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켜."
내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그러나 길을 가로막은 검은 정장 차림의 사내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청문회장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은 한준서의 최정예 직속 호위 기사들이었다.
회의실 안쪽에서는 서류 뭉치를 찢어발기며 퇴장하는 카르텔 대표 법무팀의 비명과 고함이 어지럽게 뒤섞여 들려왔다.
그 소음 속에서 호위 기사단의 대장, 차진욱의 심복인 강현수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경쾌한 마찰음과 동시에, 그들의 품 안에서 기괴한 톱니바퀴 문양의 장치들이 붉은 빛을 뿜어냈다.
"임강우 헌터. 여기서 순순히 사라져 주셔야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닥이 꺼져 내리기 시작했다.
우지끈!
공간이 비틀리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발밑의 대리석 바닥이 순식간에 진흙처럼 흐물거리더니, 시커먼 심연의 구멍으로 변했다.
"어, 어라?!"
내 바로 뒤를 따르던 유설아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구두 굽이 허공을 맴돌며 중심을 잃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려 했지만, 이미 왜곡된 중력이 우리를 아래로 세차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슈우우우웅!
마치 고속 엘리베이터의 케이블이 끊어진 듯한 추락감.
시야가 온통 붉고 검은 기류로 뒤덮였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바람 소리 사이로, 시스템의 경고음이 고막을 두드렸다.
[경고: 비인가 공간 왜곡 장치 '아스모데우스의 거울'이 작동했습니다.]
[경고: 외부와의 실시간 통신이 차단됩니다.]
[경고: 미등록 불법 격리 던전 '침묵의 나락'에 진입합니다.]
"이 미친 새끼들이... 청문회장 바로 앞에서 납치를 감행해?"
나는 터져 나오려는 실소를 억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법이고 나발이고, 불리해지니 바로 깡패 새끼들 본색을 드러내는 꼴이 참 한준서다웠다.
사유지 동결 소송으로 숨통이 막히자, 아예 내 물리적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겠다는 수작이 분명했다.
쿵!
무거운 낙하 충격이 온몸을 강타했다.
등 가죽이 단단한 암석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파열음이 일었다.
"윽!"
짧은 신음과 함께 흙먼지가 사방으로 튀었다.
코끝을 찌르는 것은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비린내 나는 피비린내였다.
사방은 온통 거뭇한 현무암 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공동(空洞)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우리가 떨어져 내린 구멍은 이미 완벽하게 닫혀 흔적조차 없었다.
"콜록! 콜록...! 임강우 씨, 괜찮아요?"
바로 옆에서 유설아가 기침을 터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깔끔하던 정장 상의는 흙먼지로 엉망이 되어 있었고, 안경은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품 안에서 태블릿과 법적 서류 뭉치를 꽉 쥐고 있었다.
"여긴... 여긴 대체 어디죠? 협회 사법위원회 건물 바로 밑에 이런 공간이 있을 리가 없는데..."
"불법 개조된 사설 던전이겠지. 카르텔 놈들이 돈지랄로 공간을 비틀어 이어 붙인 장소 말이야."
나는 바닥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가슴 속에서 아레스의 심장이 불길하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빙령의 핵을 흡수해 겨우 잠재워 놓았던 괴사의 흉터가, 이 왜곡된 공간의 마력에 반응하듯 욱신거렸다.
가슴팍 피부 밑으로 붉은 실핏줄이 핏빛 그물처럼 뻗어 나가는 감각이 생생했다.
치료제가 필요했다.
이 새끼들의 마력을 통째로 뜯어먹어야 숨을 쉴 수 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타인에 대한 불신이 뼛속 깊이 스며든 나였다.
유설아가 아무리 나를 도우려 법적 면책 자료를 들고 다녀봤자, 결국 이 사선(死線)에서는 오직 내 자신만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다.
타인의 호의는 언제나 달콤한 독약이었으니까.
스스스스...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푸른 안광이 켜졌다.
검은 가죽 슈트를 입고 안면 마스크를 쓴 사내들이 바위 그림자 사이에서 소리 없이 솟아올랐다.
그들의 손에는 마력이 주입되어 웅웅거리는 특수 체인과 대형 낫이 들려 있었다.
카르텔이 은밀하게 운용하는 암살 특수조, '그림자 사냥꾼'들이었다.
그 수가 어림잡아 서른 명은 족히 넘어 보였다.
"임강우 씨, 제가 방어막 아티팩트를 전개할게요! 헌터법 제45조 긴급 피난 조항에 따르면..."
