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안 공자? 이 깊은 밤에 여기서 무엇을……."
횃불을 치켜든 기사의 굵직한 목소리가 컴컴한 어둠을 갈랐다. 붉은 불꽃이 일렁이며 내 창백한 얼굴을 비추었다.
그 순간 내 심장은 정확히 세 박자쯤 멈췄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광란의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망했다. 완전히 망했어. 마신 숭배자가 떨어뜨린 비밀 유착 서류가 저 아래 골짜기에 처박혔는데, 하필 이 타이밍에 기사단이랑 마법 교수가 들이닥치다니! 여기서 수상한 짓을 하던 걸 들키면 반역죄나 마교도로 몰려 단두대에서 목과 몸이 강제 이별을 하게 될 게 뻔하다!'
차가운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내 빌어먹을 대인기피증과 극심한 불안 장애는 이번에도 나를 배신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살리기 위해 가식과 오만의 성채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견고하게 쌓아 올렸다.
스르륵, 내 얼굴 근육이 일체의 감정을 지운 채 북극의 빙하처럼 차갑게 굳어갔다.
"밤공기가 참으로 가볍더군."
내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사막의 건조한 밤바람보다도 서늘했고,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너희들의 눈은 그저 장식용인가? 아니면 내가 이 깊은 밤에 몸소 이곳에 나와 서 있는 이유를, 굳이 내 입으로 시시콜콜 설명해야 할 만큼 그 머릿속이 텅 비어 있는 건가?"
오만하기 짝이 없는 반어법이었다. 기사들과 그들을 대동한 마법 교수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내가 서 있는 위치와, 조금 전 흑색 로브의 그림자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난 방향을 번갈아 보더니 스스로 거대한 오해의 늪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 아드리안 공자께서…… 직접 이 어둠 속의 쥐새끼들을 추적하고 계셨던 거군!"
"감히 저희가 레온하르트 가문의 혜안을 의심했습니다.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교수와 기사들은 허리를 폴더처럼 접으며 허둥지둥 물러났다. 나는 그들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숲속 어둠 너머, 까마득한 북동쪽 탑 아래 영지 밑바닥을 응시했다. 흑색 로브를 쓴 마신 숭배자의 우두머리, 베르무트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뜨린 '제국 금단의 마장 직인이 찍힌 비밀 양해서'가 저 차디찬 어둠 속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을 터였다.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며, 어둠 속에 숨어 숨죽이고 있던 카이저를 턱끝으로 가리켰다.
"가서 쓸쓸히 버려진 쓰레기나 수거해 오도록."
"마스터의 뜻대로."
카이저는 이 짧은 지시를 마치 인류의 운명을 결정지을 성스러운 계시라도 되는 양 엄숙하게 받아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
다음 날 아침.
벨하르트 아카데미 북동쪽 탑 꼭대기에 위치한 나의 개인 병실이자 허름한 서재, '바벨의 다락방'.
방 전체에 지독하고 씁쓸한 약초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 밤새 이슬을 맞았는지 머리칼이 촉촉하게 젖은 카이저가 무릎을 꿇고 서 있었다. 그의 눈 밑에는 튱튱 불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광신도의 그것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마스터. 분부하신 대로 밤새 경계를 서며 쥐새끼들이 도망친 경로를 샅샅이 뒤져, 영지 밑바닥 깊숙한 곳에서 마스터의 영역을 더럽히던 이 사악한 물건을 수거해 왔습니다."
카이저가 품속에서 조심스럽게 꺼내 밀어놓은 것은, 붉은색 마장 직인이 기괴하게 찍힌 낡은 양가죽 종이였다.
'……아니, 난 그냥 밤에 너무 바깥바람이 차니까 너도 대충 철수하면서 발밑에 떨어진 쓰레기나 주워 오라는 뜻이었는데. 왜 진짜로 밤을 새워서 그걸 찾아온 거야?'
