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빗줄기가 한강대교의 철골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백강현은 난간을 움켜쥐었다.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어 감각이 없었다. 빗물이 눈꺼풀을 타고 흘러내려 시야를 흐렸지만, 뇌리에 박힌 붉은색 글씨는 오히려 선명해졌다.
[의사면허 취소 통지서]
사유는 의료 과실로 인한 환자 사망.
김태섭 그 인간이 저지른 대동맥 박리 수술의 치명적인 실수를 뒤집어쓴 결과였다. 병원의 실세이자 흉부외과 과장인 김태섭의 손때 묻은 사냥개 노릇을 했던 대가는 비참했다. 침묵의 카르텔은 견고했고, 가장 약한 고리였던 펠로우 백강현은 가차 없이 잘려 나갔다.
"결국 이렇게 끝나는 건가."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흩어졌다.
과거 구하지 못했던 수많은 환자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돈이 없어서, 권력이 없어서, 혹은 혜화회의 정치적 역학 관계 때문에 수술대 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차갑게 식어갔던 이들. 그들을 살리지 못했다는 병적인 죄책감이 가슴을 송곳처럼 쑤셨다.
더는 버틸 힘이 없었다. 강현은 눈을 감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쿠르릉, 쾅!
하늘을 찢는 듯한 이중 뇌성이 고막을 강타했다. 온몸의 신경이 불타오르는 듯한 극심한 고열이 닥쳐왔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박동했다. 강현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암흑 속으로 추락했다.
***
"삐- 삐- 삐-"
규칙적인 기계음이 고막을 두드렸다.
코끝을 찌르는 맵싸한 락스 냄새와 소독약 기운. 살을 에는 듯한 한강의 칼바람 대신, 후끈한 온기와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온몸의 감각을 깨웠다.
강현은 번쩍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석고보드에 얼룩이 진 한국대학교병원 응급의료센터의 천장이다.
"어이, 백 선생! 넋 놓고 뭐 해? 저기 3번 베드 환자 아밀라아제 수치 확인했어?"
옆구리를 툭 치는 감각에 고개를 돌렸다. 흉부외과 3년차 전공의 한서희가 날카로운 눈매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차트를 쥔 그녀의 손가락이 가볍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밀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다.
강현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메스를 쥐느라 굳은살이 박였지만, 한강 다리 위에서 얼어붙어 가던 그 거칠고 늙은 손이 아니었다. 주름 없이 탱탱하고 활력이 넘치는 30대 초반의 손.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더듬었다.
[흉부외과 펠로우 백강현]
‘회귀했다.’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응급실의 공기, 소음, 그리고 귓가를 울리는 생생한 음성까지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시간은 정확히 3년 전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었던 그 끔찍한 연쇄 비극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의 시간대로.
그때, 강현의 시야 중앙에 기이한 반투명 스크린이 떠올랐다.
[생명의 장부 (Ledger of Life) 각성] - 소유자: 백강현 - 보유 신뢰도 자원: 0 Point (적자 상태) - 경고: 자원이 고갈된 상태에서 무리한 시스템 가동 시, 영구적인 생명력 감소 및 심장 과부하가 발생합니다.
"이게…… 뭐지?"
강현이 중얼거리는 순간, 가슴 한가운데가 불로 지지는 것처럼 찌릿하며 조여들었다.
윽,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심장 부근에서 붉은색 경고등이 깜빡이는 환각이 보였다. 마치 급성 협심증 환자가 느끼는 전형적인 흉통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이 장부라는 기이한 시스템은 제멋대로 작동하는 치트키가 아니었다. 자신의 목숨과 생명력을 담보로 움직이는 정밀한 경영 장부였다.
"백 선생? 어디 아파? 얼굴색이 왜 그래?"
한서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강현의 얼굴을 살폈다.
"아냐. 잠깐 체한 모양이다."
강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통증은 서서히 가라앉았지만, 묵직한 이물감은 여전히 심장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 신뢰도 자원을 채우지 못한다면 이 통증이 언제 자신을 덮칠지 모른다는 경고였다.
바로 그 순간, 응급실 자동문이 요란한 경보음과 함께 열렸다.
위이이이이잉-!
"119 구급차 들어옵니다! 20대 남성, 오토바이 교통사고! 다발성 장기 손상 의심, 혈압 저하 중!"
구급대원들이 스트레처 카를 거칠게 밀며 들어왔다. 카트 위에는 온몸이 피떡이 된 청년이 누워 있었다. 찢어진 가죽 재킷 사이로 뼈가 드러나 있었고, 구급대원이 백밸브마스크(Ambu bag)를 필사적으로 짜내며 산소를 공급하고 있었다.
강현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기억하고 있었다. 이 환자였다.
과거의 생에서, 자신이 끝내 살리지 못하고 수술대 위에서 차갑게 식혀야 했던 청년. 배달 일을 하던 스무 살의 고아였다. 당시 흉부외과 과장이던 김태섭은 VIP 환자의 예정된 수술방을 비워두어야 한다는 이유로 이 환자의 응급 수술을 고의로 지연시켰다. 결국 청년은 흉강 내 대량 출혈로 손도 쓰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 죽음은 강현에게 평생을 따라다니는 병적인 부채감이 되엇고, 자신을 파괴적인 완벽주의로 몰고 간 시발점이었다.