유설아가 다급하게 외치며 품에서 마력 스크롤을 꺼내려 했다.
그녀의 손가락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유능한 법조계 헌터라 해도, 실전 암살조들이 뿜어내는 살기 앞에서는 다리가 굳어버리는 법이다.
"방해되니까 저기 처박혀 있어."
"네? 하지만 같이..."
나는 그녀의 말을 더 듣지 않고, 덜덜 떠는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가차 없이 뒤쪽의 거대한 현무암 균열 틈새로 유설아를 내던졌다.
"꺄악!"
"거기서 대가리 처박고 숨소리도 내지 마. 뒤지기 싫으면."
철저한 단독 플레이.
협동? 파티 플레이?
그딴 건 나를 짐꾼 노예로 부려 먹기 위해 대형 길드가 주입한 가스라이팅용 개소리에 불과했다.
내 목숨은 오직 내 손으로만 지킨다.
내 몸이 부서지고 세포가 썩어 문드러지더라도, 남에게 등을 맡기는 멍청한 짓은 두 번 다시 하지 않는다.
"후우..."
나는 대검의 자루를 꽉 쥐었다.
가슴의 통증이 극에 달하며, 시야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 고통은 곧 힘이다.
적들의 피로 이 가슴의 갈증을 채워주마.
"목표 확인. 제거한다."
암살조의 리더가 차갑게 명령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수십 개의 쇠사슬이 뱀처럼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촤르르르르릉!
마력이 부여된 사슬들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공중에서 서로 얽히며 거대한 강철의 그물망을 형성했고, 내 도주로를 완벽히 차단하려는 '사슬 장벽'을 구축했다.
장벽에서 내뿜는 푸른색 전류가 지면을 태우며 찌릿한 소리를 냈다.
"고작 이딴 쇠사슬로 나를 묶겠다고?"
나는 실소를 흘렸다.
심장이 쿵, 하고 거세게 요동쳤다.
아레스의 심장이 숨겨두었던 신권(神權)의 마력을 폭발적으로 토해내기 시작했다.
화아아아악!
대검의 검신을 따라 검붉은 투기의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한 화염이 아니었다.
공간의 물리 법칙을 일시적으로 무시하는 신의 영역, '아레스의 투기'였다.
내 전신을 휘감은 핏빛 오라가 암흑 속에서 찬란하게 타올랐다.
지면을 박찬다.
콰아아앙!
바닥의 현무암이 과자 부러지듯 박살 나며 먼지를 피워 올렸다.
나는 그대로 사슬 장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대검이 허공을 가른다.
서어어억!
붉은 검광이 어둠을 쪼개며 반원을 그렸다.
암살자들이 쳐놓은 난공불락의 마력 사슬 장벽에 내 불꽃이 닿는 순간.
치이이이이익!
경악스러운 소리와 함께, 두꺼운 강철 사슬들이 순식간에 용해되기 시작했다.
마력 방어막도, 강화 합금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신권의 불꽃 앞에서는 그 어떤 현대 헌터의 무구도 한낱 양초에 불과했다.
"말도 안 돼! 장벽이 단 한 방에...!"
암살자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 빈틈을 내가 놓칠 리 없었다.
어깨로 들이받는다.
쿵!
가장 가까이 있던 암살자의 가슴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그가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가는 사이, 나는 대검을 역수로 쥐고 옆에서 덮쳐오는 낫을 쳐냈다.
깡!
불꽃이 튀는 순간, 상대의 낫날이 조각나 흩어졌다.
절대적인 무력의 차이.
F급이라는 꼬리표는 이미 내게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았다.
측정 불가 오류가 증명하듯, 나는 이 세계의 시스템 위에 존재하는 파괴신이었다.
슈우욱!
암살자의 단검이 내 뺨을 스쳤다.
뺨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회전한다.
가로벤다.
서어어억!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암살자의 목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검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내 얼굴에 튀었다.
뜨거운 피의 온도가 내 광기를 더욱 부추겼다.
"더 가져와라. 이딴 쓰레기 마력으론 간에 기별도 안 가니까!"
나는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다음 타깃을 향해 쇄도했다.
쿵, 콰과광!
동굴 벽이 무너져 내리고, 암살자들의 신형 무기들이 내 검날 아래에서 추풍낙엽처럼 부러져 나갔다.
단 5분.