속으로는 황당함과 미안함에 비명을 질렀지만, 겉으로 드러난 내 모습은 그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나른하고 냉담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고생했다, 카이저."
내 차가운 한마디에 카이저의 탄탄한 어깨가 감격으로 가늘게 떨렸다.
나는 가죽 탁자 위에 놓인 양가죽 종이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동시에 내 영혼을 갉아먹는 초월적 이능, '심측의 기록서(深測의 記錄書)'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기동하기 시작했다.
스스스스…….
머릿속에서 푸른 책자가 거칠게 펼쳐지며 가슴팍이 찢어지는 듯한 불길이 혈관을 타고 치솟았다. 기혈이 역류하며 숨결에 뜨거운 피 냄새가 섞였다.
[심측의 기록서가 대상의 '비밀'을 판독합니다.] [경고: 정보의 격이 매우 높습니다. 판독 시 사용자의 생명력이 소모됩니다!] [대가로 인해 사용자의 생명력이 5일 소모됩니다.] [현재 남은 수명: 2일]
'이틀?! 미친, 이틀 뒤에 나 죽는 거야?! 이게 무슨 생명력 조기 퇴근하는 소리야!'
눈앞이 노랗게 변하는 아찔한 절망감 속에서도, 기록서가 뱉어낸 붉은 글씨들은 내 망막에 선명하게 박혔다.
[진실: 이 문서는 단순히 마신 숭배자들의 소환 양서가 아닙니다. 제국 최대의 거상, '크로이츠 상회'의 극비 위조 직인입니다. 상회의 핵심 지배권을 둘러싼 후계 구도를 뒤흔들 수 있는 치명적인 밀수 증서입니다.]
머리가 깨질 듯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남은 수명은 단 이틀. 당장 내 기혈을 안정시키고 수명을 늘려줄 최고위 성수를 수급하지 못하면 모레 아침에 나는 싸늘한 시체가 된다. 그리고 그 성수를 가장 확실하게, 다량으로 보유하고 있는 곳은 제국 금융망을 장악하고 황실과 유착 관계를 맺은 '크로이츠 상회'였다.
나는 기록서의 텍스트를 조금 더 깊이 파고들었다.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은 고통을 억누르며, 이 위조 직인에 얽힌 마력의 파장을 역추적했다.
스스스스.
[인장 마력 역추적 결과: 해당 위조 마력은 제국 공용 마법 화폐 '리브라 시길'의 기적 인쇄술에 사용되는 특수 잉크와 99.8% 일치합니다.] [치명적 결함 발견 (복선 2): 크로이츠 상회가 독점 발주하는 '리브라 시길'의 특정 제조년도 국산 특수 잉크는 치명적인 마력 증발 결함을 품고 있습니다. 대기 중의 마나 밀도가 급감하거나, 인쇄 후 일정 철이 지나면 기적의 잉크가 서서히 기화하여 지폐의 마법 무늬와 액면가가 완전히 소멸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위조지폐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륙 전역의 신용을 지탱하는 마법 화폐 자체가 허공으로 기화해 사라진다는 소리다. 만약 이 사실이 세간에 드러난다면? 사람들은 당장 가지고 있는 리브라 시길을 실물 자산으로 바꾸기 위해 크로이츠 상회로 몰려들 것이고, 상회는 단 하룻밤 만에 뱅크런으로 파산할 터였다.
그리고 이 가공할 만한 결함을 가장 철저히 감추고 싶어 하는 인물은 바로…….
똑똑.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벨의 다락방 문이 거칠게 두드려졌다. 예의를 가장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명백한 압박과 오만이 실려 있는 무거운 노크 소리였다.
"아드리안 레온하르트 공자. 크로이츠 상회의 엘리시아 크로이츠입니다. 잠시 대화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차가운 얼음 유리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문을 통과해 흘러들었다.
