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쩍.

끈적한 액체가 뼈와 뼈 사이에서 짓겨지는 감각이 척수를 타고 뇌하수체를 직격한다. 무릎 연골이 파열되던 바로 그 순간의 고통이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극통 속에서 두 눈을 부릅뜬다.

하얗게 탈색된 병원 천장이 보여야 했다. 진통제 냄새와 의사의 가망 없다는 선고가 귓가를 맴돌아야 정상이다. 하지만 코끝을 찌르는 것은 지독하리만치 매캐한 탄내와 싸구려 왁스 기름 냄새다. 머리위로 쏟아지는 것은 차가운 형광등 불빛이 아닌, 서부 네바다의 살인적인 태양광을 머금은 체육관의 누런 조명등이다.

"흡……! 하아, 하아!"

바닥을 짚은 손바닥에 거친 나무의 질감이 만져진다. 라스베이거스의 열기가 통풍구를 타고 들어와 목덜미를 후끈하게 달군다.

강기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제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본능적으로 왼손바닥을 뻗어 왼쪽 무릎을 움켜쥔다. 흉터가 없다. 수차례의 메스 자국으로 누더기가 되었던 살결은 온데간데없고, 단단하고 탄력 있는 젊은 피부가 만져진다. 슬개골을 천천히 압박해 본다. 시큰거리는 통증도, 힘없이 덜컥거리던 관절의 유격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 무릎은 멀쩡하다.

"말도 안 돼."

기태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라스베이거스 콕스 파빌리온의 낡은 연습 코트다. 전광판에 박힌 붉은 숫자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다.

[2017. 06. 18]

2017년이다. 무릎 연골이 완전히 박살 나기 직전, 드래프트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서머리그 언드래프티 트라이아웃을 전전하던 가혹한 그해 여름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가슴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심장박동이 귓가에서 천둥처럼 울린다. 그 순간, 기태의 시야가 기괴하게 일그러진다.

우웅 하는 이음과 함께 허공에 붉은색 기하학적 선들이 그어지기 시작한다. 림과 백보드, 그리고 기태가 서 있는 지점 사이의 거리가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환산되어 허공에 둥둥 떠다닌다. 림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완벽한 반원형의 포물선이 핏빛 궤적으로 시각화된다.

눈을 깜빡여도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야 우측 하단에 정밀하게 디자인된 반투명한 스탯 창이 점멸하며 뇌리에 박힌다.

========================================= [초정밀 궤적 분석 시스템 v1.0] - 타깃: 라스베이거스 콕스 파빌리온 6번 림 (고도 3.05m) - 궤적 일치율: 100% (붉은 선 일치 시 무조건 성공) ----------------------------------------- [실시간 생체 장부] - 동맥 산소 포화도 (SpO2): 98.7% - 근육 내 젖산 농도: 1.1 mmol/L - 잔여 심장 세포 안전 수명: 100.00% =========================================

붉은 선을 따라 던지면 무조건 들어간다. 뇌가 직관적으로 그 법칙을 이해한다. 하지만 기태의 눈살이 순식간에 찌푸려진다. 우측 하단의 수치 중 '동맥 산소 포화도'와 '심장 세포 수명'이라는 글자가 경고음처럼 붉게 반짝였기 때문이다.

공짜가 아니다. 이 상태창을 유지하고 붉은 선의 궤적을 실시간으로 추적하는 매 초마다, 그의 생체 에너지가 실시간으로 깎여 나간다는 뜻이다. 과거 무릎을 잃고 코트를 떠나야 했던 비극이 떠오른다. 무한한 힘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기태는 이를 질근 깨물었다. 철저하게 계산하고, 남은 수명을 장부 정리하듯 쪼개 쓰지 않으면 코트 위에서 진짜로 죽을 수도 있는 저주받은 권능이다.

"언제까지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생각이지, 강?"

구두 굽 소리가 코트를 날카롭게 때리며 다가온다. 가죽 재킷을 단정하게 걸친 에밀리 정이 태블릿 PC를 옆구리에 낀 채 기태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녀의 눈빛은 비즈니스 파트너를 고르는 투자자의 그것처럼 시리도록 차갑다.

"방금 스카우트 리포트가 업데이트됐어. 네 이름 옆에는 빨간색 가위표가 쳐져 있지. 이번 미니 트라이아웃에서 눈도장을 못 찍으면 내일 아침 인천행 편도 티켓을 끊어야 할 거야. 내 수수료도 날아가고, 네 밑바닥 커리어도 여기서 끝이라는 소리지."

에밀리는 기태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덧붙인다. 위로나 격려 따위는 없다. 오직 확실한 상품 가치만을 원하는 냉혹한 비즈니스우먼의 다그침이다.

기태는 무릎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몸을 일으키는 와중에도 눈앞의 붉은 궤적은 집요하게 림을 가리키고 있다.

"비행기 표는 환불해 둬, 에밀리."

"말은 잘하는군. 하지만 저 괴물들 틈에서 네가 살아남을 확률은 통계적으로 3% 미만이야."