그 짧은 시간 동안, 청문회장의 기세등등하던 암살조는 절반 이상이 고기반죽으로 변해 바닥을 뒹굴었다.
"괴, 괴물이다...! 이 새끼 절대 F급이 아니야!"
남은 암살자들이 덜덜 떨며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리더, 강현수 역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특수 아티팩트 송신기가 잘게 떨렸다.
"본부에 연락해...! 차진욱 대장님께 지원을...!"
"늦었어."
나는 이미 그의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내 손아귀가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의 단단한 강화 슈트 넥칼라가 내 악력에 찌그러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커헉...! 놔, 놓아라...!"
"놓아달라고? 너희들이 먼저 날 여기로 불렀잖아."
나는 비웃으며 그의 가슴팍에 직접 왼손을 가져다 댔다.
아레스의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하며 굶주린 아가리를 벌렸다.
스으으으으―
"아, 아아악! 내 마력이...! 영혼이...!"
강현수의 눈동자가 뒤집히며 전신이 발작하듯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청색의 마력 정수가 내 손끝을 타고 흡수되었다.
가슴 속의 통증이 순식간에 가라앉으며, 온몸의 세포가 활성화되는 극상의 쾌감이 밀려왔다.
[시스템: 고위 헌터의 영혼을 흡수합니다.]
[시스템: 아레스의 심장의 과부하 수치가 12% 감소합니다.]
[시스템: 영구 스탯 '근력'이 5 상승합니다.]
[시스템: 흡수된 영혼의 기억 단편을 재구성합니다.]
머릿속이 번쩍이며 기괴한 이미지들이 뇌리를 스쳤다.
한준서가 지하 비밀 연구실에서 수많은 몬스터의 핵을 불법적으로 개조하는 장면.
그리고 그 핵들을 카르텔의 핵심 간부들에게 유통하는 비밀 공급망의 좌표.
'강원도 폐광 지하 3층... 제4유통 허브.'
한준서의 거대한 기업 제국을 떠받치고 있는 심장부 중 하나의 위치가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하하... 찾았다."
나는 힘이 빠져 껍데기만 남은 강현수의 신체를 쓰레기처럼 바닥에 던져버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살아서 서 있는 암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바닥은 온통 시체와 부서진 쇠사슬, 그리고 검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사박, 사박.
돌 더미 뒤에서 유설아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핏기가 완전히 가신 채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가 법률을 읊조리던 입술은 굳어 있었고, 내 손에 들린 피 칠갑이 된 대검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임강우 씨... 당신 대체..."
"말했잖아. 방해되니까 짜져 있으라고."
나는 대검을 털어 피를 바닥에 뿌렸다.
타인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경악하든, 두려워하든 그건 그녀의 사정이다.
중요한 건 내가 살아남았고, 한준서의 목을 벨 단서를 손에 넣었다는 사실뿐이니까.
그때였다.
우르릉! 쿠구구구궁!
격리 던전 전체를 감싸고 있던 보이지 않는 결계 장벽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간 제한이 다했거나, 혹은 외부에서 가해진 강력한 힘에 의해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구석의 허공이 유리창처럼 쩍쩍 갈라지더니, 빛줄기가 새어 들어왔다.
파아아앙!
마침내 격리 던전의 끝자락 장벽이 거대한 굉음과 함께 두 동강 나며 무너져 내렸다.
자욱한 먼지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그 먼지 틈새 너머로, 흐릿한 실루엣 하나가 고요히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깨에 걸쳐진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대검.
그리고 그 검신에서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푸른 뇌전의 불꽃.
소드마스터 강태훈이었다.
그는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걸어 나와, 바닥에 널브러진 카르텔 암살조의 시체들을 덤덤하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쩌렁쩌렁하던 목소리는 간데없고, 기묘할 정도의 침묵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강태훈의 시선이 천천히 이동하더니, 내 손에 들린 붉게 타오르는 대검에 고정되었다.
지잉...
그의 손이 자신의 보검, '뇌신'의 자루를 만지작거렸다.
그의 검신 안쪽, 내가 지적했던 미세한 마력 균열이 푸른 뇌전 사이로 검붉은 스파크를 튀기며 불안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강태훈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그 눈빛은 단순한 적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인으로서 느끼는 거대한 호기심, 그리고 알 수 없는 전율이었다.
"너... 그 힘은 대체 뭐냐."
그가 천천히 검자루를 쥐어짜듯 움켜쥐며, 한 걸음 내디뎠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긴장감이 무너진 던전 안을 가득 채웠다.