문이 열리며 화려한 은발을 단정하게 땋아 내린 소녀가 걸어 들어왔다. 대륙 최대 상회의 정당한 상속녀이자, 인간조차 주판알로 튕겨 계산한다는 이성주의자, 엘리시아 크로이츠였다. 그녀의 뒤로는 위압적인 기운을 풍기는 상회 직속의 호위 기사들이 삼엄하게 도열했다.
그녀는 허름하고 지독한 약초 냄새가 진동하는 내 병실을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훑었다. 철저히 상대를 깔보고 들어오는, 전형적인 포식자의 태도였다.
"용건만 간단히 하죠, 레온하르트 공자."
엘리시아는 내 책상 위에 놓인 양가죽 종이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어젯밤 공자의 시종이 이 근방에서 저희 상회의 물건을 가져갔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저희 크로이츠 가문의 극비 내부 문서입니다. 외부인이 소지하고 있을 물건이 아니지요. 순순히 돌려주신다면, 공자의 무례를 너그럽게 덮어두겠습니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그녀는 나를 그저 가문에서 버림받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한부 쓰레기로 보고 있었다.
상대방 기사들이 뿜어내는 기세에 억눌려, 내 심장이 다시 한번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대인기피증과 불안 장애가 전신을 지배했다. 뇌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으아악! 살려줘! 기사들 칼이 너무 번쩍여! 그냥 당장 돌려주고 빌까? 성수 한 병만 달라고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나?!'
하지만 내 몸은 내 빈약한 영혼의 비명을 가뿐히 씹어 삼켰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극도의 긴장감은, 내 약해진 폐부를 사정없이 찔렀다. 기혈이 꼬이며 목구멍으로 뜨겁고 비린 액체가 울컥 솟구쳤다.
"쿨럭! 쿨럭……!"
나는 참지 못하고 격렬하게 기침을 토해냈다. 검붉은 선혈이 내 입술 사이로 뿜어져 나와, 책상 위에 펼쳐진 양가죽 문서 위로 뚝뚝 떨어졌다. 허연 양가죽 위에 내 피가 덧칠해지며 기괴하고도 잔혹한 문양을 만들어냈다.
엘리시아의 차가운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녀의 호위 기사들이 본능적으로 검자루를 쥐며 긴장했다.
나는 피 묻은 입술을 실크 손수건으로 천천히, 그리고 아주 우아하게 훔쳤다. 내 얼굴은 고통을 느끼기는커녕, 오싹할 정도로 차갑고 고요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내 입은 세상에서 가장 오만하고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어조를 높였다.
"돌려준다라……."
내 목소리는 마치 심연의 밑바닥에서 울려 퍼지는 저주처럼 방 안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엘리시아 크로이츠. 귀하의 눈에는 내가 이따위 조잡한 위조 종이 쪼가리에 매달려 구걸하는 자로 보이는 모양이군."
"……무슨 뜻이지요?"
엘리시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냉정하던 그녀의 목소리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피로 물든 양가죽 문서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 위조 직인이 보증하는 밀수품의 가치가 얼마나 되나? 고작 수만 골드 수준이겠지. 크로이츠 상회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푼돈이다."
나는 몸을 앞으로 조용히 기울였다. 내 차가운 안광이 그녀의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를 송곳처럼 꿰뚫었다.
"하지만…… 귀하가 목숨처럼 발행하는 그 눈부신 마법 지폐는 어떨까?"
그 순간, 엘리시아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
"마나의 흐름은 참으로 정직하지. 아무리 위대한 연금술과 인쇄술이라 해도, 그 본질적인 결함까지 영원히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니까."
나는 피 묻은 검지 손가락으로 양해서를 스르륵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기적의 잉크가 한 철도 지나지 않아 기화한다는 것을, 귀하의 부친이 아신다면 어떨지."
바벨의 다락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얼어붙었다. 엘리시아 크로이츠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그녀는 마치 세상의 종말을 목도한 사람처럼, 사르르 떨리는 입술을 짓씹으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