

"여기 있는 사철 한 자루와 군기시의 야철로를 가져와라. 내가 말한 성분 그대로 똥물만 흘러나오는지, 아니면 쓸 만한 무기 원료가 나오는지 조정 대신들 앞에서 직접 실험해 주마. 만약 내 말이 맞다면, 중추원은 국가 무기 제조 시설을 기만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려 한 죄로 탄핵을 면치 못할 것이다. 감당할 수 있겠느냐?"

"으, 으윽……."

김우선은 이마에 식은땀을 흘렸다.

왕선의 눈빛은 광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지극히 이성적이고, 명확한 수치에 기반한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만약 실제로 조정에서 야철 실험을 하게 된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배후에 있는 채충순까지 곤경에 처할 터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한이린의 눈에 경이로운 빛이 감돌았다.

'이분이 언제부터 이런 치밀한 야철 지식을 가지고 계셨단 말인가?'

그녀가 아는 왕선은 그저 책이나 읽던 유약한 종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상대를 수치와 논리로 완벽하게 포위해 숨통을 조여 가는 가혹한 포식자의 모습이었다.

"어찌할 테냐, 김 주서. 계속 압류를 고집하여 중추원의 목을 단두대에 올리겠느냐, 아니면 지금 당장 쥐새끼처럼 물러가겠느냐?"

왕선의 압박에 김우선이 입술을 바르르 떨며 뒤로 물러서려던 그 순간이었다.

두구두구두구구!

계곡 지형을 뒤흔드는 거친 말발굽 소리가 사방을 메웠다.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수십 기의 중장기병을 이끌고 화려한 가죽 외투를 걸친 중년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매서운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 고려 조정의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실권자, 중추원 부사 채충순이었다.

"과연, 명색이 황실의 핏줄이라 그런지 주둥이만은 살아 있구나."

채충순이 말 위에서 왕선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읊조렸다. 그의 등장에 김우선과 사병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대감!"

채충순은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품 안에서 붉은 비단으로 감싼 조칙을 꺼내 들었다. 그의 눈빛에는 왕선의 정밀한 논리 따위는 힘으로 뭉개버리겠다는 오만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왕선은 듣거라. 네놈이 아무리 궤변을 늘어놓아 봐야, 법률은 법률이다."

채충순이 조칙을 펼치며 낭독했다.

"태조 대왕께서 세우신 국법 사조(私條)에 이르기를, '종실의 자손은 군기에 들어가는 어떠한 광물도 사사로이 소유하거나 채굴할 수 없으며, 이를 위반할 시 즉시 가산을 몰수하고 유배에 처한다' 하셨다. 이 사철산은 오늘부로 중추원이 직권 압류한다. 이에 저항하는 자는 역모로 다스릴 터이니, 당장 무릎을 꿇어라!"

철컥!

채충순의 명령과 동시에, 그의 사병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왕선과 한이린을 포위했다. 차가운 쇠붙이의 기운이 목덜미를 스쳤다.

[경고: 적대 세력 물리적 위협 감지] [심박수: 120 bpm] [공학 연산계 비상 기동: 주변 지형 및 대들보 구조 분석 중……]

서늘한 긴장감이 계곡을 지배하는 가운데, 왕선의 심장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

**[고려사(高麗史) 권 兵器志 요약]** 현종 원년(1010년) 10월, 중추원부사 채충순 등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종실 왕선이 사사로이 서경의 사철을 채굴하여 사리를 취하니 이는 국법에 어긋납니다" 하였다. 이에 관리를 보내어 이를 압수하려 하였으나, 왕선이 홀로 나아가 사철의 성질이 조악하여 군기에 쓸 수 없음을 논하니, 관리들이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채충순이 군사를 거느리고 친히 이르러 국법을 들어 압박하니, 양측의 대치함이 극에 달하였다. 이 사건이 훗날 고려 중공업의 시초가 된 '서경 야철 분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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