에밀리가 가리킨 코트 중앙에는 2미터가 훌쩍 넘는 거구들이 거친 숨을 내쉬며 몸을 부딪치고 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장신 흑인 가드가 기태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는다. G리그를 전전하며 피지컬 하나로 상대 가드들을 짓밟아 온 디안드레 윌리엄스다.

"어이, 동양인 꼬맹이! 거기서 멍청하게 서 있을 거면 비켜라. 여긴 애들 놀이터가 아니니까."

디안드레가 가죽 공을 바닥에 강하게 튕기며 도발한다. 그의 긴 팔과 탄탄한 어깨 근육이 기태의 시야를 가로막는다.

연습 경기가 재개된다. 코트 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끈적한 전쟁터로 변한다. 패스는 유기적이지 않다. 서머리그 로스터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모두가 이기적인 난사를 일삼는 아수라장. 기태에게 공이 돌아올 리 만무했다.

하지만 기태는 조급해하지 않는다. 동료들을 믿지 않는 것은 그의 오랜 강박이자 생존 방식이다. 기태는 철저히 자신만의 타이밍을 노린다.

탑 부근에서 공을 잡은 가드가 수비에 막히자 마지못해 외각에 서 있던 기태에게 공을 건넨다. 폭탄 돌리기나 다름없는 패스다.

공이 기태의 손바닥에 닿는 순간, 디안드레가 기다렸다는 듯 거대한 몸집을 앞세워 짓눌러 온다. 그의 긴 팔이 기태의 시야를 완전히 차단한다.

"던져 봐, 쥐새끼 같은 게."

디안드레의 콧김이 얼굴에 닿을 정도로 밀착한 수비. 평범한 가드라면 슛은커녕 패스 길조차 찾지 못하고 턴오버를 범했을 상황이다.

바로 그때, 기태의 뇌리가 번쩍인다.

[상태창 활성화]

시야 전체가 순식간에 암전되더니, 디안드레의 거구 주위로 붉은색 격자무늬가 덧씌워진다. 그의 고개가 아주 미세하게 오른쪽으로 기우는 찰나, 수비수의 시각 사각지대가 선명한 붉은색 터널로 개방된다.

림까지 이어지는 최적의 탄도 궤적이 허공을 가른다.

기태는 망설이지 않는다. 오른발로 지면을 강하게 밀어내며 뒤로 물러선다. 스텝백 3점슛.

"어딜!"

디안드레가 엄청난 탄력으로 공중을 날아오른다. 그의 거대한 손바닥이 기태의 머리 위를 덮친다. 코트 밖에서 지켜보던 에밀리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블록슛에 걸릴 것이라 확신한 순간이다.

하지만 기태는 이미 알고 있다. 디안드레의 손가락 끝은 기태가 그리는 붉은 선보다 정확히 4.2센티미터 아래를 지나치고 있다. 완벽한 사각지대다.

손끝을 떠난 농구공이 붉은 실선을 타고 허공을 비행한다. 회전하는 가죽의 결이 느리게 보일 정도로 기태의 집중력은 극한에 달해 있다.

서머리그 해설진 대기석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던 해설위원이 다급하게 소리친다.

- 아, 무리한 슛입니다! 디안드레의 타점이 워낙 높았는데요! 저걸 던지나요?

그러나 그 비명 같은 해설은 이내 경악으로 바뀐다.

촤아악-!

그물이 찢어질 듯 출렁이며 안쪽으로 빨려 들어간다. 림의 철조망조차 건드리지 않은 완벽한 클린 3점슛이다.

코트 전체에 기묘한 정적이 감돈다. 자신만만하게 착지했던 디안드레는 멍하니 출렁이는 그물을 바라보며 굳어 버렸다. 기태의 얼굴은 얼음처럼 차갑다. 환호도, 미소도 없다. 오직 성공률 100%의 수식을 증명해 냈다는 냉정함만이 눈동자에 서려 있을 뿐이다.

"말했잖아, 에밀리."

기태가 가볍게 숨을 내쉬며 중얼거린다.

"표는 환불하라고."

그 순간, 기태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발생한다. 뜨거운 불덩이가 혈관을 타고 역류하는 감각에 기태는 비틀거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삐빅-!

귀를 찢는 듯한 경고음이 머릿속을 울린다.

========================================= [경고: 심박수 163bpm 돌파] [동맥 산소 포화도 급감: 98.7% -> 85.2%] [심장 근육 미세 손상 누적 중 (위험도: 하)] =========================================

시야가 피를 흘리듯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단 한 번의 완벽한 슛을 던진 대가로, 그의 심장이 무자비하게 갉아 먹히고 있었다. 기태는 가슴의 통증을 억누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은 축복이 아니다. 생명을 담보로 한 붉은 맹약이다.

숨이 가빠오는 기태의 등 뒤로, 디안드레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다시 다가오기 시작한다.

"이리 내놔, 옐로 몽키."