[환자: 이민우 (20세)] - 상태: 외상성 대동맥 파열 및 대량 혈흉 (Hemothorax) - 생명력 수치: 12.4% (하강 속도: 분당 -0.9%) - 생존 가망성: 극히 낮음 (수술 미집도 시 10분 이내 사망)
환자의 머리 위에 떠오른 붉은색 텍스트가 실시간으로 변하고 있었다. 생명력 수치가 소수점 단위로 뚝뚝 떨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선생님, 이 환자 어레스트(심정지) 오기 직전입니다! 서브클라비안(빗장밑정맥) 잡기도 힘들어요!"
연차 낮은 전공의가 당황해 비명을 질렀다. 환자의 목에 있는 정맥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긴장성 기흉 혹은 심낭압전이 동반된 징후였다.
"비켜봐."
강현이 환자의 곁으로 성큼 다가섰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전의 혼란스러움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차갑고 단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백 선생? 지금 뭐 하려는 거야? 이 환자,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잖아! 영상의학과에 CT부터 찍자고 해야지!"
한서희가 강현의 팔을 붙잡았다.
"CT 찍으러 가는 길에 테이블 데스야. 청진기 가져와."
강현은 서희의 손을 냉정하게 뿌리쳤다. 환자의 오른쪽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댔다. 호흡음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타진 시 둔탁한 음이 울렸다. 기흉이 아니라 피가 가득 차 있는 혈흉이었다.
"우측 흉강 내 대량 출혈. 튜브 삽입해서 감압부터 해야 해. 10Fr(프렌치) 체스트 튜브(Chest tube) 준비해."
"하지만 과장님 지시가……!"
"사람이 죽어가는데 과장 지시가 무슨 상관이야!"
강현의 서슬 퍼런 일갈에 전공의들이 흠칫 놀라 굳어졌다. 늘 온순하고 선배들의 눈치만 보던 펠로우 백강현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 위압감이었다.
강현은 망설임 없이 메스를 쥐었다. 환자의 우측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공간을 정확하게 짚었다. 주저 없는 칼끝이 피부를 가르고 들어가 늑막을 뚫었다.
피익-!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강현의 가운을 적셨다.
"석션! 빨리!"
튜브를 밀어 넣자, 배액 병으로 순식간에 1,000cc가 넘는 피가 쏟아져 나왔다. 환자의 혈압을 나타내는 모니터의 수치가 60/40mmHg에서 간신히 80/50mmHg선으로 버텼다.
[생명력 수치: 11.2% (하강 일시 정지)]
"간신히 숨통만 틔워놓은 거야. 근본적인 출혈지를 잡지 않으면 이 환자는 10분도 못 버텨. 수술방 열어."
강현이 수술 장갑을 벗어 던지며 명령했다.
"그 수술, 허락 못 하네."
낮고 걸걸한 목소리가 응급실 입구를 갈랐다.
흰 가운을 걸치고 금테 안경을 쓴 사내. 흉부외과 과장이자 이 병원의 실세인 김태섭이 거드름 피우는 걸음걸이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아첨하는 레지던트들이 줄줄이 비엔나처럼 엮여 있었다.
강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회귀 전,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고 삶을 송두리째 짓밟았던 원흉. 김태섭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살의가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과장님."
강현은 억지로 감정을 누르며 고개를 숙이는 시늉을 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힘이 없는 상태에서 섣부른 발톱을 드러내면 역풍을 맞는다. 철저히 힘을 기르고, 놈의 목줄을 한 번에 끊어놓을 패를 쥐어야 했다.
"백 선생, 자네 지금 미쳤나? 이 응급실이 자네 개인 클리닉이야? 왜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환자 몸에 칼을 대?"
김태섭이 배액 병에 가득 찬 피를 흘깃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대동맥 파열이 의심되는 환자입니다.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사망합니다."
"안 돼. 오늘 하이브리드 수술실은 비워둬야 하네. 혜화회 이사장님이 추천하신 VIP 환자가 곧 입원할 예정이야. 그분을 위한 예비 수술방이 필요해."
김태섭의 어조는 단호했다. 생명이 꺼져가는 스무 살 청년의 목숨보다, 권력자의 줄을 잡는 것이 그에게는 훨씬 가치 있는 일이었다.
"VIP 환자는 오후 입원 예정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전에 이 수술은 끝낼 수 있습니다."
강현이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대꾸했다.
김태섭의 눈썹이 꿈틀했다. 감히 일개 펠로우가 자신의 결정에 토를 다는 상황이 극도로 불쾌한 모양이었다.
"백 선생. 자네 펠로우 계약 연장이 코앞인 건 알고 있지? 병원의 방침에 따르지 않는 의사는 우리 흉부외과에 필요 없네. 당장 손 떼고 나가."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주변의 전공의들이 숨을 죽였다. 한서희마저 강현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병원 내에서 김태섭의 말은 곧 법이었고, 그의 눈 밖에 난 의사는 대한민국 어느 병원에서도 발을 붙일 수 없었다.
강현은 속으로 비소를 흘렸다.
'협박이라.'
과거의 자신이라면 이 비열한 으름장에 굴복해 눈물을 머금고 뒤돌아섰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환자의 죽음과 평생의 죄책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강현은 김태섭의 뒤편, 복도 너머에 있는 과장실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김태섭이 자랑하는 최고급 오크우드 개인 캐비닛이 있다. 회귀 전, 김태섭이 파멸할 때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 캐비닛 안쪽 이중 바닥에는 이 병원의 온갖 비리와 리베이트, 그리고 대리 수술 내역이 암호화되어 담긴 보안 태블릿이 숨겨져 있었다.
김태섭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아킬레스건이자, 훗날 놈의 목을 단숨에 벨 수 있는 단두대의 칼날.
'기다려라, 김태섭. 네가 가진 그 추악한 비밀들, 내가 전부 세상 밖으로 꺼내 줄 테니까.'
강현은 마음속으로 단단히 다짐하며 포석을 심었다.
"과장님, 만약 이 환자가 수술을 받지 못해 사망하고, 그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병원의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이 갈 겁니다. 특히 요즘 의료 사고와 방치에 대한 여론이 흉흉합니다."
"뭐라?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
"아닙니다. 병원을 걱정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가 모든 책임을 지고 수술하겠습니다. 사고가 나더라도 과장님께는 아무런 해가 가지 않도록 서약서를 쓰겠습니다."
강현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실려 있었다.
김태섭은 잠시 계산기를 두드리는 표정을 지었다. 하급 의사가 스스로 총대를 매고 책임을 지겠다니, 실패하더라도 꼬리를 자르기 쉬운 구도였다. 게다가 백강현의 눈빛이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완강했다. 여기서 더 고집을 부리다간 오히려 시끄러워질 수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좋아. 정 그렇다면 자네 뜻대로 해보게. 대신, 마취과 지원은 없네. 마취과 스태프들은 지금 VIP 환자 맞이 준비로 전부 차출되었으니까."
김태섭이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마취과 의사도 없이 펠로우 혼자 수술을 하겠다? 어디 한번 해보게나. 죽이든 살리든 자네 마음대로 해봐. 단, 환자가 테이블 데스하는 순간, 자네 의사 면허도 끝인 줄 알아."
김태섭은 겉으로는 기회를 주는 척하며, 사실상 강현을 사지로 밀어 넣었다. 어시스트도, 마취과 의사도 없는 수술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가자."
김태섭이 전공의들을 이끌고 응급실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것은 강현과 사색이 된 한서희, 그리고 산소마스크에 의지해 가쁜 숨을 몰아쉬는 환자뿐이었다.
"백 선생…… 미쳤어? 마취과도 없이 어떻게 대동맥 수술을 해? 이건 살인 행위야!"
한서희가 강현의 덜미를 잡고 소리쳤다.
"살릴 수 있어."
강현은 조용히 환자의 카트를 밀기 시작했다.
"서희야, 네가 마취기 조작법 알지? 인튜베이션(기단 삽관) 상태 유지하면서 마취 가스만 일정하게 유지해 줘. 활력 징후 모니터링만 제대로 해줘도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너 진짜 미쳤구나……."
서희는 머리를 감싸 쥐었지만, 이내 강현의 눈빛에 서린 압도적인 안광에 압도당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녀 역시 의사로서 환자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수술실의 무영등이 켜졌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스쳤다. 수술대 위에 누운 이민우의 생명력은 이제 8.1%까지 떨어져 있었다. 수치 옆의 하강 속도는 분당 -1.2%로 빨라지고 있었다. 당장 가슴을 열고 찢어진 대동맥을 봉합해야 했다. 하지만 어시스트도 없는 1인 수술에서 대동맥 박리 및 파열 수술을 성공시키는 것은 신의 영역이었다.
강현은 심호흡을 했다. 메스를 쥔 손끝에 땀이 배어 나왔다.
바로 그 순간.
눈앞의 [생명의 장부] 스크린이 이글거리는 붉은 빛을 토해내며 거대해졌다.
[경고: 환자의 생명력이 임계점에 도달했습니다.] [잠금 해제 조건 충족: 최초의 생명 구호 시도.] [기능 활성화: '초인적 기량 활성화(신의 손)' 기능이 가동 준비되었습니다.] - 소모 자원: 신뢰도 50 Point (현재 보유: 0 Point) - 자원 부족 시 대가: 급성 협심증 유발 및 영구적 생명력(수명) 1년 단축.
"수명을 깎아서라도 살린다."
강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스크린 속 활성화 버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슴을 찌르는 극심한 격통이 다시 한번 심장을 옥죄어 왔지만, 그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메스를 쥔 손 끝으로 기이할 정도의 정밀함과 속도가 벼려지는 감각이 스며들었다.
"시작한다."
강현의 메스가 청년의 차가운 가슴을 향해 거침없이 내리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