디안드레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기태의 가슴팍을 억척스럽게 밀쳐낸다. 두터운 가슴 근육이 기태의 쇄골뼈를 짓누른다. 기태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무게중심을 낮춘다. 갈비뼈 부근이 욱신거리지만, 표정 하나 바꾸지 않는다.

심박수 165bpm.

가슴속에서 뜨거운 용암이 요동치는 감각이 선명하다. 기태는 길게 숨을 내쉬며 폐부에 남아 있는 산소를 쥐어짜 낸다.

"뽀록은 한 번으로 족해."

디안드레가 신경질적으로 공을 요구한다. 탑 부근에서 볼을 건네받은 그가 기태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몸싸움으로 기태의 얇은 프레임을 완전히 부셔놓겠다는 악의가 눈빛에 가득하다.

코트 어스름한 관중석 한구석, 태블릿을 쥐고 있던 에밀리 정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인다. 그녀의 시선은 기태의 미세하게 떨리는 왼쪽 어깨에 머물러 있다.

"덤벼 봐."

기태가 낮게 읊조린다.

쿵, 쿵!

디안드레가 육중한 드리블로 기태의 오른쪽 어깨를 파고든다. 1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거구가 주는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기태는 상태창을 켜지 않는다. 날것의 신체로 디안드레의 묵직한 돌파를 온몸으로 받아낸다.

*지금은 켤 때가 아니다.*

머릿속 장부가 실시간으로 경고하고 있다. 상태창의 유지는 곧 죽음으로 가는 급행열차다. 찰나의 순간, 단 1초의 효율을 극대화해야만 이 지옥 같은 코트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디안드레가 기태를 등지고 스핀무브를 시도한다. 거대한 엉덩이와 덩치로 기태의 시야를 가로막은 채, 오른손으로 훅슛을 올리려는 찰나.

'지금이다.'

[상태창 ON]

시야가 피빛으로 물들며 디안드레의 겨드랑이 밑, 공을 쥔 손목의 아주 미세한 틈새가 선명한 붉은색 실선으로 관통된다. 0.3초의 틈새.

기태의 오른손이 살무사처럼 날카롭게 파고든다.

팍!

정확하게 공만 긁어내는 소리가 체육관을 때린다. 디안드레의 손아귀를 벗어난 농구공이 바닥을 뒹군다. 기태는 망설이지 않고 루즈볼을 낚아채며 반대편 코트로 질주한다.

"이 새끼가!"

등 뒤에서 이성을 잃은 디안드레의 고함이 터져 나온다. 짐승 같은 탄력이 기태의 등 뒤를 무섭게 추격한다.

하프라인을 넘어 3점 라인 진입. 기태는 레이업을 위해 도약할 준비를 한다. 하지만 등 뒤에서 덮쳐오는 그림자의 크기가 심상치 않다. 블록슛을 노리는 움직임이 아니다. 공중에서 기태를 완전히 밀어버리려는 무자비한 보디 체크다.

휘슬은 울리지 않는다. 여기는 길거리 싸움이나 다름없는 서머리그 트라이아웃 매치다.

공중으로 솟구치는 기태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디안드레의 육중한 팔뚝이 그대로 날아와 박힌다.

쿵!

"앗……!"

에밀리 정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진다.

공중에서 중심을 잃은 기태의 몸이 기괴하게 비틀린다. 이대로 떨어지면 왼쪽 무릎이 먼저 바닥을 찍는다. 과거의 비극, 연골이 으스러지고 힘줄이 끊어지던 그 끔찍한 파열음이 뇌리를 스치며 온몸의 세포가 공포로 울부짖는다.

살아야 한다. 다시는 그 지옥으로 돌아갈 수 없다.

기태는 착지 직전, 전신 근육을 극한으로 쥐어짜 내며 강제로 몸을 회전시킨다. 오른쪽 다리에 모든 하중을 싣기 위해 허리를 꺾는 순간, 가슴속 현수막이 찢어지는 듯한 극통과 함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두근! 두근! 두근!

귓가를 때리는 심장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이 거대해진다.

========================================= [위험: 심박수 180bpm 초과!] [동맥 산소 포화도 급감: 85.2% -> 62.1%] [경고: 심각한 신체 손상 위험 감지] =========================================

시야를 가득 채운 붉은색 상태창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묘한 보라색 시스템 메시지가 기태의 망막 위로 투두둑 떨어져 내린다.

========================================= [시스템 숨겨진 프로토콜 활성화] - 경고: 심박수 180bpm 초과 상태 지속 시, '붉은 선'의 표기 및 연산 속도가 200%로 가속됩니다. - 대가: 극단적인 근육 파열 및 심장 마비 부작용이 실시간으로 누적됩니다. =========================================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기태의 몸이 코트 바닥을 거칠게 뒹군다.

오른쪽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통증과 함께, 눈앞의 붉은 궤적 선들이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재구성되며 눈을 멀게 할 만큼 강렬한 빛을 내뿜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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